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틈을 타고 들어온 칼바람이 온실의 따스한 공기를 날카롭게 베어 물었다.
유리창 너머, 새하얀 설원 위로 점점이 새겨진 붉은 얼룩이 이온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송이가 흩날리는 회색빛 장막 사이로 뚝뚝 떨어진 붉은 핏자국이 온실의 마법 정화 경계선 안쪽을 향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
이온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목구멍 밑바닥에서부터 차가운 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어깨가 사정없이 떨렸고, 손가락 끝은 감각을 잃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과거 누군가의 고함과 차가운 거절 속에서 홀로 버려졌던 기억이 돋아나 뇌리를 헤집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면, 낯선 존재가 다가오기만 하면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통증을 유발하는 중증 대인기피증이 그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가지 마. 저 문 너머에는 위험한 것들이 가득해.’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정체 모를 존재가 온실 안으로 들어온다면, 간신히 손에 넣은 이 안전하고 따뜻한 보금자리가 순식간에 깨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 매서운 바람 소리를 뚫고 다시 한번 작은 비명이 온실 벽을 두드렸다.
끼이이익…… 낑, 끄으으…….
동물의 울음 같기도 하고, 갓난아기의 자지러지는 신음 같기도 한 가냘픈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온의 가슴 가장 깊은 곳,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아 차갑게 식어 가던 빈자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 지독한 동토에서 차갑게 얼어붙어 가며 혼자 울고 있을 누군가의 모습이, 제 손을 잡아 줄 어른 하나 없이 버려졌던 자신의 유년 시절과 겹쳐 보였다.
이온은 떨리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손가락을 꽉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들 때쯤, 그는 낡은 가죽 외투를 걸치고 온실 문을 밀어 열었다.
끼이이익-!
두꺼운 철제 문이 열리자마자 뺨을 때리는 혹한의 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머리카락이 눈보라에 사정없이 날렸고,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 정도의 매서운 냉기가 전신을 덮쳤. 이온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으며 붉은 핏자국을 추적했다.
온실의 정화 경계선 바로 바깥, 눈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작은 더미가 보였다.
"……!"
이온은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섰다.
눈밭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은 아주 작은 두 생명체였다. 늑대 혹은 여우의 귀를 닮은 뾰족한 귀가 머리 위로 돋아나 있었고, 등 뒤로는 흙먼지와 피로 가득 얼룩진 꼬리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제 몸집보다 조금 더 큰 아이가, 자신보다 훨씬 작은 갓난아기 수준의 동생을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추, 추워…… 살려……."
큰 아이의 입술 사이로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의 얼굴은 물론이고, 눈 밑과 목덜미까지 온통 푸르스름한 빛깔의 서리가 끼어 있었다. 사지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지, 아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눈만 겨우 뜨고 있었다.
이온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다가갔다. 대인기피증 때문에 사람의 형상을 한 존재를 마주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장벽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들은 위협적인 어른이 아니었다. 그저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작고 가녀린 아기 수인들이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으니까……."
이온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눈밭 위에 엎드려 있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온몸을 바들바들 떨던 큰 아이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듯 고개를 쳐들었다. 핏발이 선 푸른 눈동자가 이온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이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르렁거렸지만, 그 목소리에는 경계보다 더 큰 슬픔과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저, 저리 가……! 내 동생 건드리지 마……! 흐윽, 버리지 마세요……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마……."
아이는 이온의 손가락을 꽉 깨물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살죽을 파고들었지만, 이온은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이빨 사이로 느껴지는 아이의 턱관절이 추위와 공포로 사정없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고스란히 느꼈다.
아무도 자신을 버리지 않는 안전한 공동체를 원했던 소년의 마음에, 버려지지 않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는 아기 수인의 눈물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온실 밖의 세상이 이 작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온은 아픔을 참아내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아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안 버려. 아무 데도 안 보낼게.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가 눈보라의 소음을 지워 가며 아이들의 귓가에 닿았다.
