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그 가짜 같던 거짓 뒤에 숨은 네 그 푸른 우는 영혼, 마저 나한테 다 바치지 그래? 대답 안 하면 여기서 문 잠근다.”

진혁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비상계단 내부의 차가운 시멘트 벽면에 부딪혀 무겁게 흩어졌다. 그의 숨결이 은서의 입술 바로 밑, 턱끝을 스치며 아찔한 열기를 남겼다. 은서는 등 뒤에 닿은 서늘한 벽의 감촉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만이 간신히 무너져 내리는 이성을 붙잡아 주고 있었다.

오른쪽 발뒤꿈치에서 시작된 찌르르한 전류는 이제 발목을 지나 종아리까지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구두 굽 밑바닥에 숨겨진 한재석의 '흑색 추적 마킹'이 진혁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생명 마나를 감지하고 굶주린 괴물처럼 요동치는 중이었다. 가문의 감시망이 발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신호가 한씨 가문의 본가에 위치한 탐지 제단에 닿는 순간, 진혁의 존재와 그가 지닌 방대한 생명 마나의 비밀이 통째로 노출될 터였다.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임소윤의 날카로운 구두 굽 소리가 계단실 문고리를 잡아 흔드는 소리와 맞물려 은서의 고막을 때렸다.

“은서 씨? 안에 있어요? 대답 좀 해봐요.”

생명의 위협과 사내 매장의 위기라는 두 갈래의 올가미가 은서의 목을 죄어 왔다. 은서는 숨을 들이마시며 진혁의 단단한 가슴팍을 세차게 밀쳐냈다. 그의 값비싼 맞춤 셔츠 깃이 은서의 거친 손길에 구겨졌다.

“팀장님은 언제나 이런 식이에요. 자기 생각만 하고, 남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죠.”

은서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찢어졌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당신한테 난 그저 흘러넘치는 마나를 받아내는 도구일 뿐이잖아요! 내가 얼마나 비참하게 짓밟히든 말든, 그저 비즈니스라는 핑계로 날 네 손아귀에 쥐고 흔들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굴지 마세요. 불쾌해요, 이 숨 막히는 장난질!”

가슴을 후벼 파는 모진 비방이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가시 돋친 회벽이었다.

그 순간, 은서의 얇은 실크 블라우스 안쪽에서 강렬한 진동이 일었다. 목걸이 줄 끝에 매달려 있던 가문의 옛 유품, '푸른 펜던트'가 진혁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생명 마나 입자들과 공명하며 눈이 시릴 정도의 선명한 빛을 뿜어냈다.

‘……아?’

은서는 뇌리를 스치는 강렬한 충격에 숨을 들이켰다. 3년 동안 그 어떤 자극에도 침묵했던 낡은 돌덩이가 진혁의 마나와 닿자마자 살아 숨 쉬는 유기체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소멸해 가던 은서의 심장 격벽 주변으로 푸른빛의 마나 막이 겹겹이 쌓여가며, 고질적인 호흡 곤란과 가슴을 찌르는 통증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단순한 기적이 아니었다. 이 푸른 펜던트는 가문에서 물려받은 쓸모없는 장식품이 아니라, 진혁이 지닌 순수한 생명 마나를 촉매로 삼아 무너져 가는 마나 격벽을 잠정 복구해 주는 전설적인 '마나 핵 촉매제' 자체였던 것이다. 펜던트는 진혁의 마나를 흡수해 은서의 얇아진 심장 벽을 단단히 메워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능의 활성화와 동시에, 두 사람을 묶고 있는 '생명 동기화 계약'의 대가가 가혹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화르륵.

어두운 비상계단 공중으로 은은한 오동나무색 잔상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은서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미련과 슬픔의 파편들이 허공에서 뭉치며 하나의 잔상으로 형체화되었다. 오직 진혁의 시야에만 선명하게 비치는 영혼의 실루엣이었다.

그 잔상은 입으로 독설을 뱉고 있는 은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눈물을 흘리며 진혁의 목을 끌어안는 애절한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에 새겨진 오동나무색 불꽃의 글씨는 진혁의 심장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당신을 위해 매일 밤 울었어. 보고 싶어서,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은서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비즈니스라는 핑계 뒤에 꽁꽁 숨겨두었던, 3년 동안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가장 부끄럽고 처절한 진심이 영혼의 잔상을 통해 진혁에게 고스란히 폭로되고 있었다.

