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민우진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의 밝기를 최대한 낮춘 채, 단축번호에 저장된 은서의 연락처를 찾아 손가락을 가져갔다. 손끝이 사정없이 흔들려 액정 화면 위로 땀방울이 툭 떨어졌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바로 직전이었다.

착, 착.

복도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서늘하고 규칙적인 소리.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바닥 위로, 길고 무거운 그림자 하나가 우진이 숨어 있는 자판기 모퉁이를 향해 조용히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고급 가죽의 마찰음과 함께, 광택이 흐르는 묵직한 가죽 구두 한 짝이 자판기 틈새로 삐져나온 우진의 발끝 바로 앞까지 바짝 다가와 멈춰 섰다.

그림자가 우진의 머리 위를 완전히 덮어씌웠다. 우진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의 눈동자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차가운 안광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비쳤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민우진 씨?"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임소윤이 사적으로 고용한 보안팀의 경비원이었다. 우진의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세차게 요동쳤다. 손에 쥔 핸드폰이 미끄러질 뻔한 것을 간신히 움켜쥐며, 우진은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억지로 입가에 매달았다.

"아, 깜짝이야! 아하하, 경비님이었군요. 아이고, 심장 떨어질 뻔했네."

우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슬그머니 일어섰다. 다리가 미세하게 후들거렸지만, 필사적으로 무게중심을 잡았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송신 리시버의 전원을 은밀하게 차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퇴근 시간 지난 지가 언젠데 이 어두운 복도 구석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겁니까? 수상하군요."

경비원의 눈빛이 매섭게 우진의 주머니와 핸드폰을 훑었다. 우진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약국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수상하긴요. 우리 마케팅팀 동기 한은서 씨가 오늘 하루 종일 안색이 안 좋아서 소화제랑 비타민 좀 사다 주려고 다녀오던 길입니다. 로비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뽑아서 같이 주려고 했는데, 자판기가 잔돈을 먹었는지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기계 좀 두드려 보던 참이었습니다. 왜요, 제가 기물 파손이라도 할까 봐 그러십니까?"

우진은 일부러 목소리 톤을 높이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경비원은 우진의 손에 들린 약국 봉투와 자판기 반환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가늘게 뜬 눈을 풀지 않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용무가 끝났으면 즉시 퇴근하십시오. 이 구역은 오늘 야간 정밀 보안 점검이 예정되어 있어서 일반 사원의 출입을 제한합니다."

"아, 예예! 당연히 그래야죠. 안 그래도 야근하느라 피곤해 죽겠는데 얼른 가야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우진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경비원의 시선이 등 뒤에 꽂히는 것을 느끼며 빠른 걸음으로 자판기 모퉁이를 벗어났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등덜미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축축했다.

우진은 1층 로비를 지나 건물 바깥으로 거의 뛰다시피 빠져나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로등 불빛 아래 멈춰 선 그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은서의 번호를 꾹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달깍, 하고 은서의 목소리가 수신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우진아?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은서야! 너 지금 어디야? 집이야?"

우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수화기 건너편의 은서가 침묵을 지켰다. 이내 나직하고 차분한 음성이 돌아왔다.

"아니, 아직 회사 근처야. 왜 그래? 목소리가 왜 이렇게 급해?"

"너 지금 당장 내 말 똑똑히 들어. 임소윤이랑, 네 사촌 오빠라는 그 한재석이라는 사람... 둘이 짜고 너 완전히 매장시키려고 해."

은서의 숨소리가 멎는 것이 수화기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진은 숨도 쉬지 않고 옥상 통로에서 들었던 대화 내용을 쏟아냈다.

"마케팅팀 메인 드래프트 유출용 마나 합치 서류를 네 개인 계정으로 전송되게 손을 써놨대. 네가 마나 기술을 유출한 진범인 것처럼 꾸며서 사회적으로 완전히 끝장내 버리겠다는 거야. 소윤이 그 여자가 직접 말했어. 자기 수하들 시켜서 네 개인 단말기 보안망 우회할 루트까지 다 뚫어놨다고."

은서는 붉은 가로등 아래에서 멈춰 섰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서늘한 분노가 서서히 치밀어 올랐다. 한재석, 그리고 임소윤. 은서를 가문으로 끌고 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그들이 결국 사내 기밀 유출이라는 비열한 덫까지 파놓았다는 사실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은서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으며 정교한 이성의 불꽃이 튀었다.

"우진아, 정말 고마워. 네 덕분에 살았어."

"은서야, 지금 고맙다는 말이 나와? 당장 감사팀에 찌르든가, 아니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그 인간들 진짜 미친 자들이야!"

"아니, 지금 서두르면 저들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갈 빌미만 줄 뿐이야. 오히려 잘됐어. 덫을 놓았다는 건, 그 덫이 작동하는 순간 자기들 패도 노출된다는 뜻이니까."

은서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

"내 개인 계정으로 전송되는 마나 로그를 역추적할 트랩을 심어둘 거야. 임소윤이 내 단말기에 접속하는 그 순간, 그 접속 IP와 마나 서명 경로가 고스란히 태산그룹 메인 서버 보안 로그에 박히도록 역호출 마법 각인을 발동시킬 거야. 지들이 판 무덤에 지들이 들어가게 만들어 주지."

