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 내 영전이…… 내 중앙 귀족의 자리가……!”
진흙탕 뒤편, 부서진 마차의 잔해 사이로 엘릭이 기어 나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술 취한 이처럼 비틀거렸고, 눈가에는 정화 결정석의 독소 부작용으로 터진 검고 푸른 핏줄이 기괴한 그물망처럼 뻗어 있었다. 피눈물 같은 마력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흙바닥에 얼어붙었다. 기만적인 온화함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타오르는 광기만이 그의 일그러진 안면 근육 사이로 흉측하게 일렁였다.
엘릭의 품에는 푸르게 타오르는 거대한 결정체가 안겨 있었다. 그 기괴한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주변의 공기를 순식간에 서리로 바꾸어 놓았다.
“가동 빙결 핵……!”
시릴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한 비명으로 온실 마당을 때렸다. 고대의 마력 폭주를 일으켰던 파멸의 심장. 그것이 기동하는 순간, 이 따뜻한 온실도, 정성껏 가꾼 과수원도, 숨죽여 흐느끼는 아기 수인들도 모두 푸른 얼음 속에 갇혀 영원히 박제될 터였다.
“이 더러운 쥐새끼들…… 다 같이 얼어 죽어라!”
엘릭이 짐승 같은 고함을 지르며 온실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진흙바닥마다 검푸른 얼음꽃이 피어났고, 서릿발이 뱀처럼 대지를 기어왔다.
이온은 귀를 찢는 엘릭의 비명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어른들의 거친 목소리, 폭력적인 광기. 과거 자신을 버리고 조롱했던 이들의 얼굴이 겹쳐 보이며 무릎이 꺾이려 했다. 손끝이 사정없이 떨렸고, 숨이 가빠왔다. 도망치고 싶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어두운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온의 옷자락을 꼭 쥔 작은 손들이 있었다.
“형아…… 무서워……”
겁에 질려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제 동생들을 온몸으로 감싸 안고 있는 루미의 눈동자가 보였다. 다리를 다쳐 겨우 서 있으면서도 이온의 앞을 가로막으려 이빨을 드러내는 바르크의 꼬리가 보였다.
‘내가 도망치면, 이 아이들은 다시 추운 길바닥으로 내몰려.’
이온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팍을 꽉 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눈빛만큼은 온실의 벽난로처럼 붉고 따스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품에 안긴 영식 도감을 펼쳤다. 세계수의 맥박이 그의 손끝을 타고 도감의 종이 위로 스며들었다.
“안 버려…… 아무도, 안 보낼 거야.”
이온은 나직하게 읊조리며 땅바닥에 한쪽 손을 짚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온실 경계선에 심어두었던, 그리고 오랜 시간 대지의 온기를 흠뻑 머금고 잠들어 있던 씨앗들이었다. 바로 이온이 이곳에 처음 불시착했을 때 심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씨앗이었다. 1화에서 겨우 싹을 틔우고, 4화에서 야생동물을 쫓아내며 그 질긴 생명력을 증명했던 그 덤불들이, 이제 노스트바르트의 하부 지반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그물망으로 성장해 있었다.
“깨어나 줘. 우리를 지켜줘.”
이온의 생명력이 일시적으로 급격히 소모되며 머릿속에 핑 도는 기면증의 전조가 찾아왔다.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으려 했지만, 이온은 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쿠구구구궁!
땅속에서 거대한 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엘릭의 발밑에서부터 수십, 수백 개의 굵직한 초록색 줄기들이 솟구쳐 올랐다. 가시가 돋아나 있지만 결코 단단하지 않은, 고무처럼 유연하고 질긴 가시덤불들이 장벽을 이루었다.
엘릭이 품은 빙결 핵에서 방출된 냉각 폭풍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혹한의 기운이 가시덤불 장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고무 탄성 가시덤불은 냉기를 흡수해 얼어붙는 대신, 특유의 엄청난 탄성을 발휘하며 부풀어 올랐다. 덤불들은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그물처럼 휘어지며 냉각 폭풍의 무시무시한 물리적 압력을 고스란히 감싸 안았다. 쩍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가시덤불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지금이야! 시릴!”
이온의 외침에, 온실 지붕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릴이 씨앗 살포기의 레버를 힘껏 당겼다.
