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면증에서 깨어난 이온의 시야 앞에 온천의 강력한 스팀 제어기가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 가시덤불 지대를 강타한다.
눈꺼풀을 짓누르던 무거운 잠의 장막이 걷히는 순간, 소년의 귓가를 가른 것은 쉭쉭거리며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고압의 증기 소리였다. 온실 한구석에서 붉은빛을 발하며 거칠게 웅웅거리던 제어 장치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공기 중으로 뿜어져 나온 하얀 증기는 순식간에 차가운 유리를 뿌옇게 적셨고, 숲의 따뜻한 온기가 사방으로 무섭게 소용돌이치며 뻗어 나갔다.
“이온! 정신이 들어?”
시릴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제어판의 밸브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온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달콤한 잠의 여운이 아직 뇌리에 남아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지금은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온실 유리창 너머, 붉은 빛을 깜빡이며 다가오는 고대의 청동 혹한병들이 보였다. 그 거대한 몸체 속에서 느껴지는 미세하고 가녀린 맥박. 그것은 제국 기사단에 의해 마력원으로 강제 주입된 아기 수인들의 생명력이었다.
“밀어붙여라! 다 짓밟아 버려라!”
통신석 너머로 들려오는 은빛 강철 기사단장 엘릭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몹시 거칠었다. 얼핏 들으면 위엄 넘치는 호령 같았지만, 이온의 예민한 귀에는 그의 숨소리에 섞인 기괴한 천명음이 뚜렷하게 잡혔다.
엘릭의 안색은 이미 정상적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푸른 마력 마비증을 억누르기 위해 정화 결정석을 무분별하게 과다 복용한 탓이었다. 그의 뺨과 목덜미에는 시퍼런 핏줄이 마치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돋아나 있었고, 안구는 핏발이 서다 못해 탁한 황색으로 흐려져 있었다. 결정석의 임시방편적인 온기에 중독된 그의 신경계는 이미 자멸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성을 상실한 맹목적인 과열 진격은 그 증거였다.
“저 사람…… 제정신이 아니에요.”
이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소년의 손끝이 가볍게 떨려왔다. 수많은 군화 발소리, 날카로운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자신을 집어삼킬 듯이 웅성거리는 어른들의 거친 목소리. 과거 자신을 도구로만 여겨 배신하고 버렸던 제국의 어른들이 겹쳐 보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가느다란 숨이 턱 막히며, 발끝부터 차가운 한기가 타고 올라왔다.
“형아, 괜찮아?”
언제 다가왔는지 루미가 이온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쥐었다. 그 옆에는 꼬리를 밑으로 말고 있던 바르크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이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작은 나무 대접이 들려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노란 단호박 수프였다. 이온이 기면증으로 잠든 동안, 루미와 바르크가 온실 주방에서 정성껏 끓여낸 정화의 요리였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단호박의 향기가 차가운 대인기피증의 공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우리 지켜 주려고…… 열심히 끓였어. 이거 먹고 힘내, 형아.”
루미의 나긋한 목소리에 이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나무 대접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달콤하고 따뜻한 수프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온기는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아이들의 순수한 온정과 감사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치유의 마력이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대인 외상의 사슬이 눈 녹듯 스르르 풀려나갔다. 심장의 박동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시야가 맑아졌다.
“고마워, 루미, 바르크. 이제 정말 괜찮아.”
이온은 대접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소중한 가정을 지키겠다는 단단한 결의만이 서려 있었다.
“시릴 씨, 엘릭 단장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정화 결정의 부작용으로 신경이 과열되어 있어요. 우리가 온기를 더 공급하면, 그들은 이성을 잃고 스스로 무너질 거예요.”
“그렇다면 통풍구를 완전히 개방하자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 혹한병들의 마력 핵이 폭주해서 아이들이 위험해져!”
시릴이 걱정스럽게 소리쳤다. 이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폭주하기 전에 마력을 정화하면 돼요. 시릴 씨, 루미의 장난감 기억하죠?”
“장난감? 아, 그 태엽 장치 말이군!”
시릴이 무릎을 탁 쳤다. 그는 품 안에서 톱니바퀴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는 작은 금속 뭉치를 꺼냈다. 과거 루미가 소중히 아끼다 깨졌던 태엽 장치를 시릴이 고도의 마도 공학 기술로 재구성해 낸 ‘자동 씨앗 살포 동력기’였다.
“준비는 끝났어. 태엽을 한 번만 감으면, 온실 전역에 설치된 도관을 통해 일시에 살포될 거다!”
“좋아요. 지금이에요!”
이온의 외침과 함께 시릴이 태엽 장치의 태엽을 힘차게 감았다.
째깍, 째깍, 째깍──!
경쾌하고 정밀한 태엽의 마찰음이 온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청동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며 엄청난 회전력을 만들어냈고, 그 동력은 온실 천장과 벽면을 가로지르는 긴 구리 파이프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푸슉! 푸슈슈슉!
파이프의 끝부분에 달린 노즐들이 일제히 열리며, 검고 단단한 씨앗들이 사방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이온이 초기에 온실 주변에 심어두고 세계수의 맥박으로 가꾸어왔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개량 씨앗들이었다.
씨앗들이 눈 덮인 대지에 닿는 순간, 이온은 두 손을 바닥에 대고 심호흡을 했다. 손바닥을 통해 영식 도감의 마력이 대지로 흘러 들어갔다.
‘자라나라, 얘들아. 모두를 지킬 수 있게.’
우드드득!