"너... 진짜 괜찮겠어? 너무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는 거 아냐?"

우진의 진심 어린 걱정에 은서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응, 나 혼자가 아니니까 걱정 마. 내일 회사에서 봐, 우진아. 오늘 일은 절대 비밀로 해줘."

통화를 끝낸 은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마나를 소모하며 버틴 탓에, 심장의 격벽이 얇아지며 생명 마나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백야의 형벌'이 다시 고개를 치밀고 있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발끝이 무거워졌다.

살아야 했다. 그리고 저들의 공작에 맞서기 위해서는 강력한 마나 버프가 필요했다.

은서는 주머니 속의 차 키를 꽉 쥐었다. 오늘 밤은 강진혁과의 비밀 계약, 'Business Night Act'를 이행해야 하는 밤이었다.

***

강남 한복판에 우뚝 솟은 초고층 주상복합 펜트하우스. 강진혁의 사적 주거지는 숨이 막힐 정도로 고급스럽고도 적막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발밑에 깔려 있었지만, 실내는 서늘한 공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따뜻한 베이지색 대리석 바닥 위로 은서의 가녀린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현관에 최고급 수제 구두를 벗어두고 들어서는 그녀의 안색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늦었군, 한은서."

거실 한가운데, 짙은 네이비색 가운을 걸친 진혁이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서류 몇 장이 들려 있었으나, 은서가 들어서는 순간 그의 시선은 오직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에 고정되었다.

"죄송합니다. 회사 업무를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은서가 애써 태연한 척 대답하며 거실로 걸어왔다. 하지만 몇 걸음 떼지 못하고 몸이 심하게 비틀거렸다. 심장이 조여드는 극심한 통증에 은서는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진혁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소파에서 일어난 그가 순식간에 은서의 앞바다에 다다라, 쓰러지려던 그녀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감싸 안았다. 차가운 진혁의 체향과 함께 터져 나오는 그의 묵직한 생명 마나가 은서의 온몸을 감쌌다.

"바보같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참는 버릇은 여전하군."

진혁의 목소리에는 신경질적인 까칠함이 묻어 있었지만, 그녀를 안아 올리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은서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진혁은 은서를 넓고 아늑한 침실의 침대 위로 살며시 눕혔다. 은은한 간접조명만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진혁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은서의 가녀린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시작하지."

그의 나직한 선언과 함께, 두 사람의 손가락바닥이 얽혀들었다. 은서가 진혁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고 눈을 감았다.

웅-, 하는 나직한 공명음과 함께 진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하고 고결한 황금빛 생명 마나가 은서의 손끝을 타고 그녀의 체내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어붙었던 혈관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듯한 극상의 쾌감이 은서의 전신을 지배했다.

그때였다. 은서의 목덜미 깊숙한 곳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가문의 유품, '푸른 펜던트'였다. 지금까지는 그저 작동이 멈춘 가문 전승의 장신구인 줄로만 알았던 펜던트가, 진혁의 황금빛 마나 입자와 접촉하자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건...!"

푸른 펜던트에서 뻗어 나온 정교한 마나의 실타래들이 은서의 심장 주변을 감싸 안았다. 소멸해 가던 은서의 마나 격벽 위에 펜던트의 푸른 마나가 덧씌워지며, 소실된 격벽을 완벽하게 재구성하고 복구해 나갔다.

단순한 가문의 부적이 아니었다. 이 푸른 펜던트는 소멸해 가는 은서의 마나 격벽을 잠정 복구해 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마나 핵 촉매제'였던 것이다. 진혁의 순수한 생명 마나가 방아쇠가 되어 펜던트 속에 잠들어 있던 가공할 만한 복구 에너지를 깨운 것이었다.

은서의 안색이 순식간에 장밋빛으로 돌아왔다. 끊임없이 새어나가던 생명력이 가슴 중앙에 단단히 고정되는 느낌에 은서는 가쁜 숨을 내쉬며 진혁의 손을 더 꽉 쥐었다.

동기화가 깊어질수록, 은서의 머리칼 위로 연기 같은 푸른빛 실루엣이 피어올랐다. 계약의 대가이자 반동인 '영혼의 잔상'이었다. 진혁의 시야 속에 은서의 진심이 투영된 잔상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 잔상 속에서 은서는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차가운 빗속에서 진혁을 모질게 밀쳐내며 뒤돌아서서,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에 가슴을 쥐어뜯던 3년 전 그녀의 모습이 잔상으로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진혁은 그 슬픈 잔상을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야만 했던 비밀의 편린이 조금씩 베일을 벗고 있었다.

***

같은 시각, 강남의 한 음침한 사설 오피스텔 지하.

한재석은 고급 가죽 소파에 삐딱하게 기대어 앉아, 대형 모니터 콘솔 앞의 수하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수하들은 헤드셋을 가죽 귀에 바짝 밀착시킨 채, 볼륨 조절 다이얼을 연신 돌려대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연결됐나?"

