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가 끝난 어둠 속 무대 뒤편, 은서의 가슴 위 푸른 펜던트에서 풀려나온 엷고 아련한 잔상의 불꽃이 진혁의 하얀 목을 정성스럽게 감싸고 돌며 ‘여전히 너만 갈망해’라는 내밀한 연기를 새겨놓았다.
진혁의 목덜미를 휘감은 푸른 잔상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그의 피부 안쪽으로 스며들 듯 일렁였다. 은서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나 이미 허공에 흩뿌려진 진심의 궤적을 거두어들일 방법은 없었다.
“이게…….”
진혁의 낮은 목소리가 대기실의 밀폐된 공기를 잘게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목덜미를 조여 오는 잔상의 온기를 따라 은서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멈추었다. 한 걸음. 그가 구두 굽 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왔다. 은서는 뒷걸음질을 치려 했으나, 등 뒤는 이미 차가운 대기실 벽이었다.
“비즈니스 뒤에 숨겨둔 게 고작 이거였나, 한은서?”
“팀장님, 이건…… 잔상의 오작동이에요. 계약의 불안정성 때문에 생기는 일시적인 마나 편향 현상일 뿐이라고요.”
은서가 억지로 목소리에 힘을 주며 펜을 쥐고 있던 손가락 끝을 바르르 떨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이 생생했다. 가문의 저주로 얇아진 심장 격벽이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평소라면 마나 고갈로 인해 온몸의 뼈마디가 시려 와야 할 타이밍이었다. 오히려 가슴에 걸린 푸른 펜던트에서 따뜻하고도 묵직한 마나 입자가 흘러나와 심장의 균열을 단단하게 메워주고 있었다.
‘설마…….’
은서는 가슴 위의 푸른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1화에서 가문을 나설 때만 해도 아무런 마력도 감지되지 않던 무용지물의 유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혁의 순수한 생명 마나와 접촉하는 순간, 이 펜던트가 촉매가 되어 은서의 소멸해 가던 마나 격벽을 잠정적으로 복구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가문의 장식품이 아니었다. 가문의 저주인 ‘백야의 형벌’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사라진 마나 핵의 촉매제였다.
그 진실을 깨닫는 순간, 대기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팀장님! 본부장님께서 대기실 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비서의 급박한 목소리에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푸른 연기가 신기루처럼 스러졌다. 진혁은 턱끝에 힘을 준 채 은서를 한 번 더 깊게 응시한 뒤, 느슨해진 넥타이를 거칠게 치켜 올리며 돌아섰다.
***
그날 밤 9시, 강남역 인근의 고급 이자카야.
“자, 이번 신사업 PT 완벽하게 성공시킨 우리 마케팅 1팀과 한은서 보좌관을 위하여!”
민우진의 우렁찬 선창에 맞춰 수십 개의 유리잔이 허공에서 요란하게 부딪쳤다. 맥주 거품이 잔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넘쳤다. 테이블 곳곳에서 쏟아지는 찬사와 박수갈채 속에서도 은서는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테이블 저편, 어두운 구석 자리에 앉은 임소윤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소윤은 차를 마시듯 술잔을 가볍게 돌리며 은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획안을 가로채려던 음모가 완전히 무산된 뒤라 그녀의 정돈된 얼굴은 무섭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서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살짝 움직였다. 그 순간, 오른쪽 구두 굽 밑바닥에서 미세하게 웅성거리는 불쾌한 마력의 진동이 느껴졌다.
‘이 느낌은…….’
사촌 오빠 한재석의 비열한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가문을 나설 때 그의 비서가 구두를 털어주는 척하며 새겨두었던 ‘흑색 추적 마킹’이었다. 가문의 감시망이 여전히 자신의 발밑에서 숨을 죽인 채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감각이 온몸의 소름을 돋우었다.
“한 보좌관, 오늘 진짜 대단했어. 그 정전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마나 연출을 기획할 생각을 다 했대? 완전 판교의 구세주라니까!”
우진이 맥주잔을 들이밀며 넉살 좋게 웃었다. 은서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잔을 부딪쳤다.
“과찬이세요, 민 대리님. 다들 도와주신 덕분이죠.”
“도와주긴 뭘. 난 그냥 옆에서 팝콘이나 먹은 수준인데. 그나저나…….”
우진이 목소리를 낮추며 슬쩍 상석을 가리켰다.
“팀장님, 아까부터 안색이 장난 아니네. PT 성공했는데 왜 저러신대? 마치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인데.”
은서는 우진의 시선을 따라 상석으로 눈길을 돌렸다.
