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광무(光武) 8년 갑진년(1904년) 10월 11일. 가을바람이 경운궁(慶運宮) 돈덕전(惇德殿)의 이국적인 석조 벽면을 차갑게 때리고 있었다.

독일 영사관의 서기관이 남기고 간 비밀 각서와 러시아 공사관의 일등서기관 콜로소프가 제출한 조약 초안이 당신의 집무 책상 위, 황실 문장이 찍힌 서류함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서류 사이에는 당신이 직접 가설하고 개념을 정립한 ‘인덕턴스 조율식 무선 동조 회로(Tuning Circuit with Variable Inductance)’의 청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전파를 보내는 장치가 아니었다. 송신 주파수를 0.1킬로헤르츠(kHz) 단위로 미세 조절하여 열강의 도청을 원천 차단하고 수신 감도를 기존 마르코니식 전신기에 비해 무려 4.2배 이상 끌어올리는, 군사 통신 체계의 혁명이었다. 진공관의 전신인 열전자 방출 현상을 이용한 2극 진공관 설계를 황실 특허 제1호로 출원했다는 소문이 한양 도성에 퍼진 것은 불과 보름 전의 일이었다.

미국 공사 알렌이 필라델피아의 웨스팅하우스 인터내셔널과 연결선 구성을 위해 본국으로 긴급 전보를 보낸 시각, 유럽의 양대 제국 역시 이 위대한 지적 자산이 가져올 군사적 균형의 붕괴를 직감했다. 무선 통신의 주도권을 쥔다는 것은 곧 여순항 앞바다에서 벌어지는 함포전의 명중률과 전선의 군단 배치 속도를 지배한다는 뜻이었다.

대신들의 우려 섞인 상소문이 승정원일기의 서두를 메웠다. "양이(洋夷)의 잔재주에 나라의 명운을 거는 것은 유교적 법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범의 가죽을 탐내다 표범을 불러들이는 형국이옵니다." 당신은 그 상소문들을 향해 소리 없는 조소를 보냈다. 그들이 말하는 예법과 도덕은 서구의 맥심 기관총과 12인치 함포 앞에서는 한 장의 종이 벽에 불과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도덕적 숭고함이 아니라, 국가의 멱살을 잡고 근대로 끌고 갈 가공할 속도와 냉혹한 기술 독점이었다.

집무실의 온도는 스팀 라디에이터의 둔탁한 소음과 함께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벽면에 걸린 제국 영토 지도 배후에서, 당신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는 특유의 팽창주의적 야심을 투영한 친서를 보내왔다. 그들은 대한제국이 특허 기술을 독점 제공하는 대가로, 영등포 인근에 연간 1만 톤의 초산을 생산할 수 있는 최신식 화학 공장 건설과 무연화약 배합법을 전수하겠다고 제안했다. 백린과 질산을 안정적으로 합성하는 기술은 현대식 포탄 제조의 핵심 요체였다.

반면, 국경을 선양(瀋陽)과 맞댄 러시아 제국은 다른 카드를 내밀었다.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통신망의 확보가 급선무였던 그들은 툴라(Tula) 조병창의 최신 설비와 모신나강 소총 생산 라인 일체를 무차별 차관 형식으로 양도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당장 육군의 화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철 무기 수만 정이 제국의 손에 쥐어질 기회였다.

화약의 국산화와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여 자주 국방의 기초를 다질 것인가, 아니면 즉각적인 정밀 조병창 라인을 통째로 수입해 제국군의 이빨을 날카롭게 갈아낼 것인가.

외교적 외줄타기의 판돈은 제국의 생존이었다. 당신은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두 통의 각서를 내려다보며 깃펜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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