재석이 길쭉한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며 물었다.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예, 도련님. 한은서의 구두 굽 밑창에 심어둔 '흑색 추적 마킹' 레이더 파동이 정상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강진혁 팀장의 펜트하우스 내부 좌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흐흥, 미련한 기집애. 자기가 대기업 사원으로 자립이라도 한 줄 알았겠지. 내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재석은 침을 뱉듯 뇌까렸다. 3화에서 은서가 가문을 나설 때, 비서를 시켜 구두 밑창에 정교하게 각인해 둔 흑색 추적 마킹은 단순한 위치 추적기가 아니었다. 대상의 마나 파동을 감지하고, 주변의 음성 정보까지 마나 주파수로 변환해 전송하는 최고급 가문 비기였다.

"귀를 바짝 대고 있어. 강진혁과 무슨 은밀한 수작을 부리는지, 기밀 정보라도 흘리는지 단 한 마디도 놓치지 마라. 그걸 빌미로 태산의 목줄을 쥘 테니까."

"알겠습니다, 도련님. 지금 음성 필터링을 최대치로 올리겠습니다."

수하들이 침을 삼키며 헤드셋의 볼륨을 끝까지 올렸다. 스피커 너머로 미세한 마찰음과 숨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재석 역시 흥분된 표정으로 콘솔 앞으로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다.

지금 진혁의 침실에서는 은서의 푸른 펜던트와 진혁의 생명 마나가 융합하여,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고순도의 금빛 마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웅웅웅—!

진혁의 펜트하우스 현관. 신발장에 단정히 놓여 있던 은서의 수제 구두 굽 바닥에서 갑자기 검붉은 마나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침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금빛 마나 파동이 구두 굽에 심겨 있던 음습한 '흑색 추적 마킹'의 레이더 파동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고작 도청과 감시를 위해 설계된 저급한 흑색 마킹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의 크기가 아니었다.

동기화가 절정에 달하며 진혁과 은서의 영혼이 한데 얽히는 순간, 두 사람의 융합 마나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 폭발적인 마나 에너지는 구두 굽의 흑색 마킹을 피뢰침 삼아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흑색 마킹이 연결된 송신 주파수를 타고, 발신지인 한재석의 지하 오피스텔 콘솔로 고스란히 역전송되었다.

"어...? 마나 파동이 갑자기 이상합니다! 과부하가...!"

수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뭐? 무슨 소리야!"

재석이 미처 헤드셋을 벗어 던지기도 전이었다.

퍼어어어엉—!

콰과광!

천만 볼트급의 강력한 고주파 피드백 소음과 폭발적인 마나 서지가 수신 콘솔로 쏟아져 내렸다. 대형 모니터들이 순식간에 불꽃을 뿜으며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아아아악!"

헤드셋을 끼고 있던 수하들은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뇌를 관통하는 충격파를 맞고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들의 귀에서 시뻘건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 귀! 내 귀가 안 들려!"

"으아아악! 불이야! 불!"

재석 역시 콘솔 바로 앞에 서 있다가 폭발의 충격파에 정면으로 휩쓸렸다. 콰당탕, 하며 소파 뒤편으로 처참하게 나가떨어진 재석은 시커먼 그을음을 온몸에 뒤집어쓴 채 비명을 질렀다. 그의 그럴듯한 수트가 사정없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불타올라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이, 이게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재석은 귀를 움켜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이명 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아 미칠 것만 같았다. 사무실 안은 폭발한 기계 장치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연기와 불꽃으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은서의 숨통을 조이려던 비열한 감시 장치가, 오히려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갈 뻔한 재앙의 무기로 변해 완벽하게 역구워 분쇄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은서와 진혁의 결합이 만들어낸 거룩하고도 강력한 사랑의 파동 앞에, 가문의 음습한 저주와 감시 따위는 한 줌의 먼지처럼 분쇄되어 흩어졌다.

***

폭풍이 휩쓸고 간 펜트하우스의 침실은 거짓말처럼 고요하고 아늑했다.

은서의 숨소리는 이제 아주 고르고 편안해져 있었다. 푸른 펜던트가 복구해 준 마나 격벽 덕분에,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건강한 생기가 도는 붉은빛이 맴돌았다. 피로 면역과 인지 극대화의 버프가 전신에 퍼지며 그녀의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진혁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이불 밖으로 살며시 빠져나온 은서의 가녀린 발목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하얗고 고운 발목을 그의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고,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발목과 종아리를 정성껏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은서가 낮 동안 구두를 신고 뛰어다니며 쌓였을 피로를 덜어주기 위한, 그의 소리 없는 배려였다.

까칠한 대기업 팀장의 가면을 벗어던진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깊은 애틋함과 애정이 서려 있었다.

조용한 방 안,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감돌 때였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은서가 속눈썹을 미세하게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달콤하고도 애절한 숨소리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고 싶었어, 진혁아..."

진혁의 손길이 순간 굳어버렸다. 그의 호흡마저 멎은 듯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잠꼬대 속에 섞여 나온 은서의 진심 어린 고백에, 진혁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서의 뺨 위로 맑은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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