“이거…… 놔요! 내 말 안 들려요? 당장 비키라고요!”

은서는 다급하게 소리치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본심을 숨기고 거짓을 고할수록, 계약의 반동은 더욱 집요하게 톱니바퀴를 굴렸다. 은서의 가슴팍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흑마나의 가루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더니, 이내 가식 없는 진실의 전율이 담긴 붉은 노을빛으로 화해 진혁의 눈가 주변을 아련하게 뒤덮었다.

붉은 노을빛은 은서가 느끼는 부끄러움과 애타는 마음을 대변하듯 진혁의 뺨과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차가운 이성을 가장한 은서의 독설이, 잔상 메커니즘을 거치자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애절한 고백으로 번역되어 진혁의 귓가에 속삭여진 꼴이었다.

진혁의 굳어 있던 입꼬리가 아주 느리게 호선을 그렸다. 차갑게 가라앉았던 그의 눈동자에 흐뭇하고 깊은 만족감의 빛이 서서히 차올랐다. 은서가 자신을 밀어내려 발버둥 칠수록, 그녀의 영혼은 진혁에게 더 깊이 매달리고 있었다.

“거짓말 참 못해, 한은서.”

진혁이 낮게 웃었다. 그는 은서가 밀쳐내느라 가슴팍에 얹고 있던 가녀린 손을 덮어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들어 은서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거칠고 오만한 팀장의 손길이었지만, 전해지는 체온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다정했다.

“입술로는 나한테 칼날을 뱉으면서, 네 영혼은 내 품에 안겨서 울고 있잖아. 누구 말을 믿어야 하지?”

“팀장님, 제발…….”

“매일 밤 나 때문에 울었다는 그 영혼의 고백을 믿는 게 합리적인 비즈니스 판단이겠지.”

진혁의 눈빛에 담긴 흐뭇한 승리감과 애정이 은서의 가슴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밀어내려 할수록 더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그의 존재감에 은서는 결국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진혁의 손끝에서 시작된 순수한 생명 마나가 은서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온화하면서도 강력한 그의 힘은 은서의 발목을 옥죄던 한재석의 '흑색 추적 마킹'의 어두운 마력을 단숨에 억누르고 정화해 버렸다. 지독한 불안감으로 요동치던 은서의 심장 격벽이 거짓말처럼 안정을 찾았다.

진혁은 은서의 귓가로 고개를 더 가까이 숙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내 집무실 금고 속에서 3년째 빨간 마나 실로 묶여 있는 그 편지…… 뜯기 전에 네 진짜 목소리로 듣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오늘 밤은 이 잔상으로 만족하지.”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억누르던 존재감이 한풀 꺾이자, 은서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달그락, 문고리가 다시 한번 거칠게 돌아갔다.

“문이 안에서 잠겼나? 왜 안 열려?”

임소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진혁은 은서의 구겨진 블라우스 깃을 손끝으로 가볍게 펴주며, 비상계단 아래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래층 피트니스 센터 연결 통로로 나가. 비상계단 센서등 꺼지기 전에 가.”

은서는 더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슴팍의 푸른 펜던트를 꾹 쥐며 어둠 속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는 은서의 등 뒤로, 진혁의 묵직한 목소리가 임소윤을 향해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

같은 시각, 태산 이노베이션 사옥의 45층 옥상 정원.

도심의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늘진 벤치 구석에 두 남녀가 마주 서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와 정원의 나뭇잎들을 서늘하게 흔들었다.

임소윤은 들고 있던 보온병의 뚜껑 컵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돌리며, 어둠 속에 서 있는 한재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우아한 미소 뒤에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집요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 사장님, 은서 씨 구두에 심어두었다는 그 마킹 신호는 어떻게 됐어요? 위치 파악은 제대로 되고 있는 건가요?”

한재석은 신경질적으로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을 튕겼다.

“쳇, 신호가 갑자기 끊겼어. 강진혁 그 건방진 새끼가 은서 곁에 바짝 밀착해 있는 게 분명해. 그놈의 생명 마나가 워낙 강력해서 내 추적 마킹의 파동을 일시적으로 차단한 것 같군.”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들의 밀회는 오래가지 못할 테니까.”

