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보좌관 구두창까지 간섭하려는 개들이 있는 것 같군.”
진혁의 낮고 위협적인 선언이 회의실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김 실장의 턱밑에 비수처럼 박혔다.
김 실장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흙빛으로 변했다. 품속에서 마나 감지기를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가락이 굳어버린 듯 멈췄다. 태산 이노베이션의 실세이자, 가차 없는 성격으로 악명 높은 강진혁 팀장이 이 정도로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김 실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팀장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그저 가문에서 보낸 화분이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러…….”
“화분 확인을 왜 마케팅팀 특허 기획서가 올려진 테이블 앞에서 하는지 모르겠군.”
진혁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큰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김 실장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진혁의 시선이 김 실장의 품속, 미세하게 빛나던 기기 쪽으로 내리꽂혔다.
“경고하는데, 내 구역에서 쥐새끼처럼 서성거리며 남의 보좌관 뒤조사나 대포로 흘리다 걸리면, 그 손목가지를 법무팀이 아니라 내가 직접 분질러 놓을 겁니다. 서경 한씨 가문이 아무리 마나 기술에 목이 말랐어도, 태산의 보안팀을 우습게 봐서는 곤란하지.”
“팀장님, 그건 오해…….”
“나가.”
진혁의 단호한 축객령에 김 실장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뱀 같은 눈으로 은서를 한 번 쏘아본 뒤, 허리를 굽히고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가기에 급급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정막 속에 무겁게 울렸다.
은서는 가만히 펜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문의 사냥개들이 이토록 대담하게 회사 내부까지 침투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때, 진혁이 뒤를 돌아서며 은서의 어깨를 보란 듯이 짚었다. 그의 넓고 단단한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온기가 얇은 셔츠 깃을 뚫고 은서의 피부로 스며들었다. 순간, 고갈되어 가던 그녀의 마나 격벽이 웅성거리며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차갑게 식어가던 손끝에 다시금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가자. 내 방으로.”
진혁은 은서의 어깨를 감싸 쥔 채, 기획실 깊숙이 위치한 본부장실로 그녀를 인솔했다. 지나가는 사원들의 시선이 두 사람의 밀착된 신체 접촉에 집중되었지만, 진혁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당당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본부장실의 두꺼운 방음 문이 닫히고 나서야 진혁은 은서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두 사람 사이의 좁은 틈새를 메웠다. 진혁은 책상 뒤의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턱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은서는 얌전하게 의자에 앉으며 품속의 푸른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가문의 유품이자 아직은 아무런 반응도 없는 이 차가운 금속 조각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생명줄이었다. 진혁은 그런 은서의 손끝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재석이 보낸 사냥개들이 벌써 사내망까지 흔들고 있어. 김 실장이 들고 있던 기기는 단순한 도청기가 아니다. 네 신체에서 흘러나오는 마나 파동을 감지해서, 나와의 동기화 여부를 체크하려는 마킹 스캐너였어.”
은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이…… 이미 눈치를 채고 있는 건가요?”
“확증은 없으니 사람을 보내 간을 보는 중이겠지. 네가 마나 고갈로 쓰러지지 않고 멀쩡히 서서 그것도 수석 보좌관급 업무를 처리하고 있으니, 한재석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테니까.”
진혁이 책상 서랍을 열어 붉은 빛을 띠는 마나 차단 칩 하나를 꺼내 은서의 앞에 툭 던졌다.
“그들이 결코 해선 안 될 도발을 걸어올 때를 대비해야 해. 한재석은 비열한 놈이야. 네가 궁지에 몰리면 가문의 마나 처방 장부나 생명력 약화 저주를 빌미로 네 커리어를 통째로 매장하려 들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미끼를 던진다.”
“미끼요?”
“그래. 네가 가문의 지시를 받아 태산의 핵심 기술을 빼돌리려는 것처럼 위장하는 거지. 그들이 물 수밖에 없는 아주 달콤하고 치명적인 가짜 정보.”
