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3월 24일, 오경(五更)을 알리는 통행금지 해제 종소리가 멀리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시각. 경운궁(慶運宮) 구성헌의 밀실에서 타오르는 촛불이 춤을 춥니다.
당신의 맞은편에 앉은 미국 특명전권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은 안경을 고쳐 쓰며, 침침한 안광으로 테이블 위에 펼쳐진 제도용 청사진을 샅샅이 훑고 있습니다. 의사 출신이자 외교관으로서 대한제국의 온갖 이권을 본국에 중개해 온 그는, 과학 기술이 가질 물리적·재정적 파급력을 누구보다 기민하게 포착하는 인물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가당한 설계입니까, 의화군(義和君) 전하?"
알렌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립니다. 당신이 제시한 설계도는 단순한 전신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역통과 필터(Band-pass Filter)와 공진 회로를 이용한 다중 반송 주파수 전신 송수신 장치'의 완전한 회로도 및 시편 도면입니다.
기존의 전신이 구리 전선 한 가닥에 단 하나의 전압 신호만을 단속(斷續)적으로 보내 분당 평균 25단어 내외를 전송하는 조악한 수준이었다면, 당신이 설계한 이 장치는 송신단에서 서로 다른 고주파 교류 신호를 발생시키고, 수신단에서 인덕턴스(L) 코일과 가변 커패시터(C)의 공진 주파수를 매칭시켜 여러 개의 신호를 분리해 냅니다. 오직 단 한 조의 전선만으로 동시에 여덟 개의 상이한 전신 신호를 왜곡 없이 송수신할 수 있는, 시대를 최소 20년은 앞서간 통신 혁명입니다.
만약 수천 마일에 달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종단 전선용 구리 선로를 새로 가설하지 않고도 통신 용량을 여덟 배로 늘릴 수 있다면, 그 경제적 가치는 수천만 달러에 달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모건(J. P. Morgan) 가문이나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의 경영진들이라면 침을 흘리다 못해 혼절할 기술입니다.
"거짓을 고하여 대공사(大公使)의 총명을 흐리겠습니까."
당신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찻잔을 들어 올립니다. 그 어떤 유교적 정중함 속에서도, 나라의 운명을 바꿀 패를 쥔 황족의 장중한 격식이 뿜어져 나옵니다.
"식(式)을 보시다시피, 특정 주파수대의 신호만을 통과시키는 필터 회로의 코일 권선수와 정전 용량의 정밀한 정합(整合)이 핵심입니다. 본 전하가 황실의 내탕금으로 사들인 정밀 계측기로 수백 번의 도선 실험을 거쳐 수치를 증명해 내었소. 미국 특허청(USPTO)에 상정되는 순간, 이 기술은 세계 통신망의 표준을 재정의하게 될 것입니다."
알렌은 마른 침을 삼키며 손가락으로 장치 도면의 동조 회로 부분을 더듬었습니다. 탐욕과 경악이 섞인 노련한 외교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이 특허의 독점권을 우리 미국 정부, 엄밀히는 본국 법인에 양도해 주신다면... 장담하건대 제이피 모건 백작이나 제너럴 일렉트릭의 중역들을 황실의 비밀 대리인으로 연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자금력과 정치적 영향력이라면, 저 무도한 일본인들이 폐하를 협박하는 손길을 늦추도록 워싱턴을 움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달콤한 독약 같은 제안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조약을 강요하기 위해 헌병대를 대동하고 대한제국의 목을 죄어오는 이 시점에서, 미국의 단순한 외교적 립서비스는 아무런 실효성이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이 독보적인 기술 패권을 담보로 실질적이고도 즉각적인 물리적 역량을 미국으로부터 뜯어내는 일입니다.
당신의 뇌리가 차갑고 정교하게 회전합니다. 현대 군사 무기 연구원으로서 쌓았던 지식과 대한제국의 국익을 극대화할 외교적 계산이 맞물리며, 알렌을 침묵시킬 협상의 카드가 두 갈래로 좁혀집니다.
당신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알렌의 눈을 정면으로 받아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