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역장 출구의 계단은 썩은 이빨처럼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다.

뒤틀린 붉은 밤하늘 아래로, 강림한 거대한 열차가 내뿜는 열기가 지면을 축축하게 적셨다. 쇠가 타들어 가는 비린내가 콧등을 찔렀고, 공중에 매달린 검은 실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낮게 웅웅거렸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오른팔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화염 괴이를 처치하며 치른 대가였다.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팔을 늘어뜨린 채, 윤우는 계단 끝자락에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질척한 점착음이 들려왔다.

“거기까지다, 한윤우.”

그림자 속에서 스르륵 솟아오른 형체들이 톱니바퀴처럼 윤우의 사방을 에워쌌다. 도철민이 보낸 최정예 암살 부대였다. 방수포를 뒤집어쓴 채 녹슨 단도와 영기(靈氣)가 서린 쇠사슬을 쥔 사내들의 눈빛에는 살기가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그들의 발밑으로 기이한 붉은 문양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며 윤우의 그림자를 단단히 붙들었다.

“상류 기지 통행증을 넘겨라. 그걸 가지고 기차에 타면 살려줄 줄 알았나? 도철민 대장님이 네놈의 목줄을 쥐고 계신다.”

사내들의 손에 들린 화승총 형태의 주물 무기들이 일제히 붉은 화염을 머금었다. 공기가 바싹 타들어 가며 숨이 턱 막히는 고열이 뺨을 스쳤다.

윤우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오른팔의 마비된 신경 너머로, 2화에서 목격했던 뒤틀린 지형 속 열차의 기억이 스쳤다. 당시 기차역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무쇠 기차는 기괴할 정도로 뜨거운 영적 열기를 비축하고 있었다. 지금 저 눈앞의 열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지독한 열기는 기이의 심장이자, 동시에 그들의 살점을 태워버릴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윤우의 품속에서 가죽 장부가 스스로 펄럭였다. 붉은 잉크가 백지 위로 잉어처럼 번져나갔다.

[거래 제안: ‘망령의 환승 열차’가 품은 영적 열기를 무력화할 극한의 한기를 청구합니다.] [대가 지불: 왼쪽 청각의 30% 영구 상실.]

왼쪽 귀에서 삐이익 하는 고주파 소음과 함께 물이 차오르는 듯 둔탁한 감각이 들어찼다. 왼쪽 세계의 소리가 절반쯤 뒤로 밀려나는 순간, 윤우의 발끝에서부터 시퍼런 서리가 해일처럼 뻗어 나갔다.

“무슨……!”

암살자들이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이었다. 그들이 뿜어내려던 영적 화염이 윤우가 불러낸 절대적인 한기에 가로막혀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붉은 불꽃이 투명한 얼음 결정 속에 갇혀 괴상한 침묵을 지켰다. 물리적인 화력의 흐름이 장부의 한기 장벽에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쩌적, 쩌적.

서리는 멈추지 않고 암살자들이 깔아둔 붉은 문양의 덫을 타고 역류했다. 그들이 윤우를 묶기 위해 준비했던 영적 쇠사슬이 오히려 서리의 인도자가 되어 그들의 손목과 발목을 옥죄었다.

“끄아악! 손, 손이……!”

“움직이지 마라! 쇠사슬이 살가죽에 붙었다!”

어둠 속에서 비명이 터졌다. 암살자들이 친 덫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되돌아가, 스스로를 지면에 고정하는 단단한 족쇄가 되었다. 살점이 얼어붙은 쇠사슬에 달라붙어 뜯겨 나가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윤우는 아주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사박, 사박. 얼어붙은 지면을 밟는 그의 군화 소리는 기괴할 정도로 차분했다.

“살려…… 끄윽, 으아아!”

리더로 보이는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서리가 그의 정강이를 타고 올라가 무릎뼈를 으스러뜨리고 있었다. 뼈가 바스러지는 둔탁한 소음이 고요한 역장에 퍼졌지만, 윤우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감정 신경이 완벽히 거세된 소년의 얼굴이었다. 윤우는 부러진 인형을 보듯 사내를 내려다보며, 품에서 장부를 꺼내 손에 쥐었다.

“가옥의 위치를 말해.”

“미쳤나……! 내가 불 줄 알고…… 컥!”

윤우는 사내의 가슴팍에 구두 굽을 얹고 서서히 무게를 실었다. 갈비뼈가 삐걱거리며 숨이 막히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윤우의 표정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의 단단함을 시험하는 학자 같았다.

