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었어, 진혁아... 미안해..."
귓가를 간지럽히는 나직한 잠꼬대에 강진혁의 손길이 공중에서 그대로 멈췄다. 은서의 가녀린 발목을 감싸 쥐고 있던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뜨거운 열기가 번졌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 밑으로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베갯잇을 적시는 순간, 진혁의 가슴 깊은 곳에서 3년간 굳어 있던 얼음벽이 가차 없이 균열을 일으켰다.
"한은서."
진혁은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 대신 옅은 신음과 함께 은서가 그의 품을 파고들 듯 몸을 뒤척였다. 겉으로는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면서도, 무의식의 심연에서는 여전히 자신을 갈구하고 있었다. 진혁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은서의 이마 위, 파르르 떨리는 미간 사이에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흐트러진 은서의 머리칼 사이로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그녀의 목덜미에 걸린 푸른 펜던트가 진혁의 입술이 닿는 순간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광채를 뿜어냈다. 3년 전 작동을 멈추고 빛을 잃었던 가문의 유품이, 진혁의 순수한 생명 마나와 접촉하자마자 마치 심장이 다시 뛰듯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소멸해 가던 은서의 마나 격벽을 완벽하게 잠정 복구해 줄 유일무이한 마나 핵 촉매제였다. 그 빛이 은서의 전신을 타고 흐르며 고질적인 백야의 형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음."
이른 아침, 커튼 틈새로 쏟아지는 햇살에 은서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가득 찬 것은 넓고 단단한 사내의 등판이었다. 진혁이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굳건한 벽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놀랍게도 매일 아침 찾아오던 뼈를 깎는 듯한 고통과 오한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맑았고, 손끝 하나하나에 터질 듯한 생명력이 차올랐다. 완벽한 신체 버프 상태였다.
"깼나."
진혁이 상체를 돌려 은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피로함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아 있었다. 은서는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리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팀장님. 여긴……."
"내 오피스텔이다. 네 상태가 한계여서 데려왔을 뿐이야. 다른 오해는 하지 마라."
진혁이 무심한 어투로 셔츠 단추를 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각거리는 셔츠 자락 너머로 은서는 어제 있었던 가문의 폭발 소동을 기억해 냈다.
"사촌 오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분명 그 콘솔이……."
"한재석의 펜트하우스는 어젯밤 원인 불명의 마나 과부하로 반파되었다. 흑색 마나 역살 반응이더군."
진혁이 은서가 벗어둔 최고급 수제 구두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구두 굽 밑바닥이 까맣게 타들어가 재가 되어 있었다.
"그자가 네 구두 굽 바닥에 정교하게 마킹해 둔 '흑색 추적 마킹'이 있더군. 너를 24시간 감시하고 생명력을 빨아들이려던 비열한 덫이었겠지. 하지만 어젯밤 나와 네가 나눈 동기화 마나의 파동이 그 저주의 각인을 역추적해 들어가 발신지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한재석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이지."
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문의 추악한 손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두 밑바닥에까지 닿아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진혁과의 동기화가 그 저주를 완벽하게 역살해 파괴했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뚫리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비즈니스 계약의 효능치고는 과분하네요."
"비즈니스라……."
진혁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은서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이 은서의 턱끝을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쥐어 올렸다.
"네 입으로 비즈니스라고 말할 때마다, 네 심장이 어떻게 요동치는지 알고는 있나?"
진혁의 시야에는 이미 은서의 어깨를 감싸 안고 아련하게 일렁이는 푸른빛 영혼의 잔상이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독설 뒤에 숨겨진, 미칠 듯한 미련과 애틋함의 실루엣이 투명하게 일렁였다. 진혁은 가슴이 저려왔다. 문득 집무실 비밀 금고 속에 빨간 마나 실로 단단히 봉인해 둔, 3년 동안 차마 뜯어보지 못한 은서의 마지막 편지가 떠올랐다. 그 편지 속에 담긴 진실을 밝혀내기 전까지는 이 비즈니스를 끝낼 생각이 없었다.
"출근 준비해라. 오늘 기획실에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을 테니."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르며 태산 이노베이션으로 동반 출근했다.
