"바르크! 정신 차려봐, 바르크!"
루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온실의 유리 천장을 흔들었다.
이온의 손에서 떨어진 붉은 초콜릿 열매가 바닥의 흙 위로 힘없이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 온기를 되찾아가던 바르크의 작은 몸은, 이제 만지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로 차갑게 변해 가고 있었다. 파랗게 얼어붙은 혈관이 아이의 목줄기를 타고 올라와 뺨을 거쳐 눈가까지 뻗어 나갔다. 마치 살죽 아래에 푸른색 거미줄을 촘촘히 쳐놓은 것만 같았다.
"끄, 으으……."
바르크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숨소리가 아니었다. 단단한 얼음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서글픈 마찰음이었다. 아이의 동공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굳어 있었고, 작고 통통했던 손가락은 굳어버린 석고상처럼 빳빳하게 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온은 가슴이 덜컥 가라앉았다. 타인의 큰 목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얼어붙던 지독한 대인기피증이 다시금 그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고, 손끝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깊은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다는 본능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울부짖는 루미의 작은 어깨가 보였다. 동생을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그 간절한 눈망울이 이온의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여기서 물러서면 안 돼. 내가 도망치면, 이 아이들은 정말로 부서져 버려.'
이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입안에 퍼지자 몽롱하던 정신이 벼락을 맞은 듯 맑아졌다. 그는 품 안에서 세차게 진동하는 영식 도감을 꺼내 들었다. 가죽 표지가 붉은빛으로 깜빡이며 경고를 쏟아내고 있었다.
[경고! 환자의 심장 부근에 이식된 제국 기사단의 '강제 마력 결정석' 파편이 마독을 폭증시키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 8분 47초.] [일반적인 정화 열매로는 체내 깊숙이 박힌 결정석의 마독을 녹일 수 없습니다. 더욱 강력한 정화 마력을 지닌 고단계 식물의 개량이 필요합니다.]
"도감, 방법을 알려줘. 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요리가 있을 거 아니야!"
이온이 마음속으로 외치자, 황금빛 책장이 거칠게 넘어가며 새로운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그곳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카카오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기적의 은빛 카카오나무 (2단계 개량 식물)] - 효능: 체내에 고착된 고농도의 마독을 흔적도 없이 정화하고, 손상된 마력 회로를 부드러운 온기로 재건함. - 개량 조건: 시전자의 생명력 일부를 매개로 한 즉시 발아 및 초고속 성장. - 대가: 개량 완료 즉시 시전자는 심각한 생명력 소모로 인해 최소 사흘 동안 깊은 기면증에 빠지게 됨.
"기면증……."
이온의 조용한 목소리가 온실의 적막 속에 흩어졌다. 사흘 동안 시체처럼 잠든다는 것은, 이 혹한의 동토에서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노출한다는 뜻이었다. 만약 그 사이에 굶주린 마수나 난폭한 약탈자들이 들이닥친다면 꼼짝없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르크의 숨소리는 이제 가느다란 실바람보다도 약해져 있었다. 아이의 가슴팍이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는 것을 본 순간, 이온의 마음속에서 망설임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할게. 개량해 줘."
그가 도감의 은빛 페이지 위에 손바닥을 굳건히 얹었다.
그 순간, 온실 바닥의 흙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온의 손바닥을 시작으로 온몸의 온기가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갔다. 뼛속까지 시려 오는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고, 무릎이 꺾여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시야가 흐려지고 귀가 먹먹해졌다. 자신의 생명력이 대지의 맥박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스스스스-.
이온의 발치에서 작은 새싹 하나가 흙을 밀쳐내고 얼굴을 내밀었다. 새싹은 순식간에 줄기를 뻗으며 허공을 향해 자라났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머금은 듯한 은빛 잎사귀들이 사방으로 펼쳐졌고, 줄기는 단단한 나무껍질을 두르며 굵직한 나무로 성장했다. 온실 안 가득 은은하고 달콤한 초콜릿 향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나무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 이온의 키를 훌쩍 넘어섰다. 그리고 가지마다 순백의 꽃들이 눈송이처럼 피어났다가, 이내 스러지며 달걀만 한 크기의 은빛 카카오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하아, 하아……."
이온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솜이불을 물에 적신 것처럼 무거웠지만, 지금은 쓰러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은빛으로 탐스럽게 익은 카카오 열매 세 개를 조심스럽게 수확했다. 열매의 겉면은 마치 차가운 금속 같았지만, 그 안에서는 심장 박동처럼 따뜻한 마력의 파동이 고동치고 있었다.
