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 마나가 고프면서, 대체 무슨 염치로 내 눈앞에 다시 기어 나타난 거야, 한은서?”
귓가를 찢고 들어오던 낮고 거친 음성이 환청처럼 맴돌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정체 모를 은색 금속 천장이었다.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미광과 함께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소독약 냄새, 그리고 정제된 특수 마나의 서늘한 향기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태산 이노베이션 본사 35층에 위치한 VIP 의무실이었다.
은서는 신음하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왼쪽 손등을 찌르는 뾰족한 통증과 함께 전신을 짓누르는 묵직한 탈력감이 그녀를 다시 침대 시트 위로 주저앉혔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아직 마나 그리드가 반도 채워지지 않았으니까.”
침대 머리맡,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구석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서는 고개를 돌렸다. 링거 거치대에 걸린 수액 팩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진혁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사이로 흐트러진 몇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었고, 평소의 빈틈없는 슈트 차림이었지만 셔츠 깃은 살짝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은서의 창백한 얼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호흡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은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려 했으나, 진혁의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턱끝을 부드러우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고정했다.
“팀장님…….”
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새어 나왔다.
“회사 안이다. 사적인 호칭은 삼가지.”
진혁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은서의 턱을 쥔 그의 손가락 끝은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그 상반된 온도가 은서의 가슴속을 어지럽혔다.
심장의 격벽이 얄팍해져 서서히 생명력이 공기 중으로 비산하는 통증, 가문의 고질적인 저주인 ‘백야의 형벌’이 다시금 가슴을 죄어오고 있었다. 은서는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턱관절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비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가문을 뛰쳐나와 내 힘으로 온전히 서겠다고 다짐한 첫날부터, 결국 가장 보이기 싫었던 이 남자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불안할 때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버릇이 도졌다. 은서는 이불자락을 쥔 손끝을 바르르 떨며 손톱으로 마른 시트를 긁어내렸다.
그때였다. 진혁의 시선이 은서의 쇄골 부근, 심장이 박동하는 위치로 향했다.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자, 은서의 가슴팍에서 아지랑이처럼 검푸른색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은서의 심장에 남겨진 은밀한 감정의 실루엣, 즉 ‘영혼의 잔상’이었다. 진혁을 마주하며 느끼는 두려움, 미련, 그리고 살고 싶다는 비참한 갈망이 푸른빛 선율이 되어 진혁의 넓은 어깨와 목덜미를 스치듯 감싸 안았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제 어깨를 감싸는 푸른 연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거칠게 손을 휘저어 그것을 흩뜨려 버렸다.
“여전하군. 속으로는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고 있으면서, 눈빛은 독사처럼 뜨고 있어.”
“이거…… 놓으시죠, 강진혁 팀장님.”
은서가 턱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진혁은 악력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순도 높은 생명 마나가 은서의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순간,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 오던 심장의 격벽이 거짓말처럼 진정되며 온몸에 따스한 온기가 돌았다.
치욕스러웠다. 이 남자의 마나가 없으면 단 하루도 온전히 버틸 수 없는 스스로의 신체가, 그리고 그 마법 같은 안도감에 순간적으로 긴장을 풀어버린 제 나약함이 뼛속까지 시렸다.
“놓으면? 이대로 의무실 문을 열고 나가서 네 사촌 오빠 한재석의 사냥개들에게 목덜미를 잡힐 건가?”
진혁이 낮게 읊조렸다.
“아니면 빌딩 모퉁이에서 마나가 통째로 바스러져 먼지처럼 사라질 건가? 네 그 얄량한 자존심이 목숨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한은서.”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가문의 일에 태산 이노베이션이 참견할 이유는 없을 텐데요.”
“착각하지 마.”
진혁이 상체를 일으키며 은서의 턱을 놓아주었다. 그는 재석이 보낸 사내 정찰꾼들의 동태를 파악하듯 태블릿 화면을 대충 훑어본 뒤, 재킷 안주머니에서 빳빳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은서의 무릎 위로 툭 던졌다.
금박의 마법 인장이 붉게 빛나는 서류였다. 종이 상단에는 날카로운 필체로 적힌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Business Night Act — 생명 동기화 비밀 계약서]
은서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건…….”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백업 플랜이자, 나한테 제공할 수 있는 마지막 가치다.”
진혁이 침대 옆 철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다리를 꼬아 올린 그의 자세는 완벽한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서경 한씨 가문은 대대로 태산의 마나 제어 기술을 노려왔지. 네 사촌 오빠 한재석이 널 마케팅팀에 밀어 넣은 것도 그 연장선상일 테고. 내 말이 틀렸나?”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한재석이 저를 도구로 삼아 태산의 기술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문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독립하고 싶었다. 가문의 착취적인 저주에서 벗어나, 온전히 제 실력으로 이 사회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넌 가문의 스파이로 낙인찍혀 소리 소문 없이 제거되거나, 아니면 내 밑에서 일하며 가문의 동태를 보고하는 이중 스파이가 되는 거다. 물론, 그 대가로 난 네 무너진 마나 격벽을 유지할 수 있는 생명력을 제공하지.”