상석에 앉은 진혁은 부원들의 끊임없는 건배 제의를 무심하게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단 한 순간도 은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술자리, 붉은 조명 아래서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에는 미어지는 듯한 뜨거운 소유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겉으로는 완벽주의적인 팀장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가면 아래 숨겨진 독점욕이 은서의 피부를 따갑게 찔러왔다.
진혁이 잔을 입술에 대며 은서와 정면으로 눈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 모양이 조용히 움직였다.
‘나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은서는 술기운과 마나 버프의 열기가 뒤섞여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더는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은서는 핑계를 대며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소윤의 서늘한 시선과 진혁의 무거운 시선이 동시에 그녀의 등을 쫓았다.
***
이자카야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무거운 비상구 철문 뒤로 차단되었다.
상가 건물의 비상계단은 어둡고 서늘했다. 회색 시멘트 벽에서 배어 나오는 한기가 은서의 뺨을 식혀주었다. 후, 하고 가쁜 숨을 내쉬며 계단 난간을 짚은 순간이었다.
쿵.
묵직한 철문이 다시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정막을 깨뜨렸다. 구두 굽 소리도 없이 다가온 거대한 그림자가 은서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센서등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계단참.
“팀장…….”
은서가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강한 힘이 그녀의 어깨를 낚아채 벽으로 밀어붙였다.
탁!
진혁의 양손이 은서의 얼굴 양옆, 시멘트 벽을 단단하게 짚었다. 거리는 제로 센티미터. 그의 넓은 어깨가 은서의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했고, 가슴과 가슴이 닿을 듯한 좁은 틈 사이로 그의 뜨거운 숨결이 쏟아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진혁의 눈동자는 야수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피할 생각 마, 한은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누가 보는데? 그 비열한 사촌 오빠? 아니면 네 기획안 훔치려던 임소윤?”
진혁의 낮은 음성이 이명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생명 마나가 은서의 심장 격벽을 강하게 자극했다. 밤마다 계약이라는 이름 하에 한 침대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던 기억들이, 몸에 각인된 세포의 반응들이 일제히 깨어나 아우성을 쳤다.
그 순간, 은서의 심장 부근에서 연분홍빛 미련의 잔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물결이 되어 피어오른 잔상은 어두운 계단실을 은은하게 물들였다. 그것은 은서가 3년 동안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진혁을 향한 애달픈 그리움이자 차마 전하지 못한 고백이었다. 연분홍빛 실루엣은 진혁의 망막을 휘감고,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은서의 진짜 감정을 날것 그대로 폭로했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래도 비즈니스라고 우길 건가?”
“……네. 비즈니스예요.”
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문의 오랜 원한과 자신을 옥죄는 저주의 멍에를 진혁에게 짊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감정이 깊어질수록 가문의 저주 반동이 그를 해칠 것이 분명했다. 회피벽이 본능적으로 작동했다. 은서는 진혁의 가슴을 밀쳐내며 차가운 거짓말을 내뱉었다.
“이 잔상은 그냥…… 마나 배출 현상일 뿐이에요. 저, 다른 남자 만나고 싶어요. 팀장님과의 계약은 제 지병을 치료하기 위한 정량적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더는 사적인 감정 요구하지 마세요.”
모진 독설이 은서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 끝에는 이미 투명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진혁은 가만히 멈춰 서서 은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아프게 비틀려 올라갔다. 고독하고도 지독한 미소였다.
“거짓말도 머리가 좋아야 하는 법이지, 한은서.”
진혁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은서는 그가 자신을 거칠게 몰아붙일 것이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뺨에 닿은 손길은 지독할 정도로 다정하고 온화했다.
진혁의 엄지손가락이 은서의 눈물 맺힌 속눈썹 끝을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다루듯 가만히 훔쳐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은서의 심장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이렇게 울면서 다른 남자를 만나겠다고?”
진혁은 피식 웃으며 은서의 작은 손을 가만히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매며 깍지를 꼈다. 겉으로는 비즈니스 룰을 내세우며 차갑게 굴던 남자가, 단둘이 남은 어둠 속에서는 지독할 정도로 달콤한 애정을 과공급하고 있었다.
“팀장님…….”
“도망칠 구멍 찾지 마. 네가 아무리 회피하려고 해도, 이 잔상은 네 영혼이 우는 소리를 나한테 그대로 들려주니까.”
진혁이 은서의 입술 바로 밑까지 제 얼굴을 내리깔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은서의 입술에 닿아 번졌다. 은서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며 연분홍빛 잔상이 더욱 짙게 피어올라 두 사람의 온몸을 휘감았다.
진혁이 은서의 귓가에 낮고 무겁게 속삭였다.