"루미, 부엌으로 가자. 불을 지펴줘."
이온이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하자, 넋을 잃고 나무를 바라보던 루미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도울게, 형!"
이온은 온실 한쪽에 마련된 임시 주방으로 향했다. 무거운 무쇠 솥을 화덕 위에 올리고, 온실에서 기르는 정화의 샘물을 가득 채웠다. 물이 끓기 시작하는 동안, 그는 은빛 카카오 열매의 단단한 껍질을 칼끝으로 쪼갰다.
바삭, 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껍질이 갈라지며 안에서 유백색의 부드러운 과육과 보랏빛이 도는 신비로운 카카오 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온은 뜨겁게 달궈진 돌판 위에 빈을 올리고 정성스럽게 볶기 시작했다.
탁, 타닥.
카카오 빈이 익어가며 내는 소리는 마치 깊은 산속의 모닥불이 타닥이는 소리 같았다. 볶아진 빈을 절구에 넣고 곱게 빻는 이온의 손길은 섬세하고 정교했다. 대인기피증으로 사람들과 마주할 때는 한없이 움츠러들던 소년이었지만, 식물을 다루고 요리를 할 때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 의연하고 집중력 넘치는 장인의 모습이었다.
서걱서걱, 절구 속에서 카카오 가루가 고운 입자가 되어갔다. 향긋하면서도 쌉싸름한 특유의 향이 온실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며, 얼어붙어 있던 공기를 부드럽게 녹여내기 시작했다.
이온은 곱게 간 카카오 페이스트에 정화의 샘물과, 지난번에 채취해 둔 단호박의 단즙을 조금 섞었다. 그리고 마법 온실의 마스코트인 달빛 은총초의 잎사귀 한 장을 조심스럽게 띄웠다.
화덕의 불길 위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은빛 초콜릿 수프는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부드러운 거품을 내뿜었다. 검붉은 빛깔 위에 은빛 마력의 띠가 잔잔하게 소용돌이치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비로웠다.
"다 됐다. 바르크에게 먹이자."
이온이 정성스레 끓여낸 따뜻한 초콜릿 수프를 그릇에 담아 바르크의 곁으로 다가갔다. 바르크의 온몸은 이제 거의 완벽한 청색 유리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가슴의 고동은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했다.
"루미, 바르크의 머리를 살짝 받쳐줘."
"응, 응……."
루미가 울먹이며 동생의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이온은 나무 숟가락으로 따뜻한 초콜릿 수프를 듬뿍 떠서 바르크의 굳게 다물린 입술 사이로 흘려 넣었다.
처음에는 수프가 입술 틈새로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정화의 온기가 닿자마자, 바르크의 입술을 덮고 있던 청색 마비독의 막이 스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스으으-.
차가운 얼음판 위에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입술에서부터 시작된 정화의 물결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바르크의 목울대가 크게 요동치더니, 수프를 꿀꺽 삼켰다.
"삼켰어……! 삼켰어, 형!"
루미가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이온은 멈추지 않고 남은 수프를 한 숟가락씩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먹였다. 수프가 아이의 배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사지를 옥죄고 있던 단단한 청색 마비독의 껍질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쩍, 쩌적!
유리가 깨지는 듯한 맑은 소리와 함께, 바르크의 피부를 덮고 있던 푸른 광막이 산산조각 나며 허공으로 증발하기 시작했다. 증발한 마독은 검푸른 연기가 되어 온실 천장의 환기구 너머로 사라졌다.
"커헉! 퉤!"
갑자기 바르크가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아이의 입에서 시커멓고 차가운 피딱지와 마력 결정 파편들이 한 움큼 바닥으로 쏟아졌다. 제국의 잔인한 마법 약물로도 결코 제거할 수 없어서, 수많은 수인 아기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천형의 본체가 뱉어진 것이었다.
"하아…… 후우……."
거친 기침이 멎자, 바르크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차갑게 식어 있던 아이의 뺨에 순식간에 발그레한 핏기가 돌았다. 청색 대리석 같았던 피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기 수인 특유의 부드럽고 따스한 살결로 돌아와 있었다.
바르크가 천천히 눈을 떴다. 맑은 갈색 눈동자가 이온을 향했다.
"어…… 형아……?"
바르크의 목소리는 아직 조금 잠겨 있었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생명의 온기가 담겨 있었다.
"바르크!"
루미가 동생을 꽉 껴안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바르크는 상황을 잘 모르겠다는 듯 둥근 귀를 쫑긋거리며 누나의 등을 토닥였다.