진혁의 눈빛은 냉혹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다. 그의 세밀한 대비 전략과 철저한 코칭을 들으며 은서는 가슴 밑바닥에서 묘한 신뢰감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3년 전, 자신을 매몰차게 버렸던 남자가 이제는 자신의 가장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서로의 생존과 이권을 위한 비즈니스 계약일지라도.
그때였다.
쾅-!
본부장실의 방음 문이 무례하게 열리더니, 구두 굽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진혁 씨! 이게 대체 무슨 무례야? 비서가 안에서 손님이 기다린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이런 신입 나부랭이랑 안에서 문까지 걸어 잠그고 뭘 하는 거지?”
태산 전략기획본부의 거물 상속자이자, 강진혁과의 정략결혼 후보로 거론되는 임소윤이었다. 그녀는 명품 트위드 재킷을 걸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치장한 채, 독사 같은 눈빛으로 은서를 쏘아보았다.
임소윤은 들고 있던 수입 찻잔을 가볍게 돌리며 은서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입가에는 조소와 경멸이 가득했다.
“아, 네가 그 유명한 낙하산 한은서 씨구나? 가문에서 버림받다시피 해서 태산에 구걸하러 들어왔다는 그 불쌍한 영혼.”
임소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녀는 은서의 초라한 사원증을 힐끗 보며 콧방귀를 꼈다.
“주제 파악을 좀 해야지. 진혁 씨와 나는 곧 양가 어른들 모시고 정식으로 약혼할 사이야. 감히 네까짓 게 비즈니스 보좌관이라는 그럴듯한 명함을 달고 진혁 씨 옆자리를 맴돌다니, 가당치도 않아. 꼬리 칠 곳을 보고 쳐야지, 안 그래?”
표독스러운 언어의 파편들이 은서의 가슴에 날카롭게 박혔다. 평소의 은서라면 상대의 호의를 믿지 않는 차가운 벽을 세우고 독설로 맞대응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의 머릿속은 진혁이 방금 제시한 ‘미끼’ 전략으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임소윤은 완벽한 미끼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한재석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태산의 내부 정보를 탐내는 인물이었으니까.
은서는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오히려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는 굽신거리며 잔뜩 겁먹은 신입 사원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임 본부장님. 제가 미처 생각이 짧았습니다. 팀장님과는 정말 업무적인 인수인계만 나누고 있었습니다.”
은서는 비굴할 정도로 몸을 낮추며, 책상 한구석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그리고 임소윤이 쉽게 훔쳐 갈 수 있는 위치에 자신이 들고 있던 ‘메인 드래프트 유출용 마나 합치 서류’의 사본을 슬쩍 배치했다.
그 동작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은서는 서류를 내려놓는 찰나, 자신의 소매 밑단에 숨겨두었던 아주 미세한 가루를 서류 겉면에 털어 넣었다. 그것은 마나 역추적을 위한 무의식적 표식인 '미세 형광 입자'였다. 상대방의 마력 반응과 결합하면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는 태산의 비밀 물질이었다.
임소윤은 은서의 굴종하는 태도에 기분이 좋아진 듯, 잔을 돌리던 손을 멈추고 은서가 내려놓은 서류로 슬그머니 시선을 던졌다. 서류 표지에 선명하게 박힌 '태산 핵심 마나 하이브리드 경제 기획 초안'이라는 붉은색 대외비 도장이 그녀의 탐욕스러운 눈동자에 비쳤다.
‘이거였군. 한재석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기획안이.’
임소윤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그녀는 은서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 서류를 자신의 명품 백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은서는 그 모든 과정을 모르는 척 눈을 감아주며 입술을 깨물었다. 걸려들었다. 비열한 도둑질의 덜미를 잡을 완벽한 덫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임소윤은 서류를 챙기자마자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은서를 흘겨보았다.
“알면 됐어.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낼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 진혁 씨, 나 오늘 저녁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서 기다릴 테니까 늦지 마요.”
임소윤이 문서를 복사 유출할 수 있는 구도를 완벽하게 확보한 채, 콧대를 높이며 도도하게 팀장실을 나섰다.
샤아아-.
