쩍쩍, 갈라지는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영구 동토의 시린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자신의 가슴팍에 빙결 핵을 깊숙이 내리찍은 은빛 강철 기사단장 엘릭 크로이츠는 단 몇 초 만에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음 조각상이 되어 버렸다. 그가 품고 있던 타락한 마력과 정화 결정석의 지독한 부작용 독소가 빙결 핵의 폭발적인 냉기와 결합하여 빚어낸 참혹한 자멸이었다.
싸늘한 침묵이 영구 동토의 고대 유리 온실 마당을 무겁게 짓눌렀다. 기사들이 공포에 질려 무기를 떨어뜨리고 어둠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그때였다. 얼어붙은 엘릭의 가슴팍에서 가동 빙결 핵이 툭 떨어져 나와 진흙바닥 속으로 스르륵 스며들었다.
지이이잉──!
이온의 품속에 있던 영식 도감이 미친 듯이 진동하며 붉은 경고 마크를 허공에 투사했다. 온실 지하 깊은 곳, 세계수의 뿌리가 닿아 있는 대지 밑바닥에서 피어오른 붉은 고동이 이온의 발끝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쿵! 쿵! 쿵!
그것은 대지를 파괴하려는 거대한 분노의 고동이자, 정화 결정석의 독소와 결합한 빙결 핵이 지하의 마력 맥을 오염시키며 일으키는 급격한 연쇄 폭주의 전조였다.
“단장님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도망치려다 바닥에 주저앉은 한 기사가 사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엘릭의 얼음상은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표면 아래로 검푸른 정화 결정석의 부작용 독소가 썩은 핏줄처럼 꿈틀거리며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결정석의 독소는 엘릭의 몸을 집켜삼킨 것도 모자라, 그가 마지막에 분출한 마력과 결합해 사방으로 서리 가시를 뻗쳐 나가기 시작했다.
“이온! 위험해!”
시릴이 지붕 위에서 헐떡이며 소리쳤다. 그의 손에 들린 간이 마도 측정기가 찢어지는 듯한 경보음을 울려 대고 있었다.
“엘릭의 몸에 누적되어 있던 결정석 독소가 빙결 핵의 핵분열과 공명하고 있어! 이대로 두면 저 얼음 조각상이 폭발하면서 반경 수십 킬로미터 안의 모든 생명체를 파랗게 마비시키는 마독 서리 폭풍이 몰아칠 거야! 온실도, 이 과수원도 전부 흔적도 없이 얼어붙어 처참하게 부서질 거라고!”
기면증의 무거운 안개가 이온의 눈꺼풀을 납덩이처럼 내리누르고 있었다. ‘세계수의 맥박’을 무리하게 가동해 대지를 정화하느라 그의 생명력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당장이라도 차가운 눈밭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뺨을 스치는 칼바람조차 아득한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이온은 손가락 끝을 꾹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과 함께 찌릿한 통증이 뇌리를 스치며 흐려지던 정신이 간신히 붙잡혔다.
자신의 다리를 꼭 붙잡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작은 수인 아기 루미가 보였다. 다친 다리를 바르르 떨면서도 앞장서서 이온의 앞을 가로막고 이빨을 드러내는 바르크의 작은 등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잠들면…… 이 아이들은 다시 차가운 철창으로 돌아가야 해. 내가 만든 이 따뜻한 보금자리가 영원히 사라져 버려.’
그것만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이온의 갈망은 눈앞의 이 작고 보드라운 온기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배신과 학대 속에서 홀로 얼어붙어 가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제아무리 무거운 잠의 수렁이라도 끄집어 올려 내던질 수 있었다.
이온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영식 도감을 세차게 움켜쥐었다. 도감의 종이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펄럭였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초록빛 마력이 책장 위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시릴! 아직 발사 장치는 쓸 수 있죠?”
이온의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시릴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만든 기계는 그렇게 쉽게 고장 나지 않아. 하지만 뭘 쏘려고? 일반적인 탄환으로는 저 엄청난 냉기 폭풍의 기압을 뚫지 못해!”
“우리가 가꾼 것들로 할게요. 가장 단단하고, 가장 끈끈한 힘으로요.”
이온은 온실 한구석, 밭두렁 깊은 곳에서 자라나고 있던 거대한 주황빛 덩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시릴과 힘을 합쳐 가꾼 ‘거대 끈끈이 단호박’이었다. 겉껍질은 무쇠처럼 단단하지만, 그 속에는 침입자의 철갑옷을 바닥에 통째로 접착시켜 버릴 만큼 무겁고 끈적한 과즙이 가득 차 있는 기적의 농작물이었다.
“루미, 바르크. 나를 도와줘.”
이온의 부름에 두 수인 아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루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바르크는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꼬리를 곧게 세웠다.
“우리가 뭘 하면 돼, 이온 형?”
“저번에 시릴이 고쳐준 장난감 있지? 그걸 저 발사기 동력축에 연결해 줘.”