이온의 체온이 머리를 타고 전해지자, 큰 아이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마저 차가운 공기 속에서 결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이는 이온의 온기에 안심한 듯, 스르르 눈을 감으며 스러지듯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 품 안에서 꼬물거리던 더 작은 아기 역시 차가운 숨을 헐떡이며 축 늘어졌다.
이온은 두 아이를 단단히 품에 안아 올렸다. 깃털처럼 가벼운 무게감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뼈마디가 고스란히 만져질 정도로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였다.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철문이 닫히자, 바깥의 칼바람은 차단되고 온실 내부의 아늑하고 따스한 공기가 세 사람을 감싸 안았다.
온실 바닥에 푹신한 양모 이불을 겹겹이 깔고, 이온은 두 아이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실내의 온기가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피부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특히 목덜미와 손끝, 발끝은 마치 파란 유리처럼 투명하고 딱딱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평범한 동사 증상이 아니었다.
이온은 품 안에서 고대의 양장본 책, ‘영식 도감’을 꺼내 들었다.
스르륵-!
도감이 스스로 책장을 넘기며 은은한 초록빛 마법의 맥박을 뿜어냈다. 책장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듯 푸른 마법 문자들이 허공으로 떠올랐고, 누워 있는 두 아이의 몸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이온은 도감의 페이지에 나타난 붉은색 경고 문구를 읽어 내려갔다.
[진단: 수인족 아동 (늑대/여우 혼혈 계열)] [상태: 심각한 영양실조, 저체온증, 그리고 ‘청색 마력 마비증’ 2단계 진행 중.] [설명: 모체에서부터 축적된 고농도의 얼어붙은 청색 마력이 체내 순환을 방해하여 사지를 돌처럼 마비시키는 불치병. 영하의 기온과 영양실조가 결합하여 마비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음. 정화되지 않은 마력의 흐름을 차단하고 온기를 공급하지 않으면 24시간 이내에 전신 마비로 사망함.]
"청색 마력 마비증……."
이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제국조차 치료법을 찾지 못해 걸린 자들을 짐승처럼 내다 버린다는 그 무서운 천형이었다.
하지만 이온에게는 세계수의 맥박이 있었다. 도감의 다음 페이지가 스스로 흩날리며 정화의 비책을 제시했다.
[해결책: ‘달빛 은총초’의 정화 성분과 온기를 극대화한 허브 차. 체내의 차가운 마력 독소를 땀과 가래로 배출시켜 마비 증세를 즉각적으로 완화할 수 있음.]
이온은 망설이지 않고 온실 구석에 마련된 흙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어제 그가 온기를 불어넣어 가꾼 작은 약초 밭이 있었다. 부드러운 흙을 헤치자,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듯 스스로 푸르스름하고 따스한 빛을 내뿜는 '달빛 은총초'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잎사귀 표면에 맺힌 이슬조차 얼어붙지 않고 맑은 물방울로 찰랑거리는 신비로운 식물이었다.
이온은 조심스레 약초의 잎을 따내어 온실 한가운데의 작은 화덕으로 향했다.
화덕 위에는 맑은 샘물이 담긴 무쇠 솥이 걸려 있었다. 장작불이 타오르며 탁탁 소리를 냈고, 이온은 달빛 은총초를 곱게 다져 끓는 물에 넣었다.
치이익- 하며 은은한 풀 향기가 온실 가득 퍼져 나갔다. 숲속의 젖은 흙내음과 싱그러운 봄바람의 향이 한데 어우러진 듯한 향기였다. 물의 색깔이 점차 투명한 은빛으로 변해 가며 뽀얀 김을 피어 올렸다.
이온은 국자로 은빛이 도는 따뜻한 차를 정성스럽게 떠서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누워 있는 이불 곁으로 다가갔다.
큰 아이는 의식이 흐릿한 중에도 동생을 품에 꼭 안은 채 끙끙 앓고 있었다. 이온은 먼저 큰 아이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워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아이의 머리가 그의 가슴팍에 닿자, 전해 오는 차가운 한기에 소름이 돋았지만 이온은 아이를 더 꽉 안아 주었다.