“도철민이 있는 가옥. 그리고 그 방벽의 작동 원리.”

“으, 으윽…… 말하면, 살려주는 거냐?”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윤우가 발끝에 힘을 더 주자, 사내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사방을 둘러싸고 옭아매진 다른 암살자들은 그 잔혹하고도 무감각한 광경에 압도되어 이빨을 딱딱 마주쳤다. 인간의 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존재야말로 이 이계의 괴물들보다 더 끔찍한 법이었다.

“가, 가옥은…… 역 광장 서쪽 상가 지하에 있다……!”

사내가 피를 흘리며 헐떡였다.

“방벽은…… 방벽은 흐느끼는 자들의 살점과 영혼으로 돌린다……! 매일 밤 수확한 일반 생존자들을 지하 보일러실에 밀어 넣고, 그들의 생명력을 정제해서 장막을 치는 거다……! 도철민 그 개새끼가 우릴 방패막이로 삼아 안전을 사는 거라고!”

윤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인간의 영적 희생을 담보로 구동되는 방벽. 합리적 방관 협의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단 자들이 뒤에서 벌이고 있는 참혹한 인신 처단 메커니즘의 실체였다. 남들을 미끼로 던지는 것을 넘어, 아예 연료로 삼아 자신들의 안락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

윤우는 발을 뗐다. 사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숨을 몰아쉬었지만, 윤우는 이미 장부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거래 완료: 암살자들의 신체 제어권을 일시적으로 매입합니다.] [대가 지불: 온기 상실 영역 소폭 확대.]

왼쪽 어깨마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하지만 윤우의 손끝은 정교하게 움직였다. 서리에 묶여 있던 암살자 다섯 명의 몸이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제멋대로 일어섰다. 그들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가자.”

윤우의 나직한 명령에, 자객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에서는 소리 없는 비명과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육체는 오직 윤우의 장부가 지시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였다.

***

역 광장 서쪽, 무너진 상가 건물의 지하 입구는 거대한 무쇠 쇠창살로 가로막혀 있었다.

쇠창살 너머에서는 푸르스름한 영적 방벽이 은은하게 빛나며 외부의 기이들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 방벽의 틈새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것은 향긋한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산 채로 타들어 간 인간들의 살 타는 냄새와,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의 끈적한 곡소리였다.

철컥. 철컥.

무거운 발소리가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쇠창살 안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협의회의 경비병들이 황급히 횃불을 치켜들었다.

“누구냐! 정지해라!”

횃불의 붉은 빛이 계단 아래를 비추었다. 그곳에는 온몸이 서리로 뒤덮여 좀비처럼 걸어오는 자신들의 최정예 암살 부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한 무더기의 그림자를 거느린 한윤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 새끼들 상태가 왜 이래? 야! 정신 차려!”

경비병들이 경악하며 쇠창살 너머로 무기를 겨눴다.

윤우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투둑, 콰당!

조종당하던 암살자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들은 쇠창살 바로 앞,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쓰레기더미처럼 던져졌다. 얼어붙은 사지가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파열음을 냈고, 사내들은 억눌렸던 비명을 뒤늦게 토해냈다.

“도철민에게 전해라.”

윤우의 목소리가 지하 통로의 벽을 타고 축축하게 울려 퍼졌다.

“사냥개를 보낼 거면, 이빨이 더 단단한 놈들로 보냈어야지.”

쇠창살 뒤의 경비병들은 윤우의 그 기괴할 정도의 침착함과, 산채로 장난감처럼 다루어진 동료들의 모습에 질려 침을 삼켰다. 이 소년은 협의회의 안방 한복판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그들이 자랑하는 정예를 전리품처럼 던져주며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그때,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쇠창살 뒤편의 두꺼운 강철 문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양옆으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비릿한 피비린내와 썩은 내, 그리고 인간들의 절규가 뒤섞인 뜨거운 열풍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 짝. 짝.

“대단해. 정말 대단해, 한윤우 씨.”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오는 거구의 사내, 도철민이었다. 그의 붉게 충혈된 눈에는 생존을 향한 광기와 탐욕이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뒤편, 그림자가 짙게 깔린 구석방 문 앞에는 서은채가 서 있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 상냥하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지만, 그 눈빛 깊은 곳에는 윤우의 장부를 어떻게든 갈취하겠다는 교활한 악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 가옥의 비밀까지 알아내고, 내 새끼들을 이렇게 장난감처럼 만들어 오다니.”

도철민이 쇠창살 앞으로 다가와 윤우를 내려다보며 비웃음 섞인 환대를 보냈다.