루미는 품속에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장난감 태엽 장치를 꺼냈다. 3화에서 이온이 구해주었을 때부터 품고 있던, 톱니바퀴가 깨져 멈춰 있던 낡은 태엽이었다.
지난번 시릴의 손길을 거쳐 자동 씨앗 살포기의 핵심 동력기로 재탄생한 그 태엽 장치가 루미의 작은 손 위에서 째깍째깍 힘찬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르크는 튼튼한 이빨로 온실 입구에 길게 뻗어 있는 덩굴을 물어 당겼다. 그것은 이온이 이곳에 처음 정착했을 때, 영식 도감의 힘으로 가장 먼저 개량하여 심었던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줄기였다.
1화에서 아주 작은 씨앗에 불과했던 이 덤불은 이제 온실 전체를 둥글게 감쌀 만큼 거대하고 강인하게 자라나 있었다. 어떠한 충격도 부드럽게 흡수하고, 몇 배의 힘으로 되돌려주는 신비한 탄성을 지닌 과수원의 첫 번째 파수꾼이었다.
“좋아, 한 번 해보자고!”
시릴이 소리치며 발사 장치의 고정 핀을 풀었다.
바르크가 온 힘을 다해 고무 탄성 가시덤불의 줄기를 뒤로 잡아당겼다. 쭉쭉 늘어나는 가시덤불은 찢어지기는커녕 터질 듯한 에너지를 머금으며 팽팽하게 긴장했다.
루미는 깨진 장난감 태엽 장치를 발사기의 기어에 정확히 맞물려 고정했다. 째깍째깍! 태엽이 빠르게 감기며 엄청난 회전력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온은 온실 중앙에서 가장 크고 무겁게 영근 거대 끈끈이 단호박을 양손으로 안아 올렸다. 그의 품에 안긴 호박이 ‘세계수의 맥박’과 공명하며 따스한 황금빛으로 일렁였다.
“단순히 가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저 차가운 냉기를…… 온실을 따뜻하게 데울 온기로 돌려놓을 거예요.”
이온은 호박의 표면에 손을 얹고 나직하게 빌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공존의 마음. 이 숲과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도감을 통해 호박의 씨앗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순간, 호박 속에 가득 찬 끈끈이 과즙이 정화의 성질을 띠며 부드러운 순환의 마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하 맥에서 솟구치는 검푸른 독소의 냉기가 엘릭의 얼음상 가슴팍에서 거대한 구체 형태로 팽창했다. 당장이라도 폭발해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지금이야!”
이온의 외침과 동시에 루미가 태엽 장치의 제동 레버를 힘껏 당겼다.
팅──!
고무 탄성 가시덤불이 뿜어내는 엄청난 탄성과 태엽 장치의 폭발적인 회전력이 하나로 맞물렸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가시덤불 줄기가 무서운 속도로 튕겨 나가며, 황금빛 마력을 머금은 거대 끈끈이 단호박을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슈우우우웅!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두꺼운 눈보라의 장막을 뚫고 날아간 호박 포탄은, 폭발 직전의 냉기 구체가 똬리를 틀고 있던 엘릭의 심장부를 향해 정확히 호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콰아아앙!
공중에서 단호박이 터지며 사방으로 걸쭉하고 따뜻한 주황빛 과즙과 진흙 거름이 폭풍처럼 비산했다.
그것은 피 흘리는 살상의 폭발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대지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온기의 폭격이었다.
끈끈한 주황색 과즙은 얼음상 표면을 빈틈없이 뒤덮으며 뿜어져 나오던 시커먼 정화 결정석의 독소를 남김없이 흡수해 가두었다.
치이이익!
차가운 냉기와 따뜻한 과즙이 만나 하얀 정화의 김을 무럭무럭 피워 올렸다.
이온이 의도한 기적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대 호박의 끈끈이 과즙은 냉기를 억누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엘릭의 폭주하는 냉각 에너지를 가두어 서서히 다른 형태로 치환해 나갔다.
끈끈이 과즙에 섞여 있던 수천 개의 미세한 씨앗들이 냉기를 흡수하며 급속도로 발아하기 시작한 것이다.
씨앗들은 얼음의 한기를 자양분 삼아 덩굴을 뻗치고, 엘릭의 얼음 조각상을 둥글고 촘촘하게 감싸 안았다.
차가운 서리 폭풍이 되려 했던 에너지는 덩굴의 관을 타고 온실 지하의 하부 파이프라인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것은 매서운 여름날 온실의 온도를 쾌적하게 조절하고, 대지의 열기를 식혀 식물의 뿌리가 썩지 않도록 돕는 완벽한 ‘하부 냉각 에너지원’으로의 대전환이었다.
두근, 두근.
지하 깊은 곳에서 울리던 붉은 분노의 고동이 점차 차분하고 맑은 청록색의 맥박으로 변해갔다. 영식 도감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경고등이 스르르 꺼지고, 눈이 편안해지는 초록빛 온기가 과수원 마당을 가득 채웠다.
