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오빠, 당장 그 가시나 마나 처방 장부 가져와 봐. 숨통을 쥐지 않고선 못 참겠어.”

수화기 너머로 임소윤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멀어져 가는 진혁과 은서의 손끝에 남은 금빛 스파크를 질투로 불타는 눈으로 쏘아보며,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백을 움켜쥐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한재석이 손가락을 튕기는 가벼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은서의 숨통을 조이고 그녀를 완전히 파멸시킬 덫은 이미 사내 곳곳에 은밀하게 쳐진 지 오래였다.

그날 밤, 태산 이노베이션 3층 대형 신사업 프레젠테이션(PT) 전시장.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메인 드래프트 리허설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야간 준비실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은서는 홀로 제어반 앞에 서서 마지막 시스템 로그를 검토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국내외 핵심 바이어들이 대거 참석하는 대규모 입찰 경쟁 PT가 시작된다. 가문에서 늘 쓸모없는 도구 취급을 받으며 독기로 버텨온 그녀에게, 이번 기획안은 태산에서 독자적인 커리어우먼으로 완전히 자립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지잉-.

갑자기 기분 나쁜 고주파 소음이 준비실 내부를 긁고 지나갔다. 뒤이어 웅웅거리던 대형 마나 하이브리드 발전기의 구동음이 뚝 끊겼다.

화르륵!

단락된 회로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매캐한 타는 냄새가 좁은 야간 준비실 안을 빠르게 채워 나갔다. 은서는 급히 제어반의 비상 레버를 당겼지만, 손끝에 닿는 쇠붙이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전시장 전체의 마나 전선 피복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먹통이 된 것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고농축 전기 마나를 흘려보내 과부하를 일으킨 게 분명했다. 임소윤이나 한재석, 혹은 두 사람 모두의 합작품이리라.

“하아…… 윽.”

갑작스러운 정전과 동시에 은서의 가슴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가문의 혈통적 저주인 '백야의 형벌'이 야간의 급격한 마나 고갈과 맞물려 심장을 난도질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력을 정제하는 심장 격벽이 얇아져 생명 마나가 허공으로 증발하는 고통은 겪을 때마다 뼈가 마디마디 깎여 나가는 듯했다.

은서는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섰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안쪽이 찢어지는 느낌에 스스로 목을 죄듯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 주머니 속에서 가문의 유품인 '푸른 펜던트'를 꺼내 들었지만, 그것은 1화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마력도 흐르지 않는 차가운 금속 덩어리에 불과했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는데.”

이대로 PT가 무산되면 모든 책임은 담당자인 은서가 뒤집어쓰게 된다. 임소윤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무능한 낙하산으로 매장할 것이고, 한재석은 가문의 강제 혼처로 그녀를 끌고 가 마나 추출용 인질로 삼을 터였다. 절망감이 어둠보다 더 짙게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마나 부족으로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허리를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은서의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다.

그때, 묵직한 이중 결계문이 열리며 어둠을 뚫고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서벅, 서벅.

단정하고도 거침없는 발소리.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어둠 속에서 은서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그를 알아챘다. 차갑고도 지독하게 익숙한 체온. 강진혁이었다.

“한은서.”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진혁은 어둠 속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은서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은서는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꺾인 무릎은 힘없이 바닥을 향해 무너져 내렸다.

텁-.

바닥에 닿기 직전, 진혁의 단단한 팔이 은서의 허리를 가로질러 낚아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은서의 가녀린 목덜미를 부드럽고도 억세게 감싸 안았다.

“바보같이 굴지 마. 몸 상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연락을 안 해.”

“팀장님…… 이거 놓으세요. 저 지금, 리허설 준비해야……”

“입 다물어. 숨이나 쉬어.”

진혁의 거친 다그침과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은서의 손에 쥐여 있던 작동을 멈춘 푸른 펜던트가 진혁의 손길이 닿자마자 이글거리며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혁의 몸에서 흘러나온 순수하고 방대한 생명 하이브리드 입자가 펜던트의 금속 표면에 닿는 순간, 펜던트 중심부의 마학 코어가 환하게 눈을 떴다.

웅웅웅-.

차가운 은백색 방 안이 찬란한 금빛 조율음으로 가득 찼다. 펜던트는 진혁의 생명 마나를 흡수해 스스로 증폭시키는 강력한 마나 핵 촉매제였다. 가문에서조차 그 사용법을 몰라 무용지물이라 여겼던 유품이, 오직 강진혁이라는 열쇠를 만나서야 비로소 가동된 것이다. 소멸해 가던 은서의 심장 격벽이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 에너지로 촘촘히 메워지기 시작했다.

