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광무 9년(1905년) 을사년 12월 18일, 백설이 분분히 내리는 덕수궁 중명전의 어전회의실. 당신은 황태자 대리청정의 자격으로 옥좌 아래에 서서, 군부대신 민영환이 바치는 군비 자주화 보고서를 영수한다. 피와 화약 냄새로 얼룩진 한 해였다. 대궐을 습격했던 왜의 기습대를 소탕하고 영해를 침범한 영국의 동양함대를 독가스탄의 위협과 외교적 협박으로 퇴각시킨 지 겨우 반달이 지났다. 제국은 기적처럼 생존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정전에 불과하다.

탁자 위에는 황실 병기창(기기창)에서 독자 설계하여 양산에 성공한 '융희 1년식 기총'의 도면이 펼쳐져 있다. 무연화약의 국산화를 위해 뽕나무 섬유에서 추출한 셀룰로오스를 비중 1.42의 질산과 황산 혼합액으로 질화하여 얻어낸, 질소 함유량 13.15%의 강면약(强棉藥) 제조법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술자들의 손가락이 날아갔던가. 분당 500발의 연사 속도를 견디기 위해 총열 슬리브의 냉각수 순환 펌프를 재설계하고, 가솔린 엔진 구동식 0.5킬로와트 무선 송신기의 스파크 갭 간격을 0.8밀리미터로 미세 조정하여 무전 도달 거리를 강화도 포대까지 연장한 과학적 인과율이 마침내 대한제국에 독자적인 타격력을 부여했다.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한 것은 다행이오나 재정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혜민원과 도지부의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나이다. 일의 선후를 헤아려 군비를 감축하소서." 참정대신 한규설을 비롯한 온건 문관들의 상소가 빗발친다. 유교적 격식과 도덕률을 앞세운 그들의 풍자는 통렬하나, 당신은 냉혹한 국익의 논리로 단상에서 그들을 내려다본다. 이리들의 틈바구니에서 발톱을 깎는 수치야말로 곧 망국이라는 진리를 당신은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이미 목도하지 않았던가.

황해 너머 웨이하이웨이에서는 영일동맹의 재확인을 거친 영국의 동양함대가 석탄을 적재하며 재출격을 준비하고 있고, 압록강 북쪽의 관동군은 러시아와의 조약을 파기하고 재차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평화는 오직 철과 화약의 무게만큼만 보장된다.

당신은 서대문에 새로 건설된 50미터 높이의 철골 무전탑을 바라본다. 겨울바람을 가르며 푸른빛의 전파 스파크가 허공을 찢는 순간, 사방의 철혈 요새들은 일제히 전투 태세에 돌입한다. 끝없는 군비 경쟁의 나락이자, 동아시아의 지각을 뒤흔들 제국의 위대한 철혈 외교가 이제 막 서막을 올린 것이다. 당신은 번뜩이는 강철 눈빛으로 대륙과 해양의 경계를 응시하며 다음 폭풍을 맞이할 준비를 끝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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