“좋았어! 천재 마도 공학자의 역작을 보여줄 때군!”
시릴의 손에 들린 살포기 중앙에는 째깍거리며 정교하게 돌아가는 장난감 태엽 장치가 박혀 있었다. 그것은 루미가 과거 수용소에서 도망쳐 나올 때 유일하게 챙겼던, 하지만 망가져서 울음을 터뜨리게 만들었던 깨진 태엽 장치였다. 시릴이 정교하게 복원하고 개조해 씨앗 자동 살포 및 송풍 장치의 심장으로 재탄생시킨 기적의 부품이었다.
째깍, 째깍, 째깍!
빠르게 회전하는 태엽의 동력을 받아, 살포기 끝에 달린 대형 풍차 날개가 무서운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이 엘릭의 시야를 향해 불어 나갔다.
“아이들아! 정화 가루를 날려라!”
루미와 바르크가 온실 안에서 몽실몽실한 단호박 정화 전분 가루가 가득 담긴 자루를 들고 달렸다. 구해낸 아기 수인들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작은 바가지를 들고 전분을 퍼 날랐다.
“받아라, 나쁜 아저씨야!”
루미가 전분 가루를 송풍기 입구에 쏟아부었다. 뒤이어 바르크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마지막 자루를 털어 넣었다.
휘이이잉!
눈보라보다 더 하얗고 고운 정화 전분 가루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치솟았다. 서정적인 눈꽃처럼 흩날리는 전분 가루는 엘릭의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분 가루가 엘릭이 두르고 있던 차가운 마력 서리와 닿자마자, 끈적끈적한 찰떡처럼 엉겨 붙기 시작했다.
“우욱? 이게 대체 무슨…… 눈이 안 보여! 이 비열한 놈들!”
엘릭이 눈을 비비며 검을 허공에 휘둘렀지만, 철갑옷 표면에 엉겨 붙은 전분 가루가 순식간에 굳어지며 그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그의 발밑은 이미 끈끈이 과즙 폭탄과 엉긴 전분으로 인해 진흙탕에 박힌 것처럼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엘릭의 빙결 핵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에너지가 임계점에 도달했다.
파아아앙!
하늘이 온통 푸른빛으로 물들며, 대기 중의 수분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 파멸적인 빙결 에너지가 온실을 덮치기 직전, 이온의 손에 들린 영식 도감이 찬란한 금빛 아지랑이를 뿜어냈다.
지맥의 박동과 빙결 마력이 공명하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허공에 펼쳐졌다.
“저…… 저게 뭐지?”
기사단원 중 한 명이 무기를 떨어뜨리며 허공을 가리켰다.
얼어붙은 안개 너머로, 수백 년 전 대폭주로 사라졌던 고대 마법 도시 ‘노스트바르트’의 잔영이 거대한 환상으로 떠올랐다. 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하늘에서 천천히 맞물려 돌았고, 정교한 마도 비공정들과 기계 인형들의 실루엣이 은하수처럼 흐르는 마력의 강 위를 수놓았다.
그것은 압도적이고도 서정적인 기적의 풍경이었다. 살벌한 전장에 내려앉은 고대의 환영에 기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고대의 유산이…… 어째서 한낱 농부 놈의 손에서……!”
엘릭은 이 모습을 보고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가 복용해 온 정화 결정석의 독소가 그의 뇌와 안구로 급격히 역류했다. 이온이 가꾼 정원의 정화 마력이 엘릭의 몸속 도사린 독소를 강제로 배출시키려 자극하자, 극심한 거부 반응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핏발이 서다 못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죽여버리겠다! 다 쓸어버리겠어!”
엘릭은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짜 내 검을 치켜들었다. 기사단의 거대한 마도 기갑 전차들이 일제히 온실을 향해 포신을 겨누었다. 기사단의 최대 참격과 포격이 일시에 쏟아질 기세였다.
하지만 이온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덤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돌아가세요. 당신들이 온 곳으로.”
이온의 명령과 함께, 극도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 장벽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콰아아아앙!
기사단이 쏘아 올린 거대한 마도 포탄과 엘릭의 최대 참격이 가시덤불 장벽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푹신한 솜이불이 날아오는 돌멩이를 감싸 안듯, 고무 장벽은 그 엄청난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하며 뒤로 깊숙이 늘어났다.