“아……!”

은서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통증이 썰물처럼 밀려 나가고,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전율이 일었다. 생명 동기화 계약(Business Night Act)의 강력한 버프가 펜던트의 공명으로 인해 평소의 수십 배에 달하는 고밀도로 각성한 것이다.

진혁은 은서의 안색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녀를 뒤에서 완전히 끌어안았다.

그는 어둠에 휩싸인 전시장 제어 모니터 앞에 은서를 기대어 세운 뒤, 자신의 뜨거운 가슴을 그녀의 얇은 등뼈에 밀착시켰다. 두 사람의 척추를 타고 백열(白熱)의 마나 공진 에너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팀장님, 너무 가까워요…… 사내에서 이러면……”

은서가 붉어진 얼굴로 바르작거렸지만, 진혁은 그녀의 어깨를 더 단단히 조여 맸다. 그의 더운 숨결이 은서의 귀밑살을 간지럽히며 내려앉았다.

“비즈니스다, 한은서. 네가 살아야 내 기획안도 산다. 억지 부리지 말고 내 마나를 받아들여.”

그의 목소리는 지독히 냉정했으나, 은서의 등을 받쳐 든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귓가를 때리는 진혁의 심장 박동 소리가 은서의 고동과 완벽하게 싱크를 맞추어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은서의 뇌리에 전시장 전체의 마나 흐름이 3D 홀로그램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피로 면역과 인지 능력 극대화 버프가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다. 전자기 마학 설계의 탁월한 직결 감지력이 그녀의 손끝에 깃들었다. 어디가 단선되었는지, 어느 라인을 타고 우회 흐름을 만들어야 하는지가 직관적으로 보였다.

“진혁 씨, 저기 저 메인 도관을 잡아야 해요. 제 손을 잡아줘요.”

은서가 자신도 모르게 옛 이름을 부르자, 진혁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은서의 오른손을 포개어 잡았다.

파지직!

은서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레이저 같은 고정밀 마나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두 사람의 결합된 마나가 타버린 수십 가닥의 전선 피복을 타고 들어가, 녹아내린 구리선을 순식간에 재융합하고 새로운 가상 회로를 구축해 나갔다. 전자기 마학 설계의 정수였다.

쿠우웅-!

웅장한 가동음과 함께 전시장 천장의 대형 서치라이트가 차례로 불을 밝혔다. 암흑에 잠겼던 메인 드래프트 스크린이 눈부신 백색 광채를 뿜어내며 켜졌고, 태산 이노베이션의 독자적인 신사업 홀로그램이 공중에 화려하게 부상했다. 완벽한 복구였다.

진혁은 그제야 은서를 안았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은서의 붉어진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준비는 끝났군.”

진혁이 낮게 속삭였다. 은서는 펜던트를 꼭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자신감과 뜨거운 투지가 끓어올랐다. 가문이 무능하다며 매도하고 내팽개쳤던 한은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완벽한 무기를 쥔 여제였다.

***

다음 날 아침, 신사업 입찰 경쟁 PT 당일.

전시장 내부에는 태산그룹의 주요 임원진과 글로벌 바이어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임소윤은 여유롭게 찻잔을 돌리며 한재석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승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젯밤 전선 피복을 모조리 태워버렸으니, 한은서의 기획안은 화면조차 켜지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럼, 태산 이노베이션 마케팅팀의 한은서 보좌관이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무대 위의 조명이 꺼졌다. 임소윤은 비웃음을 흘리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암전 속에서 정적이 흐르는 순간, 임소윤의 기대와 달리 스크린이 터질 듯한 광채를 내뿜으며 가동되었다.

쿠콰콰쾅-!

단순한 화면이 아니었다. 관객들의 눈앞에 태산의 차세대 마나 배터리 엔진이 실물 크기의 고정밀 홀로그램으로 구현되어 나타났다. 가상 입자들이 전시장 구석구석을 수놓으며 바이어들의 감탄사를 자아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임소윤이 들고 있던 찻잔이 덜덜 떨렸다. 찻물이 잔 가장자리를 넘어 그녀의 실크 스커트로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오는 한은서의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로 당당했다. 진혁의 백열마나로 완벽하게 충전된 그녀의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끄럽게 빛났고, 눈동자는 청명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문의 저주로 병약해 보이던 신입 사원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안녕하십니까. 태산 이노베이션 신사업 마케팅을 담당하는 한은서입니다. 저희가 제시하는 마나 하이브리드 경제 모델은 기존의 전력망을 300% 이상 효율화하는 혁신적인 설계입니다.”

