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여린 살결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허연 입김과 함께 날카로운 얼음 가시를 삼키는 것처럼 폐부가 아려 왔다. 눈을 뜨려 해도 속눈썹에 순식간에 서린 성에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사방은 온통 투명하게 얼어붙은 푸른빛의 세상이었다. 부서진 천장 사이로 쏟아지는 눈보라는 가차 없이 뺨을 때렸고, 바닥에 흩뿌려진 파란 마력 결정 가루들은 마치 살아 있는 벌레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아……."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손끝이 이미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손톱 밑이 검푸르게 죽어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몸의 온기가 급격하게 빠져나가며 심장마저 느리게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차디찬 얼음 조각이 될 터였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억울함보다는 지독한 외로움이 먼저 가슴을 헤집었다.
언제나 그랬다. 나를 이용하고 쓸모가 없어지자 차가운 길바닥에 내던졌던 수많은 어른들의 얼굴이 얼어붙은 허공 위로 겹쳐 지나갔다. 다정한 미소 뒤에 감춰진 탐욕스러운 이빨들. 인간이라는 존재는 늘 따스한 척 다가와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고 떠나갔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지독하게 차가운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잠들면, 더는 사람에게 상처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으려는 찰나,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뜨거운 박동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것은 얼어붙은 대지의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뿌리의 울림 같기도 했고, 죽어 가는 생명을 억지로 붙잡아 세우는 거룩한 호흡 같기도 했다. 뇌리에 번쩍하고 눈이 멀 것 같은 초록빛 활자가 새겨졌다.
[영식 도감(靈植 圖鑑)이 개방됩니다.] [소유자의 생명 신호 위험. '세계수의 맥박'이 동조를 시작합니다.]
눈앞에 반투명한 금빛 페이지들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펄럭이며 주위의 차가운 공기를 밀어냈다. 이온의 시야에 바닥에서 가냘프게 떨고 있는 검푸른 덩굴 한 줄기가 들어왔다. 가시가 삐죽삐죽 돋아난 채 죽어 가던 식물이었다. 도감의 페이지가 그 식물 위에서 멈추며 푸른빛의 상세 정보가 허공에 떠올랐다.
[야생 식물: 고무 탄성 가시덤불] - 상태: 극심한 마력 마비로 고사 직전. - 특성: 외부 충격을 받으면 엄청난 탄성으로 상대를 튕겨내는 가시덤불. - 개량 가능 경로: ‘온기의 정화초’로 품종 개량 가능. (필요 조건: 세계수의 맥박 동조)
살고 싶다는 본능이 두려움을 압도했다. 이온은 떨리는 손을 뻗어 차갑게 얼어붙은 가시덤불의 줄기를 움켜쥐었다. 가시가 살을 찔러 핏방울이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추위가 심각했다.
‘제발…… 도와줘.’
마음을 실어 나지막이 읊조린 순간, 손바닥을 통해 따스한 온기가 흘러들어 갔다. 이온의 몸 안에 잠들어 있던 초록색 마력이 뿜어져 나와 푸른 마비 기운으로 가득 찬 가시덤불을 감싸 안았다. 차가운 대지 아래 웅크리고 있던 식물의 심장이 이온의 박동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다정한 친구의 손을 잡는 것처럼 아늑하고 부드러운 감각이었다.
[품종 개량을 시작합니다.] [경고: 대지를 정화하고 식물을 개량할 때마다 소유주의 생명력이 일시 소모되어 깊은 기면증에 빠지게 됩니다.]
경고 문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온은 온 힘을 다해 초록빛 마력을 뿜어냈다. 뼛속까지 시리던 혹한의 마력이 이온의 손끝을 거치며 싱그러운 봄볕 같은 미색의 온기로 정화되어 대지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검푸르게 죽어 가던 가시덤불이 순식간에 연한 초록빛을 띠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뾰족하던 가시들은 둥글고 부드러운 잎사귀로 변했고, 그 끝에서 은은한 박하향을 품은 하얀 꽃망울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온기의 정화초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유리 온실의 얼어붙은 바닥을 뒤덮었다.
화아악-!
온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파란 마력 결정 가루들이 정화초가 뿜어내는 싱그러운 풀 내음에 쓸려 하얗게 증발했다. 차가운 성에로 뒤덮여 있던 유리 천장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맑은 물방울이 되어 뚝뚝 떨어졌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한 온기가 온실 안을 가득 메웠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흙냄새와 싱그러운 꽃향기가 어우러져 코끝을 간지럽혔다.
"하아……."
이온은 비로소 막혔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딱딱하게 굳어 가던 손가락에 붉은 핏기가 돌아왔고, 온몸을 옥죄던 푸른 마비의 기운이 말끔히 사라졌다. 단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폐허가,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따뜻한 에메랄드빛 정원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기적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눈꺼풀이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졌다. 온몸의 뼈마디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극심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식물을 개량하고 영토를 정화한 대가였다.
'안 돼, 벌써 잠들면…….'