그리고──.
팅──────!
맑고 청명한 탄성음이 동토의 하늘을 울렸다.
충격을 고스란히 담아둔 가시덤불이 복원력에 의해 원래의 자리로 무서운 속도로 튕겨 나갔다. 완벽한 완충과 편향 굴절. 기사단이 쏜 빙결 포탄과 참격이 고스란히 궤도를 꺾어 기사단 진영의 기갑 무기들을 향해 역으로 쏟아졌다.
콰쾅! 퍼어억!
기사단의 자랑이던 강철 전차들이 자신들의 포탄에 맞아 바퀴가 부서지고 차체가 찌그러지며 도랑으로 굴러떨어졌다. 살생은 없었다. 오직 철갑옷과 무기들만이 산산조각 나며 그들의 전투 능력을 완벽하게 상실시켰을 뿐이다. 기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진흙탕 속으로 나자빠졌다.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기사단의 총공세가 단 한 번의 탄성으로 무력화된 순간이었다.
“아아…… 아아아!”
엘릭은 눈앞에서 자신의 야망이, 자신의 기사단이 단 한 명의 소년과 수인 아기들의 장난 같은 방어벽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정화 결정석의 부작용 독소가 그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머릿속이 분노와 광기로 하얗게 타버렸다.
“내가…… 내가 귀족인데…… 고작 이런 짐승 놈들과 부랑자에게……!”
그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었다. 시야가 온통 검고 푸른 독소로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무기도, 기갑 전차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엘릭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엘릭은 핏발 선 눈으로 품에 안고 있던 파란 가동 빙결 핵을 바라보았다.
“다 같이…… 끝이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스스로의 가슴팍(심부)을 향해 뾰족한 빙결 핵의 모서리를 그대로 깊숙이 내리찍었다.
“단장님! 안 됩니다!”
기사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이미 늦었다.
빙결 핵이 그의 심장에 박히는 순간, 쩍쩍 갈라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엘릭의 발끝부터 푸른 얼음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속에 흐르던 타락한 마력과 정화 결정석의 독소가 빙결 핵의 냉기와 결합하여 폭주했다.
엘릭의 비명 소리가 서서히 굳어갔다. 그의 일그러진 안면 근육도, 허공을 향해 뻗었던 탐욕스러운 손가락도, 순식간에 차가운 푸른 얼음 결정으로 변해갔다. 단 몇 초 만에, 은빛 강철 기사단장 엘릭 크로이츠는 온실 마당 한복판에 기괴하게 일그러진 모습의 얼음 조각상이 되어 우뚝 멈춰 섰다.
싸늘한 침묵이 과수원을 감쌌다.
기사들은 얼어붙은 단장의 모습을 보며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무기는 이미 파괴되었고, 의지는 꺾였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하나둘씩 동토의 어둠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어!”
루미가 이온의 다리를 꼭 안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바르크도 멍하니 엘릭의 조상(彫像)을 바라보다가, 이내 이온의 손에 제 머리를 비벼대며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시릴은 지붕에서 내려와 이온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정말 대단했어, 이온. 너와 이 식물들이 노스트바르트를 구한 거야.”
이온은 긴장이 풀리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생명력을 소모한 탓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기면증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정말 안심해도 되는 걸까.’
이온은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얼어붙은 엘릭의 가슴팍에서, 푸르게 빛나던 가동 빙결 핵이 툭 하고 떨어져 나왔다. 얼음 조각상에서 떨어진 핵은 땅바닥으로 구르더니, 정화된 줄 알았던 진흙바닥 속으로 스르륵 스며들어 사라졌다.
지잉──!
동시에 이온의 품에 있던 영식 도감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도감의 종이들이 거칠게 넘어가며,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붉은색 경고 마크가 허공에 투사되었다. 온실 지하 깊은 곳, 세계수의 뿌리가 닿아 있는 대지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붉은 빛이 요동치며 맥박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것은 정화의 맥박이 아니었다. 대지를 파괴하려는 거대한 분노의 고동이었다.
이온은 감기려던 눈을 번쩍 떴다. 영식 도감의 붉은 경고등이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