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기억해. 앞으로 밤에는 철저히 내 소유가 되는 거다, 한은서.”

귓가를 짓누르던 강진혁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끈질기게 귓가를 맴돌았다. 그의 단단한 손가락이 가녀린 턱끝을 쥐어 올리던 그 오싹하면서도 뜨거웠던 감각. 그 일방적인 선언이 남긴 파문은 은서의 가슴속 깊은 곳에 붉고 푸른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거울 속의 은서는 낯설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 가문의 혈통적 저주인 ‘백야의 형벌’로 인해 매일 아침마다 온몸의 뼈마디가 바스러질 것처럼 시리고, 안색이 흙빛으로 가라앉던 과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진혁과의 ‘생명 동기화 계약’ 서약서에 지장을 찍은 직후 전신 혈관을 매끄럽게 타고 흐르던 금빛 마나 버프는 여전히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심장 격벽이 단단하게 재구성된 덕분에 호흡은 한결 깊어졌고, 머릿속은 투명한 얼음잔처럼 맑았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태산 이노베이션의 그 거대한 지상 45층 스마트 빌딩을 올려다보는 은서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재킷 깃을 단정하게 다듬었다. 이제부터는 진짜 비즈니스였다.

태산 이노베이션 15층 마케팅팀 사무실.

오전 8시 50분, 정식 출근 시간 직전의 사무실은 이미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서가 자동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파티션 너머로 수십 개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전날 면접장에서 쓰러졌던 신입 지원자가 하루 만에, 그것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초고속 인사 발령의 주인공이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사내 인트라넷에 게시된 공고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인사 발령: 마케팅 1팀 신입 사원 한은서, 팀장 직속 특별 보좌관(Special Assistant) 임명.]

대기업 자회사의 신입 사원이 입사하자마자 팀장 직속 보좌관이라는 타이틀을 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의 특혜이자, 팀장인 강진혁의 독단적인 선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인사였다.

“어머, 저 사람 맞지? 어제 면접장에서 쓰러졌다던 그 지원자.” “말도 안 돼. 신입이 어떻게 오자마자 특별 보좌관 자리를 꿰차? 백이 얼마나 든든하길래 저래?”

귓가를 스치는 선배 인턴들과 대리들의 수군거림이 가시 돋친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은서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곧게 치켜세우고 도도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명패가 놓인 책상으로 향했다. 기획 마케팅 1팀의 가장 중심부, 강진혁의 팀장실 바로 맞은편에 배치된 자리였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순간, 등 뒤에서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구두 굽 소리도 없이 다가온 사내. 강진혁이었다.

은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핏이 맞춘 다크 네이비 슈트 차림의 진혁은 어제보다 더 차갑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은서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찰나, 은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지난밤 그의 집무실에서 나누었던 그 신체 접촉의 오싹한 온기, 그리고 은서의 목덜미를 휘감아 돌던 푸른 영혼의 잔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진혁의 시선이 아주 잠깐, 은서의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 흘러갔다. 은서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노트북 화면으로 돌렸다.

진혁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서류 한 뭉치를 은서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오늘 오후 2시까지 신사업 마케팅 메인 드래프트 초안 정리해서 내 방으로 가져와요, 한은서 씨. 특별 보좌관이라는 이름값을 할 수 있을지 검증하는 첫 시간이니까.”

“...네, 팀장님. 기한 내에 완벽하게 준비해 두겠습니다.”

은서는 비즈니스 톤으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진혁은 대답 대신 짧은 시선을 남긴 채 팀장실로 걸어 들어갔고, 굳게 닫힌 유리문 너머로 그의 차가운 실루엣이 보였다.

긴장이 풀리며 은서가 펜을 규칙적으로 톡, 톡, 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불안할 때마다 나오는 오랜 습관이었다. 목걸이 안쪽에 숨겨진 가문의 유품, ‘푸른 펜던트’를 옷 위로 가만히 움켜쥐었다. 여전히 차갑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이 펜던트가 지닌 수수께끼를 풀고 가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 그녀의 최종 목표였다.

“와, 진짜 아침부터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옆자리에서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케팅팀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은서의 유일한 동기인 민우진이었다. 우진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주머니에서 차가운 비타민 음료 한 병을 꺼내 은서의 책상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은서 씨, 이거 마셔요. 안색은 어제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데, 팀장님 기에 눌려서 쓰러지는 거 아닌가 걱정했잖아.”

“고마워요, 우진 씨. 덕분에 살았네요.”

