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 9년(1905년) 11월 15일,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의 밤은 동결된 흑색 유리처럼 차갑고 무겁다. 석탄 난로에서 피어오른 매캐한 그을음이 샹들리에의 희미한 불빛 아래로 뱀처럼 똬리를 틀며 흘러간다.
당신, 의화군 이강은 화풍(和風)으로 정교하게 짜인 탁자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그곳에는 대일본제국 특파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앉아 있다. 방금 전까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려 기고만장하던 늙은 정객의 얼굴은, 당신이 올려놓은 단 한 권의 홍색 가죽 철을 마주한 순간 산송장처럼 푸르게 질려 버렸다.
"통감(統監)직을 맡으러 오신 줄 알았는데, 고작 파산 집행인이 되려 그리 서두르셨소?"
당신의 목소리는 잔잔하나 차갑다. 홍색 가죽 철에 적힌 것은 일본 대장성(大藏省)의 극비 세입세출 명세서와 해군 함정 배비 기밀이다. 러일전쟁을 치르며 일본이 쏟아부은 전비는 무려 17억 2천여 만 엔. 그중 12억 엔에 달하는 금액이 런던과 뉴욕의 금융가에서 끌어다 쓴 연리 6푼의 고리 외채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배상금을 단 한 푼도 받아내지 못한 메이지 조정의 실상은, 파산의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춤추는 광대에 불과했다.
"이, 이것을 어찌……."
하야시 곤스케 공사가 벌떡 일어나며 허리춤의 지휘 도에 손을 얹지만, 당신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제고(帝高)의 무관들이 소총을 고쳐 잡는 금속성 마찰음이 알현실을 채운다.
"대영제국의 파슨스(Parsons) 사로부터 제국 해군이 밀수하다시피 들여온 최신식 징기(蒸氣) 타-빈 기관의 특허권과 요코스카 공창에 보관 중인 3천 마력급 다단 팽창식 왕복기관의 정밀 도면 일체. 그것이 이 비밀 회계장부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담보물이더군. 일본 해군이 자랑하는 삼笠(미카사)을 비롯한 주력 함대들이 만 만(灣)에서 입은 선체 손상과 보일러 균열을 영국의 기술 지원 없이 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런던 금융가에 퍼진다면 어떻게 되겠소? 국채 발행은 전면 중단될 것이고, 서구 열강은 약탈자에게 등을 돌릴 것이오."
황실의 법도와 유교적 격식을 갖춘 엄숙한 풍자 속에 칼날이 숨어 있다. 사서에 기록된 사대(事大)의 굴종을 역으로 비틀어, 이제는 제국주의의 탐욕스러운 맹수를 쇠사슬로 묶어 세우는 형국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마른 입술이 부르르 떨린다.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깊은 주름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는 대한제국을 집어삼켜 자국의 재정 위기를 도피하려 했으나, 오히려 자신의 멱살을 쥔 젊은 황족의 서슬 퍼런 혜안 앞에 벌거벗겨진 셈이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의화군 전하."
이토가 간신히 목구멍을 긁어내며 묻는다. 그의 안광에는 굴욕과 함께, 황족 이강이라는 존재에 대한 지독한 경계심이 서려 있다.
단순히 을사조약이라는 파멸의 조약을 무효화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먹잇감의 목줄을 쥐었을 때 가죽을 벗기고 뼈를 취해야 한다. 철혈의 대공업 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일본이 서구에서 탈취하고 개량한 첨단 기술의 핵심을 이곳 한성으로 끌고 와야 할 시간이다.
당신의 입술 끝이 완만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촛불이 흔들리고, 황제의 처소 너머로 차가운 결단의 가위바위보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