엘릭 크로이츠의 기괴했던 얼음상은 이제 주황빛 단호박 덩굴과 푸릇푸릇한 새싹들로 둥글게 포박되어, 마치 정원의 한구석을 장식하는 무해하고 유쾌한 식물 조형물처럼 변해 있었다.
어떠한 피도 흘리지 않고, 어떠한 살생도 없이, 침략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농장의 거름이자 에너지로 치환해 버린 장엄한 승리였다.
“하아…… 하아……”
이온은 밀려드는 안도감 속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언제나 어른들의 거친 숨소리나 위압적인 몸짓을 보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손끝이 차갑게 굳어지던 그였다. 배신당했던 과거의 상처가 만들어 낸 단단한 마음의 감옥.
하지만 지금, 탐욕으로 가득 찼던 거대한 어른 엘릭의 허망한 최후를 바라보며, 그리고 제 힘으로 이 작은 평화를 지켜냈음을 깨달으며, 이온의 가슴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트라우마의 쇠사슬이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어둡고 축축한 대인기피증의 공포가, 방금 온실을 채운 따뜻한 정화의 안개와 함께 한 가닥 가벼운 연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 소멸하는 것만 같았다.
이온은 떨리지 않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지긋이 눌렀다. 더 이상 숨이 가쁘지 않았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오직 단단한 확신만이 남아 있었다.
쨍그랑! 쨍그랑!
마당 구석에서 쇠붙이가 바닥에 구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남아 있던 은빛 강철 기사단원들이 떨리는 손으로 검과 방패를 눈밭 위로 내던지고 있었다. 그들의 철갑옷은 바닥에 흘러내린 끈끈이 과즙에 굳어 버려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수장이 식물의 거름이 되어 버린 광경을 목도한 기사들의 얼굴에는 오직 경외감과 공포만이 가득했다.
“항복…… 항복합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한 부대장이 무릎을 꿇으며 애원하자, 뒤에 서 있던 수십 명의 기사들이 차례로 무기를 내던지며 눈밭 위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정예라 불리던 은빛 강철 기사단이 오직 과일과 덩굴의 힘 앞에 완전히 무장 해제되어 굴복한 것이다.
“이온, 우리가 해냈어. 진짜로 해냈다고!”
시릴이 흥분해 목소리를 높이려다, 이내 이온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었다. 하지만 이온은 미소를 지으며 시릴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는 타인의 손길도, 다정한 근접함도 그를 두렵게 만들지 못했다.
바르크는 기사들이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보며 신이 나서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이온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이온은 바르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땀방울을 닦아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서로에게 전해졌다.
완벽한 승리였다.
과수원은 지켜졌고, 나쁜 어른들은 격퇴당했으며, 동토의 얼어붙은 마력조차 정원의 하부 동력으로 길들여졌다. 이보다 더 평화롭고 완벽한 해소는 없을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람을 타고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젖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끄응…… 으아앙……
투항한 기사들이 꿇어앉아 있는 대열의 맨 뒤편, 대형 보급 마차들과 굳게 닫힌 가죽 천막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바르크의 귀가 쫑긋 솟구쳤다. 꼬리를 흔들던 몸짓을 멈춘 바르크가 콧방울을 씰룩이며 그쪽을 향해 나직하게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온 형…… 저기서 우리 같은 냄새가 나.”
루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온은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대인기피증이 사라진 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시릴과 기사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온의 등 뒤로 쏠렸다.
이온은 투항한 기사들을 지나, 눈더미 뒤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무쇠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마차는 사방이 두꺼운 철판으로 덧대어져 있었고, 제국의 마법 봉인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시릴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공구로 마차의 튼튼한 빗장을 부수고 가죽 가림막을 거칠게 걷어냈다.
덜컹!
철판 문이 열리며 어두컴컴한 마차 내부가 드러난 순간, 온실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그곳에는 차가운 서리가 잔뜩 끼어 있는 좁고 더러운 무쇠 철장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철장 안에는, 서로의 몸을 꼭 껴안은 채 파랗게 질려 울고 있는 어린 생명들이 가득했다.
여우 귀를 가진 아이, 동그란 곰 귀를 한 아이, 꼬리를 바르르 떨고 있는 아이까지.
사지가 파랗게 돌처럼 굳어가는 ‘청색 마력 마비증’의 고통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신음하는 또 다른 열 명의 아기 수인들이 가득 갇혀 있었던 것이다.
“아……”
루미가 입을 틀어막았고, 바르크는 분노로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철장 속의 아기 수인들은 갑자기 들이친 빛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로를 더 깊숙이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의 맑고 젖은 눈동자에는 어른들을 향한 극도의 공포와 절망만이 가득 차 있었다.
이온의 손끝이 다시금 찌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구해내야 할 아이들이, 지켜야 할 새로운 가족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