"자, 천천히 마셔봐. 아프지 않게 해 줄게."
숟가락으로 따뜻한 은빛 차를 떠서 아이의 메마른 입술 사이에 대어 주었다.
꿀꺽-.
아이가 본능적으로 차를 삼켰다. 은빛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마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이의 목덜미를 뒤덮고 있던 푸른 서리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투명한 땀방울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턱관절이 부드럽게 풀렸고, 거칠던 호흡이 점차 평온하고 깊은 숨소리로 바뀌었다.
"으응……."
아이가 작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푸른 눈동자에 서려 있던 죽음의 그림자가 걷히고, 맑은 생기가 조금씩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이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는 이어서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동생 아기에게도 따뜻한 차를 조금씩 흘려 넣어 주었다. 아기 역시 차를 받아먹자마자 굳어 있던 꼬리가 미세하게 살랑거리며 따스한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호흡이 완전히 안정되고, 볼에 부드러운 핏기가 도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온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지독한 동사를 막아내고 체내의 매서운 냉기를 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큰 아이, 루미는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이온을 올려다보았다. 아까의 날카롭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따뜻한 둥지 속의 새끼 새처럼 온순하고 멍한 표정이었다.
"아저씨…… 따뜻해요……."
"아저씨 아니야. 형이라고 불러도 돼."
이온은 쑥스러운 듯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성인 인간을 마주할 때는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던 그였지만, 이 작은 아이들 앞에서는 마음속의 빗장이 조금은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거 신기한 맛이 나요. 몸속에 불꽃이 들어온 것 같아요."
루미가 자신의 작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파랗게 굳어 가던 손가락 끝에 다시 따뜻한 피가 도는 느낌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온은 아이들을 완전히 안심시키기 위해, 온실 한쪽에 보관해 두었던 간식을 떠올렸다. 세계수의 맥박으로 가꾼 ‘정화 초콜릿 열매’였다. 달콤하고 진한 카카오 향에 정화의 마력이 깃들어 있어, 아이들의 기력 회복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영양식이 될 터였다.
"이거 먹으면 훨씬 힘이 날 거야. 아주 달콤하단다."
이온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붉은빛이 도는 초콜릿 열매를 루미의 손에 쥐여 주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이익-!"
이불 속에서 곤히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남동생, 바르크의 몸이 갑자기 격렬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
이온의 손에 들려 있던 초콜릿 열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르크의 작은 입에서 짐승 같은 거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의 가슴팍에서부터 시작된 짙은 푸른색의 빛무리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급격하게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체내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청색 마비독의 본체였다.
"바, 바르크! 왜 그래? 바르크!"
루미가 비명을 지르며 동생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온이 급히 루미를 뒤로 물러서게 했다.
바르크의 사지가 무서운 속도로 굳어 가고 있었다. 다리에서부터 시작된 푸른 광막이 허벅지를 지나 허리로, 그리고 가슴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치솟아 올랐다. 피부가 마치 단단한 청색 대리석처럼 변해 가며, 만지면 깨질 듯이 차갑고 단단해졌다. 마비독의 급발진이었다.
"도감!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이온이 다급하게 도감을 펼쳤다. 책장이 찢어질 듯 격렬하게 펄럭이며 붉은색 경고등이 온실 벽면을 붉게 물들였다.
[경고! 환자의 체내에 제국 기사단이 사용하는 '강제 마력 결정석'의 파편이 박혀 있음!] [마비독이 급격히 활성화되어 심장을 향해 역류하고 있습니다. 10분 이내에 심장 마비를 막지 못하면 전신이 완전히 유리화되어 부서집니다!]
바르크의 작은 몸이 눈에 띄게 파랗고 투명한 돌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아이의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이내 꺽꺽거리는 기침 소리와 함께 멈추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이온의 손끝이 다시 한번 공포로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찾아온 따스한 구원의 손길 앞에서, 또다시 소중한 생명이 부서져 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