진혁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철저한 비즈니스 딜이었다.
“매일 밤 내 침실에서 내 마나를 이식받아라. 물리적 접촉을 통한 동기화. 그것만이 네 ‘백야의 형벌’을 잠재울 유일한 방법이니까.”
“동침이라니…… 조건이 너무 가혹하잖아.”
은서가 서류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가혹하다고?”
진혁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은서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오해는 하지 마. 내 마나를 네 얄팍한 심장 격벽에 주입하기 위한 기술적 접촉일 뿐이니까. 밤마다 네 숨통을 틔워주는 대가로, 넌 낮 동안 내 특별 보좌관으로서 완벽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 돼. 가문에서 널 데려가지 못하도록 태산의 이름으로 널 비호해 주는 것도 이 계약서에 포함되어 있지.”
은서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손익을 계산했다.
이 계약을 거절한다면 당장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한재석의 감시망에 걸려 다시 가문의 지하실로 끌려가 평생 마나를 착취당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계약에 서명한다면, 비록 진혁의 곁에 묶이게 될지언정 태산 이노베이션이라는 거대한 우산 아래에서 제 커리어를 쌓고 독립적인 힘을 기를 수 있다.
비즈니스. 그래, 이것은 철저한 비즈니스다. 과거의 감정 따위는 섞이지 않은, 생존을 위한 거래일 뿐이다.
“좋아.”
은서가 고개를 들어 진혁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회피하고 도망치려던 예전의 습관을 억누르며, 그녀는 한 글자씩 힘주어 말했다.
“계약하지. 대신 회사에서는 철저히 상사와 부하 직원일 것. 사적인 감정이나 과거의 일로 내 업무를 흔들지 마.”
“바라던 바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만년필을 내밀려다 말고, 은서의 하얀 손을 덥석 쥐었다.
그의 거친 손가락이 은서의 부드러운 손끝을 쓸어내렸다. 손끝이 닿는 순간, 은서의 손등 위로 다시 한번 검푸른색 마나의 잔상이 찌르르하고 소름 돋게 피어올랐다. 진혁을 향한 원망과, 그럼에도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였다.
진혁은 그 잔상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은서의 검지손가락 끝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앗……!”
은서가 손을 빼려 했으나 진혁의 손아귀는 단단했다. 가벼운 통증과 함께 은서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배어 나왔다. 진혁은 그 피를 제 입술로 머금으며, 계약서 하단에 은서의 지장을 강하게 찍어 눌렀다.
붉은색 마나 인장이 계약서 위에서 파르르 떨리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 찰나, 은서의 정신이 아득해지며 마나의 흐름을 타고 진혁의 무의식 혹은 그의 집무실 내부가 일순간 뇌리에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태산 이노베이션 43층, 진혁의 개인 집무실. 그곳 한구석에 놓인 무거운 마나 결계가 걸린 개인 비밀 금고가 보였다. 그리고 그 비밀 금고의 가장 깊숙한 서랍 안, 기묘하게 붉은색 마나 실로 무겁게 칭칭 감겨 봉인된 편지 한 통이 비쳐 보였다.
그것은 3년 전, 은서가 그를 떠나며 남겨두었던 이별 편지였다. 단 한 번도 뜯기지 않은 채, 진혁의 깊은 애증과 마나에 의해 밀봉된 채 보관되어 있는 편지.
‘아직도…… 저걸 가지고 있는 건가?’
은서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 환영 같은 감각은 서약의 완성과 함께 순식간에 안개처럼 사라졌다.
지장을 찍자마자, 은서의 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된 금빛 마나 버프가 그녀의 전신 혈관을 매끄럽게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늘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겁고 시리던 온몸의 뼈마디가 가벼워졌다. 심장 격벽이 마치 강철로 보강된 듯 단단하게 재구성되는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이 투명할 정도로 맑아지며, 사물의 윤곽이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인지되었다.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고, 초인적인 활력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감각이었다.
생명 동기화 버프의 각성.
은서는 더 이상 가문의 저주에 비틀거리던 유약한 환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볍게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을 디뎠다. 다리에 힘이 넘쳤다. 안색에는 장미빛 생기가 돌았고, 눈동자는 단단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은서는 흐트러진 셔츠 깃을 단정하게 정돈하고, 구겨진 스커트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진혁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계약은 성립되었습니다, 강진혁 팀장님. 이제부터 전 팀장님 직속 특별 보좌관으로서 귀사에 헌신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완벽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태도였다.
진혁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은서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은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은서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진혁은 다시 한번 은서의 가녀린 턱끝을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손길로 쥐어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혔다.
“기억해. 앞으로 밤에는 철저히 내 소유가 되는 거다, 한은서.”
귓가를 울리는 그의 선언과 함께, 은서의 심장부에서 피어오른 붉고 푸른 영혼의 잔상이 두 사람의 몸을 옭아매듯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