***
오전 10시, 태산 이노베이션 마케팅팀 사무실은 벌써부터 시장통처럼 웅성거리고 있었다. 사원들이 모니터 화면을 가리키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이거 진짜 마케팅팀 내부 로그인 기록 맞아?"
"어떻게 기획안을 해외 포럼에 통째로 유출할 수가 있어? 그것도 서경 한씨 가문이랑 연계된 사이트에다가!"
은서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어서자마자 차가운 시선들이 그녀에게 꽂혔다. 하지만 시선의 종착지는 다른 곳이었다. 민우진이 사색이 된 얼굴로 자신의 책상 앞에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임소윤이 팔짱을 낀 채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민우진 씨.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데?"
임소윤이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민우진의 책상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화면에는 어젯밤 해외 마나 기술 포럼에 업로드된 태산 이노베이션의 차세대 마나 하이브리드 기획안의 전문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획안을 유출하기 위해 사내 메인 서버에 접속한 단말기의 IP와 로그인 계정 카드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민우진 (Marketing Dept. ID: TS-8942)'.
"이, 이건 제 계정이 맞지만 저는 어젯밤에 서버에 접속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우진이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거짓말은 그쯤 하죠, 우진 씨."
임소윤이 들고 있던 명품 백을 가볍게 흔들며 비웃음을 흘렸다.
"어젯밤 마케팅팀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보안 팀에서 확인 끝냈어요. 그리고 이 기획안이 유출되면서 우리 팀이 입은 타격이 얼만지 알아? 서경 한씨 가문 녀석들이 이 기획을 그대로 카피해서 특허 출원을 먼저 진행하겠다고 날뛰고 있어요. 회사 기밀을 사적으로 팔아넘긴 대가가 고작 사내 마녀사냥으로 끝날 것 같아?"
"아닙니다! 전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누군가 제 계정을 도용한 겁니다!"
우진의 절박한 외침에도 주변 사원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수군댈 뿐이었다.
"도용이라니, 뻔한 변명이네."
"평소에 서근서근하더니 뒤로 호박씨 까고 있었군."
임소윤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는 은근히 은서 쪽을 곁눈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파렴치한 범죄자와 한 공간에서 근무할 수는 없죠. 당장 보안팀 불러서 연행하고, 형사 고소 진행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민우진 씨와 평소에 유독 가깝게 지내던 누군가도 공범이 아닌지 철저히 조사해 봐야겠네요."
누가 보아도 은서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은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소윤과 우진의 대치 상황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흔들림이 없었고, 구두 굽 소리는 대리석 바닥을 맑게 울렸다.
"임소윤 대리님."
은서가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소윤을 불렀다.
"증거가 참 완벽하네요. 민우진 씨의 계정 로그에, 접속 IP까지. 마치 누군가 보란 듯이 흔적을 남겨둔 것처럼요."
"한은서 씨, 지금 범죄자를 옹호하는 건가요? 당신도 공범으로 엮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지?"
소윤이 코방귀를 뀌며 은서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손톱은 화려하게 네일아트가 되어 있었고, 쥐고 있는 명품 백의 가죽 촉감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공범이라뇨. 저는 그저 사실을 바로잡고 싶을 뿐입니다."
은서는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자외선 마나 등불 디텍터를 꺼내 들었다.
"대리님이 유출되었다고 주장하시는 그 '서경 한씨 가짜 기획안' 말입니다. 사실 그 서류는 지난 4화에 제가 임 대리님께 일부러 흘려두었던 미끼였습니다. 메인 드래프트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마킹 트랩 서류'였죠."
소윤의 눈동자가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서류의 종이 표면과 디지털 파일 소스 코드 안에는, 인체에 무해하지만 한 번 닿으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 '미세 형광 역추적 입자'가 묻어 있습니다. 이 입자는 특수한 자외선 마나 등불로 비추기 전까지는 육안으로 절대 보이지 않죠. 오직 그 가짜 서류를 직접 만지고 조작한 사람의 손과 소지품에만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은서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민우진 씨. 손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우진이 당황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은서가 자외선 등불을 우진의 손에 비추었다. 깨끗했다.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젯밤 서버실에 접속해 기획안을 유출한 진범이라면, 당연히 그 서류를 직접 만지고 스캔했을 텐데 말이죠. 우진 씨의 손은 너무나 깨끗하네요."