은서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전시장 전체를 웅장하게 울렸다. 복잡한 마학 공식을 아주 쉽고 명쾌하게 풀어내는 그녀의 발표에 바이어들은 자석에 이끌리듯 몰입했다. 슬라이드가 넘어갈 때마다 은서의 손끝에서 미세한 마나 제어가 일어나며 홀로그램의 구동 방식을 실시간으로 변경해 보여주었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은서만이 가능한 전자기 마학 프레젠테이션이었다.

한재석은 관람석 맨 뒷줄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비열한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신이 그토록 멸시하고 착취하려 했던 사촌 여동생이, 대기업 태산의 정점인 바이어들을 발아래에 두고 놀라운 자이언티 급의 무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이 태산이 제안하는 미래입니다. 감사합니다.”

발표가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전시장 전체가 떠나갈 듯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유럽계 대형 바이어의 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는 무대 단상으로 직접 걸어 내려와 은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놀라운 기술력과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이었습니다. 우리 컨소시엄은 이 자리에서 태산 이노베이션의 기획안을 최종 채택하겠습니다. 즉석 승인 도장을 찍도록 하지요.”

그는 품 안에서 황금색 각인이 새겨진 수주 승인 인장을 꺼내 은서가 들고 있던 계약서 패드 위에 강하게 내리찍었다.

쿵-!

선명하게 찍힌 수주권 통과 도장. 그것은 임소윤이 그토록 가로채려 했던 태산의 핵심 신사업 우선 협상권을 한은서가 자신의 실력으로 완전히 강탈해 냈음을 증명하는 낙인이었다.

임소윤의 얼굴은 흙빛을 넘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방끈을 으스러지게 쥐었지만, 이미 판은 끝난 뒤였다. 은서는 단상 위에서 임소윤과 한재석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비웃어 주었다. 철저하고도 통쾌한 정면승부의 사이다였다.

***

모든 행사가 끝나고 내빈들이 빠져나간 어두운 무대 뒤편 대기실.

은서는 벽에 기대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식적인 무대는 끝났지만, 긴장이 풀리자 몸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 진혁과의 과도한 동기화와 펜던트의 폭발적인 마나 촉매 반응이 일으킨 역작용이었다.

스르륵.

대기실 문이 열리고 진혁이 걸어 들어왔다. 그의 넥타이는 살짝 느슨해져 있었고, 은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열망과 깊은 안도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수고했다, 한은서 보좌관. 기대 이상이더군.”

“팀장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은서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펜을 규칙적으로 톡, 톡 두드렸다. 불안함과 설렘이 동시에 교차할 때 나오는 그녀만의 오랜 버릇이었다.

그때였다.

은서의 가슴 위에 걸려 있던 푸른 펜던트에서 미세한 균열이 가듯 징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틈새로 엷고 아련한 푸른 연기 같은 실루엣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생명 동기화 계약의 피할 수 없는 대가이자 부작용인 '영혼의 잔상'이었다. 접촉이 깊어지고 진심이 통할수록, 은서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가장 부끄러운 감정이 시각적 표식으로 강제 노출되는 현상.

“어……? 안 돼……”

은서가 급히 손으로 가슴을 가리려 했으나, 푸른 연기는 이미 생명력을 얻은 듯 허공을 가로질렀다.

스르르륵.

연기는 부드러운 불꽃의 파동이 되어 진혁의 어깨를 지나, 그의 하얗고 단단한 목덜미를 정성스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진혁의 살결 위에 은서의 심장 소리와 함께 선명한 홀로그램 문자를 새겨넣기 시작했다.

[여전히 너만 갈망해.]

비즈니스라는 차가운 껍데기 뒤에 숨겨두었던, 은서가 3년 동안 차마 전하지 못했던 절박하고도 애틋한 진심의 낙인이었다.

진혁의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렸다. 목덜미를 휘감은 푸른 잔상의 열기에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은서는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진 채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계약의 반동으로 가슴이 찌릿하게 아파오는 와중에도,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걷잡을 수 없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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