"바르크, 몸은 좀 어떠니? 아픈 곳은 없어?"
이온이 조심스럽게 묻자, 바르크는 자기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응! 몸이…… 청소한 것처럼 엄청 가벼워! 그리고…… 배고파."
그 천진난만한 대답에 이온은 참았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조차 포기하고 '쓸모없는 가축'이라며 버렸던 수인의 불치병을, 오직 온실의 기적과 따뜻한 초콜릿 요리 한 그릇으로 완벽하게 치료해낸 순간이었다.
이온의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뿌듯함과 깊은 안도감이 차올랐다. 누군가를 구했다는 사실이, 버려졌던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마저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그때, 루미가 눈물을 훔치며 이온의 옷자락을 수줍게 붙잡았다.
"형…… 이거……."
루미가 꼬질꼬질한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이온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칠이 벗겨지고 톱니바퀴 몇 개가 어긋나 깨진, 낡은 장난감 태엽 장치였다. 수용소에서 도망칠 때 유일하게 챙겨온, 아이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었다.
"우리 살려줘서 고마워. 이거…… 내가 제일 아끼는 건데, 형 줄게. 아직 쓸 수 있어."
바르크도 누나의 옆에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수줍음과 경계심이 가득했던 아이들의 눈빛에는 이제 이온을 향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이온은 손바닥 위의 차가운 태엽 장치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깨지고 망가진 고물이지만, 그 안에는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이온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살포시 쓰다듬어 주었다. 바르크는 부끄러운지 귀를 붉히면서도 이온의 손길에 머리를 더 비벼댔고, 루미는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따스한 교감의 순간, 이온의 귓가에 딩동 하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영식 도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스템 알림: 조건 충족.]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공존의 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세계수의 맥박이 공존의 계약을 승인합니다.] [정화력의 감소 없이 기적의 열매 능력이 영구히 유지됩니다.] [특수 효과 획득: '숲의 신뢰'. 정원 내 식물들의 성장 속도가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아…… 그렇구나.'
이온은 깨달았다. 이 힘은 남을 지배하거나 부를 쌓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상처 입은 이들이 서로를 보듬고, 온기를 나누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기적이었다. 그 법칙을 깨닫는 순간, 이온의 마음속에 있던 대인기피증의 어두운 장벽이 아주 조금은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쿵-.
이온의 무릎이 힘없이 바닥으로 꺾였다. '세계수의 맥박'을 무리하게 발동해 마법 나무를 급속 개량한 대가가 본격적으로 그의 육체를 덮쳐오기 시작한 것이다.
"형? 왜 그래?"
루미가 놀라 이온의 팔을 붙잡았지만, 이온의 눈꺼풀은 이미 천근만근 무거워져 있었다. 사지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정신이 아득한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지독한 기면증의 습격이었다. 사흘 동안 깊은 잠에 빠져야 하는 제약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 잠깐 잠이 오네. 미안해, 애들아……."
이온은 간신히 말을 마친 뒤, 온실 바닥의 부드러운 흙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눈이 감기기 직전, 이온은 온실 밖 정원 경계에 심어두었던 가시덤불 씨앗을 떠올렸다. 1화에서 심어두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 씨앗이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조금씩 싹을 틔워 정원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아직 침입자를 완벽히 막아내기에는 이른 상태였다.
'제발…… 내가 잠든 동안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이온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침잠했다. 깊고 깊은 잠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깊은 밤이었다.
새근새근 잠든 이온의 곁에서, 루미와 바르크는 그의 겉옷을 이불 삼아 덮어주고 곁을 지키고 있었다. 온실 안은 은빛 카카오나무의 온기로 여전히 따뜻했다.
스륵, 서걱.
그때, 온실 밖에서 불길하고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루미와 바르크의 동물적인 귀가 동시에 쫑긋 섰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온기가 순식간에 가시고, 극도의 공포가 다시금 들어찼다.
서걱, 서걱. 끄으으으-.
그것은 굶주림에 미쳐버린 들개 무리, 혹은 노스트바르트의 마수들이 온실을 둘러싼 울타리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긁어대는 소리였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정원 경계의 가시덤불을 헤집는 포악한 짐승들의 발톱 소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온실을 향해 육박해오고 있었다.
이온은 깊은 기면증에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침입자들을 막아줄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깨어있는 것은 아직 조그맣고 약한 두 아기 수인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굶주린 짐승들의 눈동자가 온실의 유리창 너머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