“그 가짜 같던 거짓 뒤에 숨은 네 그 푸른 우는 영혼, 마저 나한테 다 바치지 그래? 대답 안 하면 여기서 문 잠근다.”
그의 숨결이 입술 언저리를 스칠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진혁의 손가락 사이로 단단히 맞물린 손귀에서부터 터져 나온 순수한 생명 마나가 은서의 혈관을 타고 빠르게 역류했다. 매일 밤 계약이라는 구실 아래 그의 품에 안겨 탐닉하던 그 압도적인 생명력이었다. 머릿속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온몸의 세포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극도의 각성 상태.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은서의 심장 격벽은 터질 듯이 불타올랐다. 감정이 깊어질수록, 그를 향한 갈망이 선명해질수록 가슴을 짓누르는 계약의 반동이었다.
“하…… 윽.”
은서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키며 진혁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깍지 낀 손가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손목에 힘을 주어 벽으로 그녀를 더 바짝 밀착시킬 뿐이었다.
“대답해, 한은서. 내 눈 똑바로 보고.”
진혁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3년 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여자가 눈앞에서 비참하게 시들어가는 꼴을 보아야 했던 남자의 해묵은 분노와 질척한 애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의 시선이 은서의 뺨을 타고 내려와 가슴팍에 걸린 푸른 펜던트에 닿았다. 진혁의 마나와 반응하며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는 유물. 진혁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은서가 자신과의 접촉을 통해 단순히 목숨을 연명하는 것을 넘어, 가문의 저주를 깨뜨릴 열쇠를 손에 쥐었다는 것을.
은서는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이대로 그에게 모든 것을 들켜버린다면, 가문의 잔혹한 감시자들이 진혁을 타깃으로 삼을 것이 분명했다. 원수가 된 가문 사이에서 진혁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철저히 밀어내는 것뿐이었다.
“이거…… 놓으세요. 팀장님께서 이러실수록, 전 그냥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선을 넘는 것 같아 불쾌할 뿐입니다.”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어두운 계단실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녀의 거칠고 매몰찬 거절과 달리, 허공에 흩날리는 연분홍빛 잔상은 더욱 짙고 애처롭게 일렁였다. 잔상의 비단 자락은 진혁의 목덜미를 파고들어 그의 심장박동과 공명하듯 붉고 푸른빛을 번갈아 내뿜었다. 입으로는 밀어내면서도, 영혼은 그에게 매달려 구원을 바라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진혁의 입꼬리가 차갑게 굳어졌다. 거짓을 말하는 입술과 진실을 토해내는 영혼의 괴리가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불쾌하다라.”
그가 조소 섞인 목소리로 은서의 귓가에 속삭이려는 찰나였다.
찌르르하는 기분 나쁜 정전기 같은 감각이 은서의 오른쪽 발뒤꿈치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 돋는 오한.
‘……!’
은서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구두 굽 밑바닥에 새겨진 한재석의 ‘흑색 추적 마킹’이 진혁의 거대한 생명 마나 반응을 감지하고 강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문의 감시 마법이 발동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이 상가 건물 전체에 서려 있는 한씨 가문의 추적 결계가 진혁의 마나 파동을 역추적해 강진혁이라는 존재를 가문의 심장부에 그대로 노출시킬 위기였다.
“팀장님, 제발…… 지금은 안 돼요. 놔주세요.”
은서의 목소리가 단순한 거절이 아닌, 실제적인 공포로 젖어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 진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그가 은서의 구두 굽 쪽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불길한 마력 반응은 뭐지?”
진혁이 눈치를 채고 은서의 다리 쪽으로 손을 뻗으려던 바로 그 순간.
달그락.
계단실 철문 너머에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서 씨? 한은서 씨 여기 있어요?”
임소윤의 목소리였다. 술자리에서 은서가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뒤쫓아온 것이 분명했다. 문손잡이를 잡고 흔드는 거친 마찰음이 밀폐된 비상계단 안으로 날카롭게 들이쳤다.
철문 틈새로 복도의 밝은 불빛이 한 줄기 길게 새어 들어와 어둠 속에 밀착해 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비추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문이 더 열린다면, 대기업 팀장과 신입 사원이 어두운 비상계단에서 숨결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탄로 날 판이었다. 게다가 발끝에서 차오르는 흑색 추적 마킹의 어두운 마력이 은서의 발목을 덩굴처럼 휘감아 오기 시작했다.
은서는 숨을 죽인 채 진혁의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진혁의 집요한 눈빛,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임소윤의 그림자, 그리고 발밑에서 목을 조여 오는 가문의 감시망까지. 은서의 심장 격벽이 한계에 다다른 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