임소윤이 잔을 가볍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툭, 하는 둔탁한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내일 오전 중으로 마케팅팀의 '메인 드래프트 유출용 마나 합치 서류'가 최종 결재 라인에 올라갈 겁니다. 내가 그 서류의 마나 로그를 교묘하게 조작해서 한은서의 개인 단말기 계정으로 전송되도록 손을 써뒀거든요.”

한재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호오, 기밀 유출의 진범으로 한은서를 지목하겠다는 건가? 태산의 핵심 마나 제어 기술을 빼돌리려 한 도둑년으로 낙인찍히면, 강진혁이라도 그 계집을 감싸 돌 수 없겠지.”

“당연하죠. 태산그룹의 보안 규정은 철저하니까요. 기밀 유출 정황이 포착되는 즉시 한은서는 보안팀에 구금될 거고, 사내에서 완벽하게 사회적 사망 선고를 받게 될 겁니다. 그 틈을 타서 한 사장님은 가문의 규율을 명분으로 내세워 은서를 강제로 본가로 끌고 가시면 돼요. 그 뒤에 그 계집의 심장에 남은 마지막 마나 핵까지 모조리 뽑아내든 말든, 그건 사장님 마음대로 하시고.”

임소윤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한재석은 만족스럽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아주 훌륭한 시나리오야. 한은서 그년이 제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결국 우리 손바닥 안이지. 내일 결재가 끝나는 대로 즉시 보안팀을 움직이도록 하지.”

두 사람의 어두운 웃음소리가 옥상의 밤하늘 아래로 가늘게 흩어졌다.

***

한편, 44층 마케팅팀 사무실 복도 끝에 위치한 자동판매기 뒤편의 그늘진 공간.

“……!”

민우진은 자신의 귀에 꽂힌 초고감도 송신 리시버를 꽉 움켜쥔 채 숨을 죽였다.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시는 듯한 공포가 그를 덮쳤다.

우진은 아침부터 안색이 유독 나빠 보이던 동기 은서가 걱정되어, 약국에서 소화제와 비타민을 사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조금 더 조용한 길을 택해 옥상 연결 통로 부근을 지나치려던 찰나, 자판기 뒤쪽 환기구를 통해 옥상 정원에서 흘러나오는 낯익은 목소리들을 포착했다.

마케팅팀에서 신제품 프로모션용으로 개발 중이던 최첨단 음향 기기의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송신 리시버가 마침 켜져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리시버의 소형 액정 위로 주파수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임소윤과 한재석의 서늘한 음성이 한 자 한 자 명확하게 흘러나왔다.

[마케팅팀의 메인 드래프트 유출용 마나 합치 서류… 한은서의 개인 단말기 계정으로 전송되도록 손을 써뒀거든요. 기밀 유출의 진범으로 한은서를 지목하겠다는 건가? 한은서는 마나 기술 도둑으로 낙인찍혀 완벽하게 매장당할 겁니다.]

우진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시샘이나 사내 괴롭힘 수준이 아니었다. 한은서라는 존재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가문으로 끌고 가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들려는 거대한 음모였다. 늘 꿋꿋하게 버티던 은서의 등 뒤로 이런 추악한 덫이 놓이고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 현실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은서한테 알려야 해. 당장 이 사실을……!’

우진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의 밝기를 최대한 낮춘 채, 단축번호에 저장된 은서의 연락처를 찾아 손가락을 가져갔다. 손끝이 사정없이 흔들려 액정 화면 위로 땀방울이 툭 떨어졌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바로 직전이었다.

착, 착.

복도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서늘하고 규칙적인 소리.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바닥 위로, 길고 무거운 그림자 하나가 우진이 숨어 있는 자판기 모퉁이를 향해 조용히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고급 가죽의 마찰음과 함께, 광택이 흐르는 묵직한 가죽 구두 한 짝이 자판기 틈새로 삐져나온 우진의 발끝 바로 앞까지 바짝 다가와 멈춰 섰다.

그림자가 우진의 머리 위를 완전히 덮어씌웠다. 우진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의 눈동자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차가운 안광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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