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광무(光武) 9년 10월 24일, 정동(貞洞)의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으로 날아든 전보는 얼어붙을 듯 차가운 바닷바람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제물포 만 입구, 팔미도(八尾島) 등대 남서방 5해리 해상에 출현한 정체불명의 연무. 그것은 단순한 가을 안개가 아니었다. 영국 해군 극동함대(China Station) 사령관 제라드 노엘(Gerard Noel) 대장이 이끄는 배수량 1만 4,100톤급 장갑순양함 ‘킹 알프레드(HMS King Alfred)’호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탄 연기였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12,000톤급 크레시급(Cressy-class) 장갑순양함 2척과 데릴링급(Daring-class) 구축함 8척. 총배수량 6만 톤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의 성벽이 대한제국의 젖줄인 서해 관문을 완벽하게 포위하며 닻을 내렸다. 영국 대장성이 밀사를 통해 보낸 최후통첩의 문구는 외교적 격식으로 포장되어 있었으나 본질은 약탈적이었다. 대한이 최근 독자적으로 구축한 삼척(三陟) 유기화학 공정과 화약 특허를 국제 연합 관리하에 두고, 신식 화학무기 제조 시설을 영일(英日) 공동 감시단에 개방하라는 압박이었다.

"폐하, 저들의 주포는 9.2인치(234mm)에 달하옵니다. 포신 한 문이 불을 뿜을 때마다 제물포의 민가와 관공서가 초토화될 것이옵니다."

외무대신 이하영의 음성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일전의 조정 내 친일 대신 숙청으로 피바람이 불었으나, 대양을 지배하는 대영제국의 압도적인 철갑선 앞에서는 그 기세마저 얼어붙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입을 모아 영국과의 타협을 종용했다.

당신은 편전의 대형 탁자 위에 펼쳐진 서해 해도(海圖)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이들의 포위망은 우연이 아니다. 당신이 황족의 권한으로 용산 군기창(軍器廠)을 개혁하고, 화약의 핵심 원료인 피크린산(Picric acid)의 순도를 99.8%까지 끌어올려 대량 생산에 성공하자, 아시아의 패권을 노리던 런던의 외교관들이 경악한 결과였다. 영일동맹의 톱니바퀴가 대한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현재 제국의 남양수사(南洋水使)가 보유한 무력은 미미하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패가 있었다. 용산 총포 제조소에서 극비리에 조립된 1898년식 화이트헤드(Whitehead) 어뢰 개량형 24기와, 질산 정밀 배합으로 파괴력을 극대화한 독자적 접촉식 기뢰(機雷) 120발이 그것이었다.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정동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힌다. 무력으로 맞서 제국의 주권을 만천하에 증명할 것인가, 아니면 영국의 이권 야욕을 역으로 채워주어 이 피비린내 나는 철강의 포위망을 외교적으로 해체할 것인가.

모든 시선이 제국의 전권을 움켜쥔 당신의 입술로 쏠렸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