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하게 그늘진 창가, 당신의 손끝에서 은도금 티스푼이 찻잔 가장자리를 가볍게 스치며 맑은 금속성을 흘립니다. 찻잔 속에서는 설산의 서리를 맞고 자란 푸른 말로우 꽃잎이 은빛 펄과 함께 청색 소용돌이를 그리며 우아하게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선택한 복식은 심연의 밤을 그대로 도려낸 듯한 흑색 오간자 실크 드레스. 가볍게 주름잡힌 드레이프가 가슴선에서부터 유려하게 흘러내려 대리석 바닥으로 아찔하게 내려앉고, 소매 끝에 촘촘히 박힌 백금 침수 자수는 오만한 황실조차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침묵의 지배자'로서의 위엄을 청각 없이도 고스란히 증명합니다.
"이토록 누추하게 머리를 조아릴 거라면, 지난날 대공께서 보여주신 그 고결한 기세는 어느 도랑에 버려두고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에드윈."
당신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화려한 살롱의 정적을 깨뜨립니다. 당신의 발치, 단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차가운 바닥에 제국의 자랑이자 무패의 검이라 불리던 에드윈 대공이 엎드려 있습니다. 한때 흐트러짐 없이 이마를 덮던 찬란한 금발은 수치심과 절망으로 축축하게 젖어 뺨에 들러붙었고, 그가 걸친 제복은 훈장조차 사치라는 듯 조각난 자존심처럼 구겨져 있을 뿐입니다.
황실마저 실렌티아의 마법 물자 공급 중단 선언 앞에 완전히 굴복했습니다. 황자들이 앞다투어 당신에게 굴욕적인 화해의 친서를 보내는 와중, 그 모든 파국의 원인으로 지목된 에드윈은 자신이 가졌던 권력의 방어벽이 완전히 해체되는 공포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나체의 약자가 되어, 오직 당신의 가느다란 입술 끝이 그리는 자비만을 구걸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입니다.
"아이리스…… 제발."
그가 떨리는 손으로 당신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려다, 슬쩍 내려다보는 당신의 얼음장 같은 시선에 조롱당하듯 허공에서 손을 멈춥니다. 갈 곳 잃은 손끝이 비참하게 떨립니다.
"내 목숨을 원한다면 바치겠소. 가문이 가진 모든 마탑과 영지의 권한마저 당신의 발밑에 바칠 테니…… 한 번만, 단 한 번만 나를 다시 돌아봐 줄 수는 없는 건가? 내가 미처 몰랐던 너의 온기를 구걸하게 해주시오……."
그의 깊은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 대리석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며 흉한 얼룩을 남깁니다. 과거 당신의 간절한 호소와 눈물을 그토록 철저히 짓밟고 가스라이팅하던 이 오만한 남자가, 이제는 당신의 구두 굽 아래서 숨 쉬는 것조차 감지덕지하겠다는 듯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 모습은 기묘할 정도로 감미로운 향취를 풍깁니다.
당신은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달콤 쌉싸름한 베르가모트 향이 피어오르는 공간 속에서 그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종말의 낙인을 찍어줄 정교한 칼날을 고르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