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검붉은 선혈이 대지를 적신다. 사방을 에워쌌던 흑월정제의 살수들은 형체도 없이 바스러져 한 줌의 재로 화했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고요한 전장, 오직 당신의 거친 숨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다. 한 구비 몰아친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적멸(寂滅)만이 남았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가혹하다. 인간의 육신으로 천외천의 금기 봉인을 해제한 대가는 당신의 영혼마저 불태우고 있었다.

"크흑...!"

칠공(七孔)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빙탄상조(氷炭相照)라 했던가. 뜨거운 열양의 진기와 차가운 음한의 마기가 단전에서 융합되지 못한 채 사납게 충돌한다. 혈맥은 이미 삼라만상의 질서를 잃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거열(車裂)의 고통이 전신을 엄습한다. 살가죽 아래로 꿈틀거리는 기운들은 당장에라도 육신을 찢고 폭발할 듯 흉포하게 날뛴다.

스스스스. 당신의 발치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력이 폭주하여 세포 하나하나를 태워버리는 자폭(自爆)의 징후다. 의식이 한 자락씩 흐려질 때마다, 눈앞의 풍경이 핏빛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칠흑 같은 어둠으로 전락한다.

스산하게 울어대던 밤바람도 멈추었다. 오직 하늘에 걸린 외로운 현월(弦月)만이 차가운 안개 속에서 핏빛으로 물들어갈 뿐이다. 자연마저 당신의 종말을 고요히 애도하는 듯하다. 삼류 문파의 말단 마부에서 천하를 오시할 태고의 무신(武神)으로 거듭나려 했던 야망이, 이 차디찬 황야에서 한 줌의 먼지로 사라질 위기다.

'이대로 스러질 것인가.'

치욕은 없다. 후회도 없다. 오직 끓어오르는 단전의 폭압을 통제하지 못하는 육신의 한계에 분노가 치밀 뿐이다. 심장의 박동이 급격히 느려진다. 꺼져가는 등불처럼, 당신의 생명력은 이제 단 한 가닥의 실에 의지하고 있다. 사그라지는 의식의 심연 속에서, 미처 다 제어하지 못한 폭력적인 힘이 마지막 폭발을 준비하며 요동친다.

종막(終幕)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 생(生)과 사(死)의 경계선상에서, 당신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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