은서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음료를 받아들었다. 우진은 안도했다는 듯 유쾌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근데 진짜 대단해요. 특별 보좌관이라니. 지금 팀 내에서 시샘하는 눈초리들 장난 아닌 거 알죠? 특히 저기 기획팀 선배 인턴들, 아침부터 은서 씨 뒷담화 하느라 입이 쉬질 않더라고요. 너무 신경 쓰진 마요. 내가 옆에서 방패막이 확실히 해줄 테니까.”

“든든하네요. 우진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실제로 우진의 다정한 격려는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은서는 알고 있었다. 이곳은 전쟁터였고, 스스로 증명해 내지 못한다면 진혁의 비호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때, 마케팅팀 입구 쪽이 조금 어수선해졌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커다란 축하 화분을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은서는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한재석.

은서의 사촌 오빠이자 가문의 유력한 승계 예정자인 그가 보낸 교활한 비서, 김 실장이었다.

김 실장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은서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한은서 씨, 대기업 입사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재석 본부장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축하 화분입니다.”

그가 내민 화분은 화려했지만, 은서의 눈에는 그 화분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하고 끈적한 마나의 파동이 고스란히 보였다. 마나 버프가 활성화된 덕분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상의 흐름이 선명하게 인지되고 있었다.

김 실장은 화분을 은서의 책상 옆에 내려놓으며, 아주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 가문을 위해 좋은 정보를 많이 전달해 주셔야지요, 은서 씨.”

그가 속삭이는 순간, 그의 손끝이 은서의 책상 밑으로 슥 들어갔다. 그리고 은서가 신고 있던 가죽 수제 구두의 뒤꿈치 굽 틈새를 스치듯 지나갔다.

툭.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은서의 발목 끝에서부터 기분 나쁜 한기가 타고 올라왔다.

‘...이건?!’

은서는 본능적으로 발을 뒤로 뺐다. 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마나 시야를 통해 바라본 그녀의 오른쪽 구두 굽 틈새에는 검은색 연기처럼 끈적거리는 마법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한재석이 즐겨 쓰는 비열한 고대 마법, ‘흑색 추적 마킹’이었다.

이 마킹이 새겨진 이상, 은서의 일거수일투족과 그녀가 이동하는 동선은 고스란히 한재석의 추적 안테나에 실시간으로 전송될 터였다. 가문이 그녀의 목줄을 쥐고 흔들겠다는 노골적인 경고였다.

김 실장은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비열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그가 유유히 마케팅팀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은서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분노로 인해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가문의 착취에 무기력하게 당하던 과거의 한은서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몸 안에는 강진혁과의 계약으로 얻은 강력한 생명 마나 버프가 가득 차 있었다. 머릿속의 인지 능력이 극대화되며, 주변 사물들의 마나 흐름이 입체적인 격자 구조로 뇌리에 그려졌다.

‘감히 내 구두에 이딴 짓을 해?’

은서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서류 몇 장을 손에 쥔 채, 자연스럽게 복도로 걸어 나갔다. 복도 한구석에는 태산 이노베이션의 철저한 보안을 위해 설치된 대형 ‘마나 결계 필터링 장치’가 작동하고 있었다. 사내의 유해한 마나 파동이나 도청용 마법을 걸러내는 고성능 파동 정화 장치였다.

은서는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는 척하며 필터링 장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나의 흐름을 집중시켰다. 몸 안의 금빛 마나를 오른쪽 발끝으로 부드럽게 밀어 보냈다. 구두 굽에 엉겨 붙어 있던 흑색 추적 마킹의 기분 나쁜 어둠이 금빛 마나에 밀려 요동치기 시작했다.

‘역추적 차단.’

은서는 정확한 타이밍에 오른쪽 구두 굽을 마나 결계 필터링 장치의 핵심 접지부에 가볍게 갖다 대었다.

파지직!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푸른 스파크가 은서의 구두 굽과 기계 사이에서 튀었다.

그 순간, 은서의 발끝에 맺혀 있던 흑색 마킹의 파동이 필터링 장치의 강력한 정화 마나와 충돌하며, 은서가 흘려보낸 증폭된 역주파수를 타고 왔던 경로를 따라 거꾸로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태산 사옥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한씨 가문의 비밀 아지트.

은서의 동선을 감시하기 위해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던 한재석의 추적 안테나 장비가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펑! 하는 소리를 내며 시커먼 연기를 뿜어냈다.

“악! 내 눈!”