안간힘을 쓰며 버텨 보려 했지만,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 이온은 정화초가 푹신하게 깔린 부드러운 흙바닥 위로 천천히 쓰러졌다. 사방을 채운 따스한 온기가 이불처럼 그의 몸을 덮어 주었다. 이온은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새들의 지저귐 같은 맑은 소리에 이온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걸까. 몸은 가벼웠지만 묘한 허기짐이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실 안은 여전히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가득했고,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햇살은 따스하게 바닥을 내리쬐고 있었다.
이온은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끝에 딱딱하고 둥근 씨앗 몇 알이 걸렸다. 개량하기 전, 본능적으로 챙겨 두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씨앗이었다. 이온은 그것을 소중하게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언젠가 이 낯선 곳에서 자신을 지켜 줄 훌륭한 방패가 되어 줄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리자 과거의 기억들이 다시금 가슴을 짓눌렀다.
그토록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았던 상처. 어른들의 큰 목소리만 들어도 손끝이 덜덜 떨리는 지독한 대인기피증은 여전히 영혼 깊은 곳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이 따뜻한 온실은 기적 같지만, 만약 다른 인간들이 이곳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또다시 자신을 찾아와 이 힘을 빼앗으려 들고, 자신을 도구처럼 부리려 할 터였다.
"아무도…… 들어오게 하지 않을 거야."
이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온실 서편에 있는 작은 골방으로 향했다. 돌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의 시선을 완벽히 차단할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이온은 부서진 목재 가구들을 영차영차 나르고 정화초 덩굴을 엮어 문틀을 단단히 고정했다. 오직 자신만이 숨을 수 있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안전한 안식처를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부드러운 흙을 바닥에 깔고 말린 정화초 잎을 엮어 푹신한 침대를 만들자 제법 그럴듯한 방이 완성되었다.
혼자만의 공간을 가꾸는 동안 떨리던 마음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이곳에서라면, 그 지독한 인간들의 위선 섞인 얼굴을 보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방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낡은 나무 서랍장을 정리하던 중, 이온의 손에 묵직한 가죽 책 한 권이 걸려 나왔다. 표지가 다 해져서 군데군데 곰팡이가 슬어 있는 책이었다.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자, 빛바랜 잉크로 쓰인 정갈한 필기체가 나타났다. 고대 온실을 관리하던 어느 학자의 일지였다.
[제국력 742년, 노스트바르트 보류지의 겨울은 잔혹하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이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실조차 버린 이 동토는 이제 만물이 파랗게 얼어붙는 마력 마비 지대가 되었다. 매서운 칼바람에 날리는 퍼런 마력 결정 가루는 생물의 온기를 앗아가고 사지를 돌처럼 굳게 만든다. 이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이 고대 유리 온실만이 마지막 희망이었으나, 마력의 맥이 끊겨 이제 이곳도 차갑게 식어 가고 있다. 신이시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절망적인 기록들이 가득했다.
이곳은 제국의 가장 변방이자 버려진 땅, 노스트바르트였다. 한번 발을 들이면 온몸이 파랗게 굳어 죽어간다는 청색 마력 마비증의 발원지. 갈 곳 없는 부랑자들과 도망친 수인들만이 짐승처럼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생지옥.
이온은 책을 덮고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방금 정화한 이 온실이, 이 잔혹한 동토에서 유일하게 따스한 온기를 품은 기적의 장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곳을 빼앗겨서는 안 되었다. 인간들의 탐욕이 이 온기를 알게 된다면 떼거리로 몰려와 자신을 짓밟고 온실을 강탈해 갈 것이 뻔했다.
‘안전한 곳이 필요해.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조종당하지 않는…… 그런 나만의 따뜻한 가게를 만들 거야.’
이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비록 바깥세상은 얼어붙은 지옥일지라도, 이 온실 안만큼은 자신만의 규칙이 지배하는 완벽한 안식처로 가꾸어 나가겠노라 다짐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잉-!
유리창을 깨부술 듯이 거센 바람 소리가 온실을 뒤흔들었다. 평화롭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에 이온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데 매서운 바람 소리 사이로, 아주 가냘프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끼이이익…… 낑, 끄으으…….
그것은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고통에 겨워 울부짖는 어린 동물의 비명이었다.
이온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대인기피증으로 다져진 방어 본능은 저 바깥의 위험을 무시하라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귓가를 파고드는 애처로운 신음은 차마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온은 조심스럽게 골방을 나와 온실의 출입구 쪽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하얗게 성에가 끼기 시작한 유리창을 소매로 닦아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회색빛 설원 너머, 온실의 마법 정화 경계선이 보였다.
"아……."
이온은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따스한 봄기운이 머무는 온실의 경계선, 그 새하얀 눈밭 위로 선명하고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점점이 이어지는 핏자국이었다.
그리고 그 피는 온실의 입구를 향해 길게 이어지며, 정원의 경계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서 무언가 작고 검은 그림자가 온실 문을 향해 처절하게 기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