사무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수군거리던 사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임소윤에게로 향했다. 소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다른 저장 매체로 옮겼을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진짜 서류를 훔쳐서 자신의 백에 고이 담아 간 진범의 손은 어떨까요?"
은서가 전광석화처럼 손을 뻗었다.
탁!
"뭐 하는 짓이야!"
소윤이 비명을 질렀으나, 은서는 이미 힘 있게 소윤의 명품 핸드백을 낚아챈 뒤였다. 은서의 손끝에 진혁의 생명 마나 동기화 버프가 실려 있어, 소윤이 저항할 틈도 없이 백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이거 놓지 못해! 감히 신입 사원 나부랭이가 누구 백을 뒤지는 거야!"
"뒤지는 게 아닙니다. 검증하는 거지."
은서가 자외선 마나 등불의 전원을 켜고 소윤의 명품 핸드백 모서리와 그녀의 오른손을 향해 강하게 쏘았다.
쉬이이익—!
어두운 보랏빛 광선이 닿는 순간, 소윤의 하얗고 고운 오른손 손톱 틈바구니와 명품 백의 지퍼 라인, 그리고 백 모서리 전체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하고 은밀한 형광 초록빛 마나 입자가 형형하게 피어올랐다.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현장에서 페인트를 뒤집어쓴 것처럼, 숨길 수 없는 유출의 흔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어……?"
"세상에, 저 빛은 뭐야?"
사무실 내의 사원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모함이야! 한은서 네가 나한테 묻힌 거잖아!"
소윤이 표독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은서의 뺨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바로 그 순간, 사무실 입구의 대형 연동 스크린 화면이 번쩍이며 켜졌다. 화면 위로 어젯밤 임소윤이 민우진의 자리에 몰래 들어가 사원증을 훔쳐 계정을 도용하고, 기획안 파일을 복사해 자신의 개인 이메일과 해외 포럼으로 전송하는 CCTV 영상과 실시간 마나 로그 데이터가 거대한 팝업창으로 떠올랐다.
[기밀 반출 미수범 검출: 임소윤 (Strategic Planning Dept. ID: TS-1024)] [로그 분석: 가짜 기획안 형광 마나 트랩 검출 완료.]
화면 가득 박힌 붉은색 경고 문구와 소윤의 가식 없는 범행 장면이 사내 전체 대형 홀 화면에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우쭐대며 자랑하던 기획실 상속녀의 우아한 가면이, 단 한 순간에 사기 및 기밀 유출 미수범이라는 추악한 민낯으로 전락해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아, 아냐…… 이건 조작이야! 진혁 씨! 진혁 씨가 설명 좀 해줘요!"
소윤이 문가에 서 있는 진혁을 향해 절규하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임소윤 대리. 태산 이노베이션은 기밀 유출 행위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고수한다. 이미 보안팀과 법무팀에 고발 조치 완료했다."
진혁의 선고와 동시에, 사무실 문이 열리며 검은 수트를 입은 사내 보안 팀원 서너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사색이 되어 주저앉은 임소윤의 양팔을 무겁게 조여 붙잡았다.
"이거 놓으라고! 내가 누군지 알아? 아악! 한은서, 네가 감히 나를……!"
소윤이 비명을 지르며 질질 끌려 나갔다. 마케팅팀 사원들은 우진에게 사과의 눈빛을 보내며 은서의 주도면밀함에 경외심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펜을 손가락 끝으로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드디어 가문의 음모와 임소윤의 악행을 동시에 처단하는 첫 번째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은서가 고개를 돌려 복도 쪽 유리벽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유리벽 저편, 어두운 기둥 그늘 속에서 한재석이 서 있었다. 어젯밤의 폭발로 얼굴 반쪽에 시커먼 화상 흉터를 입은 채, 붕대를 감은 모습이었다. 그의 눈빛은 피 가래가 끓는 듯한 독가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계획이 은서와 진혁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 나자, 재석의 이성은 완전히 붕괴되어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가문의 금기된 저주가 서린, 검붉은 마나가 흘러넘치는 단검 손잡이를 서서히 움켜쥐며 은서를 노려보았다. 그 살기 어린 눈동자가 은서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