장비를 조작하던 가문의 마법 기술자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고, 그 옆에서 보고를 받던 한재석은 깜짝 놀라 손가락을 튕기던 동작을 멈추었다. 화면은 완전히 깨진 채 붉은색 경고등만 깜빡이고 있었다. 기습적인 역주파수 과부하 타격으로 인해 추적 장치 자체가 완전히 불타버린 것이었다.

“...한은서, 이년이 감히?”

한재석의 잘생긴 얼굴이 분노로 흉하게 일그러졌다.

같은 시각, 태산 이노베이션 복도.

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두 끝을 툭툭 털며 정수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가슴속이 뻥 뚫리는 듯한 통쾌함이 몰려왔다. 가문의 비열한 감시망을 제 손으로 완벽하게 파괴해 버린 첫 번째 유효 반격이었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을 즐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날카로운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마케팅 1팀의 선배 인턴들과 계약직 대리들이 모여 은서의 드래프트 기획안 수석 제출 건에 대해 노골적으로 험담을 나누고 있었다.

“솔직히 어이없지 않아? 우리가 밤새우며 리서치한 자료는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낙하산 신입 기획안은 특별 보좌관이라는 타이틀 달아주자마자 바로 상신 대기라니.” “말이 좋아 특별 보좌관이지, 팀장님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게 분명해. 어제 의무실에서도 둘이 한참 같이 있었다며?” “실력도 검증 안 된 낙하산 주제에, 회사 망치려고 작정했나 봐.”

그들의 비아냥거림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은서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몰려왔다.

언제 다가왔는지, 강진혁이 은서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혁은 은서를 지나쳐 회의실 문을 거칠게 밀어젖혔다.

콰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험담을 나누던 직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팀, 팀장님...!”

진혁은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태블릿과 인쇄된 기획안 서류 뭉치를 회의 테이블 한가운데로 날려 던졌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서류들이 테이블 위로 흐트러졌다. 그것은 은서가 마나 버프를 활용해 단 몇 시간 만에 작성해 낸 ‘태산 신사업 마케팅 메인 드래프트’ 최종안이었다.

“실력 검증?”

진혁이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회의실 안의 직원들을 하나씩 꿰뚫듯이 훑었다.

“거기, 이 대리. 자기가 지난주에 제출한 기획안 리포트랑 한은서 보좌관이 제출한 이 드래프트 비교해 봐.”

“예? 그, 그게...”

“한은서 보좌관이 작성한 기획안은 태산의 타깃 마켓 분석부터 경쟁사 특허 회피 전략, 그리고 마나 하이브리드 입자 기술의 실시간 컨설팅 데이터를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완벽하게 반영해 놨어. 심지어 고유 결재 마나 각인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박혀 있지.”

진혁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자신들이 일주일 동안 야근하며 만든 리포트가, 한 보좌관이 단 세 시간 만에 뽑아낸 이 초안의 반 절짜리 퀄리티라도 따라간다고 생각하나? 리소스 낭비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겁니다.”

회의실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은서의 기획안을 힐끗 훔쳐본 직원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렸다. 은서의 천재적인 인지 능력과 완벽한 마력 제어로 작성된 기획안은, 감히 트집을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완벽한 수작이었기 때문이었다.

낙하산이라는 비아냥을 실력 하나로 단박에 뭉개버리는, 완벽하고 짜릿한 신분 반전의 순간이었다.

“한 번만 더 내 팀에서 실력 외의 잡음이 들리면, 그 즉시 인사팀에 대기발령 조치 요청하겠습니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서 본인 KPI나 채우세요.”

진혁의 서슬 퍼런 경고에 직원들은 허겁지겁 서류를 챙겨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은서를 향해 쏟아지던 시샘의 시선들은 어느새 경외와 두려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두가 빠져나간 회의실.

은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기획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슴속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계약이었을 뿐인데, 진혁이 보여준 철저한 비호와 실력의 증명은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그때, 회의실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한 남자가 은서의 시선에 걸렸다.

김 실장이었다. 그는 화분 배달을 핑계로 사내에 남아, 가문의 안테나가 파괴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은서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뱀 같은 눈으로 은서를 쏘아보며, 품속에 숨겨둔 마나 감지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은서의 약점을 잡아 가문으로 복귀하려는 심산이었다.

샤악-.

진혁이 천천히 걸어가 김 실장의 앞을 완전히 가로막아 섰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김 실장의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진혁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가운뎃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듯 차갑게 웃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맹수를 바라보는 사냥꾼과 같은 잔혹함이 서려 있었다.

“내 보좌관 구두창까지 간섭하려는 개들이 있는 것 같군.”

진혁의 낮고 위협적인 선언이 회의실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김 실장의 턱밑에 비수처럼 박혔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