그녀가 나가는 순간, 진혁의 시선이 은서의 심장가로 향했다.
진혁의 특수한 망막에만 보이는 푸른빛 선율의 너머로, 은서의 가녀린 가슴가에 연분홍빛 연기 같은 실루엣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계약의 부작용이자 진실을 폭로하는 ‘영혼의 잔상’이었다.
연분홍빛 연기는 질투와 불안, 그리고 미묘한 독점욕의 형상을 띠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말로는 쿨한 척 비즈니스라고 외치면서도, 임소윤이 진혁과의 정략결혼을 언급할 때 은서의 내면이 얼마나 심하게 흔들렸는지가 고스란히 시각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진혁은 그 연분홍빛 잔상을 오직 자신만의 망막으로 포착하며,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대견함과 깊은 만족감을 숨기며, 그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비즈니스 파트너치고는 꽤 뜨거운 감정이 흘러나오는군, 한 보좌관.”
은서는 깜짝 놀라 제 가슴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얼굴을 붉혔다.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계획대로 미끼를 던졌을 뿐입니다.”
“그래, 아주 영리하게 잘했어.”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서에게 다가왔다. 그의 큰 그림자가 은서를 완전히 덮었다.
그때였다. 문이 다시 열리며, 아직 퇴근하지 않고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소윤이 팀원들이 가득한 마케팅팀 사무실 한가운데서 큰 소리로 외쳤다.
“어머, 한은서 씨? 마침 잘 됐네. 나 목이 많이 마른데, 저기 아래층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만 사다 줄래요? 시럽은 정확히 두 펌프만 넣어서. 신입 사원이면 이런 심부름 정도는 기본이잖아?”
순간, 열린 문 사이로 전 사원들의 시선이 은서에게 집중되었다. 임소윤이 대놓고 신입 사원인 은서에게 군기를 잡으며 굴욕을 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민우진이 안절부절못하며 은서의 눈치를 보았고, 다른 직원들은 숨을 죽였다.
은서가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텁-.
진혁이 전 사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은서의 가녀린 손목을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움켜잡았다. 그의 손길은 거칠지 않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다.
진혁은 은서의 손목을 잡은 채, 임소윤이 들고 있던 수입 찻잔을 직접 뺏어 들었다. 그리고 사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 차를 한 모금 들이박듯 마셔버린 뒤, 차가운 눈빛으로 임소윤을 응시했다.
“임 본부장.”
진혁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사무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내 보좌관은 나와 일하는 것만으로 잠잘 시간도 없는 VIP 몸입니다. 태산의 핵심 신사업 기획을 단독으로 처리하는 인력을, 고작 커피 심부름 따위에 낭비할 여유는 내 팀에 없습니다.”
사무실 안의 직원들이 경악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팀장이 신입 사원을 이토록 공공연하게 비호하고 나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임소윤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진혁은 은서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를 이끌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한 보좌관, 오늘 업무는 여기까지 하지. 퇴근해.”
완벽하고 통쾌한 사이다 반격이었다. 전 사원들이 보는 앞에서 임소윤의 콧대를 완전히 뭉개버린 진혁은, 은서를 데리고 당당하게 복도를 빠져나갔다. 은서는 진혁의 단단한 손길에 이끌려 걸어가며, 가슴속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이 멀어져 가는 순간, 서로의 맞닿은 손끝 사이로 미세한 금빛 스파크가 파르르 튀어 올랐다. 생명 동기화 계약이 완벽하게 구동되며 흘러나온 마나의 잔상이었다.
임소윤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손끝에 남은 그 금빛 스파크를 질투로 불타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부르르 떨리며 들고 있던 가방끈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자신의 자존심과 소유욕이 한은서라는 보잘것없는 여자에게 철저히 짓밟혔다는 굴욕감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임소윤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단축 번호를 눌러 한재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두 번도 가기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오빠.”
임소윤의 목소리는 낮고 음산하게 읊조려졌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독기가 가득 차 있었다.
“당장 그 가시나 마나 처방 장부 가져와 봐. 숨통을 쥐지 않고선 못 참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