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광무(光武) 9년(서기 1905년) 5월 17일,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한성 경운궁(慶運宮) 증명전의 밀실에서 당신은 서탁 위에 펼쳐진 도면의 먹향을 맡는다. 그것은 사색이 된 이토 히로부미가 본국 도쿄에 타전하여 강제로 뜯어낸 일본 시바우라 제작소(芝浦製作所)의 150킬로와트(kW)급 다상(多相) 교류 발전기 설계도와 독일 지멘스(Siemens) 사의 3,300볼트(V) 고압 송전 계통 전력기 절연 기술 원본이다.

도면을 세밀히 살피는 당신의 눈은 군사 무기 연구원 시절의 예리함을 되찾는다. 철심(Core)으로 쓰일 규소 함유량 3.2%의 규소강판 적층 방식과 와전류(Eddy Current) 손실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한 0.35밀리미터(mm) 얇은 강판 사이의 절연 기법. 당신은 일본 기술진조차 미처 도달하지 못한 전력 효율 개선의 열쇠, 즉 가열 안정성 확보를 위해 천연 셸락 바니시를 대체할 합성 니스의 배합비 가설을 메모장 여백에 기입해 나간다. 이것이 실현되면 황무지에 그치던 군수 공장이 무기 주조용 전기로(電氣爐)를 가동할 핵심 동력을 손에 쥐게 된다.

그러나 전리품의 단맛을 음미할 시간은 길지 않다. "저하, 도성 내의 밤공기가 급격히 흉흉해지고 있사옵니다." 밤의 정적을 깨고 입궁한 군부 참장(參將) 이희두가 무릎을 꿇으며 급보를 올린다.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 우익 결사 흑룡회(黑龍會)의 정예 낭인들과 주조선 일본 공사관 사설 헌병들이 야음을 틈타 서소문 밖 비밀 거점에 집결했다는 정보였다. 목표는 단 하나, 기술 침탈의 총지배인이자 대한제국 황실의 혁신을 이끄는 당신의 목숨이다.

여기에 전정(殿廷) 내부의 칼날도 당신의 등 뒤를 향해 뻗친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을 위시한 친일 대신들은 외무 대신을 포섭했음은 물론, '농본(農本)의 국체를 흔들고 무모하게 열강을 자극해 사직을 위태롭게 한다'는 번드르르한 공동 상소문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은 "나라를 망치는 사악한 기예를 멀리하고 유교의 법도로 돌아가라"는 명분 어린 참언으로 황제를 움직여 조정에서 당신의 대권을 찬탈하려 책동하고 있었다.

전력 기기 도면이라는 국가지대사(國家之大事)의 불씨를 살려 군사 강국으로 나아갈 비밀 기지를 세울 것인가, 아니면 도성 내부를 피로 물들이며 썩어 들어가는 친일 매국노들의 목을 먼저 벨 것인가.

창밖으로 동이 푸르스름하게 터 오지만, 당신을 노리는 음모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당신은 결단의 순간을 직면한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