대지가 요동치며 엄청난 속도로 가시덤불이 솟구쳐 올랐다. 일반적인 가시덤불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맥박을 받아 고무처럼 질기고 엄청난 탄성을 지닌 특수 개량종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초록색 넝쿨들이 그물망처럼 얽히고설키며 순식간에 온실 앞마당을 거대한 탄성 장벽으로 메워버렸다.
“이, 이게 무슨 해괴한 풀때기냐! 당장 베어 넘겨라!”
진격하던 은빛 강철 기사단원들이 검을 휘두르며 가시덤불을 내리쳤다. 그러나 단단한 철검은 가시덤불에 닿는 순간, 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우스꽝스럽게 튕겨 나갔다. 오히려 검을 휘두른 기사들의 손목이 그 반동으로 시큰하게 울렸다.
“으악! 이게 왜 안 베어지는 거야!”
“몸이…… 몸이 뒤로 밀려난다!”
한 기사가 넝쿨을 밟자, 고무 탄성 가시덤불이 엄청난 힘으로 압축되었다가 웅-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올랐다. 기사는 허공으로 수 미터나 붕 떠올랐다가 부드러운 눈더미 위로 정통으로 추락했다. 부상자는 없었지만, 기사단의 대열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온이 소리쳤다.
“시릴 씨, 온천 통풍구를 개방해 주세요! 완전히요!”
“오케이! 봄바람 들어간다!”
시릴이 온천 제어기의 대형 레버를 끝까지 잡아당겼다.
쿠구구구둥-!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온천수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지면을 흔들었다. 온실 바닥과 외곽에 설치된 고온 통풍구들이 일제히 활짝 열렸다.
화아아아아-!
영하 수십 도의 혹한이 지배하던 노스트바르트의 설원 위로, 갑작스러운 봄의 기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뜨거운 김이 아니었다. 이온의 마력으로 정화된, 달콤하고 포근한 야생화 향기가 감도는 온천의 정화 안개였다.
세찬 안개는 기사단이 뿜어내던 차가운 눈바람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치이이이이익-!
차가운 얼음과 뜨거운 온기가 만나며 거대한 수증기 기둥이 솟구쳤다. 기사들이 두르고 있던 단단한 은빛 철갑옷에 따뜻한 안개가 닿자, 겉면에 얼어붙어 있던 성에들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갑옷 내부의 마도 냉각 장치들이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펑, 펑 소리를 내며 과열되어 멈춰 섰다.
“갑옷이…… 갑옷이 너무 무거워져서 움직일 수가 없다!”
“관절 부위가 녹아내려! 으아악, 지면이 진흙탕이 됐어!”
영하의 기온 속에서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대지가 온천의 열기를 머금고 보드랍고 깊은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거운 철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발이 깊숙이 빠져 허우적거릴 뿐,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살기를 뿜어내던 침략자들은 이제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우스꽝스러운 인형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온기는 붉게 폭주하려던 혹한병들에게도 도달했다.
가슴팍의 마력 핵이 터질 듯이 붉게 빛나던 청동 골렘들이 따뜻한 봄기운에 휩싸였다. 이온은 눈을 감고 혹한병 내부의 작은 생명들에게 마음을 전했다. 세계수의 맥박이 정화의 안개를 타고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따뜻한 곳으로 가자.’
그러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폭주하며 째깍거리던 붉은 빛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내 은은하고 편안한 청색의 온기로 바뀌었다. 혹한병들의 가슴팍이 부드럽게 열리며, 그 안에 갇혀 있던 아기 수인들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바르크와 루미가 재 빠르게 달려가 떨어지는 아기 수인들을 품에 안았다. 아이들의 얼굴에 마침내 안도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온정의 파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온천의 열기와 이온의 정화 마력이 고무 가시덤불의 뿌리를 타고 노스트바르트의 하부 지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수백 년 동안 얼어붙어 마비되어 있던 고대의 지맥이 거대한 박동을 시작했다.
둥──. 둥──.
대지 깊은 곳에서부터 웅장한 울림이 전해졌다. 이온의 품에 안겨 있던 영식 도감이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도감의 중앙에 숨겨져 있던 고대 문양들이 활성화되며, 노스트바르트 전체의 지맥을 소생시키는 주문이 깨어났다.
반짝이는 정화의 빛줄기들이 진흙탕 속에서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바위틈에서 초록색 이끼가 돋아났고, 고사했던 고목의 나뭇가지 끝에 작은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만물을 죽음으로 몰고 가던 청색 마력 마비증의 독소가 대지에서 증발하여 사라지고 있었다.
가뿐하게 침략자들의 동력을 상실시키고 대지까지 정화해가는 평화롭고 따스한 풍경. 그것은 기적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풍경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
“안 돼…… 내 영전이…… 내 중앙 귀족의 자리가……!”
진흙탕 뒤편, 고급 마차의 문을 부수고 나온 엘릭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정화 결정석의 독소 부작용으로 인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눈가에는 검고 푸른 핏줄이 터져 피눈물 같은 마력이 흘러내렸고, 이성을 잃은 눈동자는 오직 광기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의 품에는 푸르게 타오르는 거대한 결정체가 안겨 있었다.
“가동 빙결 핵……!”
시릴이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고대의 마력 폭주를 일으켰던 유물의 핵심 부품이자, 주변 수 킬로미터를 순식간에 영구 동토로 되돌려버릴 수 있는 최악의 자폭 병기였다.
“이 더러운 쥐새끼들…… 다 같이 얼어 죽어라!”
엘릭은 광기 서린 고함을 지르며, 가슴에 빙결 핵을 안은 채 온실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대지가 다시 파랗게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