“하지만 말이야. 네가 제 발로 이 지옥의 보일러실 앞까지 걸어 들어왔으니, 이제 네 그 잘난 장부도 우리 것이 되겠군.”

강철 문이 완전히 열리며, 그 너머로 수십 명의 생존자들이 사슬에 묶인 채 기괴한 보일러 장치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참상이 드러났다.

윤우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품속의 장부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온기조차 잃어버린 윤우의 뺨 위로, 보일러가 뿜어내는 열풍이 가려운 마른버짐처럼 버석거리며 내려앉았다. 살가죽이 타들어 가는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으나, 그것은 후각을 자극하기보다 뇌수를 직접 진흙처럼 짓누르는 불쾌감에 가까웠다.

도철민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동굴 같은 지하 통로를 메아리칠 때, 서은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눈가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투명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살짝 숙인 슬픈 표정 아래로, 윤우의 품속 장부를 훑는 눈빛만은 굶주린 독사의 혀처럼 집요하게 넘실거렸다.

“윤우 씨……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저희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 매일 밤 장막을 유지하지 않으면, 저 바깥의 굶주린 것들이 이곳을 통째로 뜯어먹을 테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흐느끼는 듯 애처로웠지만, 본질은 차가운 가스라이팅이었다. 타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소시오패스 특유의 점착질 가득한 위선.

“그리고…… 윤우 씨가 그토록 찾는 동생분 말이에요. ‘한윤아’라고 했던가요? 참 안타깝게도, 그 아이의 이름이 오늘 밤 보일러의 ‘특수 연료’ 명단에 가장 먼저 올라가 있더라고요.”

탁.

윤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감정 결핍으로 차갑게 굳어버린 심장은 뛰지 않았으나,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결벽증적인 집착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갑게 요동쳤다. 윤우의 시선이 보일러실 중앙, 붉은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무쇠 압력솥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연결된 붉은 실이 미치광이의 맥박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품속의 장부가 찢어질 듯 요동치며 윤우의 손가락 끝을 물어뜯었다. 검붉은 피가 새어 나와 새하얀 페이지를 적시며 새로운 문장을 거칠게 써 내려갔다.

[경고: 대상 ‘한윤아’의 영혼이 보일러 연소실 내부에서 소멸하기 직전입니다.] [수지타산 조율: 대상을 구출하기 위해 연료의 등록 정보를 강제로 변경합니다.] [거래 대가 청구: 사용자의 가장 소중한 기억 중 하나—‘동생이 오빠를 보며 처음으로 웃었던 기억’을 영구히 지불하십시오.]

기억의 지불.

윤우의 머릿속에서 따스했던 유년의 한 조각이 모래성처럼 서서히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동생의 얼굴은 기억나지만, 그 아이가 자신을 보며 어떤 표정으로 웃었는지, 그 웃음이 어떤 온기를 담고 있었는지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듯 지워져 갔다. 자아의 박탈이 시작된 것이다.

“하하핫! 표정을 보니 아주 볼만하군!”

도철민이 단도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망설일 시간 없다! 저 새끼를 구속하고 책을 빼앗아라! 저 책만 있으면 이 지옥 같은 밤도 매일 넘길 수 있어!”

그의 부하들이 일제히 쇠창살을 열고 윤우를 향해 덮쳐들려던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구—!

지하 가옥 전체가 거대한 맷돌에 갈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격렬하게 뒤틀렸다. 천장의 시멘트 가루가 비처럼 쏟아졌고, 푸르스름하게 빛나던 방벽이 유리창 깨지듯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단순한 붕괴가 아니었다. 쇠창살 바로 위, 지하 입구를 향해 거대한 무쇠 바퀴가 콘크리트를 짓개며 무자비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망령의 환승 열차’의 앞부분이 지상을 뚫고 지하 가옥의 천장을 통째로 씹어 삼키며 내려앉은 것이다. 수만 개의 사람 얼굴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기괴한 괴철의 덩어리가 붉은 증기를 뿜어내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 괴물의 아가리가 열리는 순간, 보일러실 내부의 압력솥이 열차의 흡입력에 이끌려 역방향으로 통째로 들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비명 섞인 붉은 실이 윤우의 눈앞에서 허공으로 거칠게 솟구쳤다. 동생의 영혼이 열차의 거대한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동시에, 장부의 붉은 글씨가 윤우의 시야를 피처럼 붉게 가로막았다.

[거래 제한 시간 초과 임박. 대가를 즉시 지불하지 않으면, 장부는 거래 취소로 간주하여 사용자의 목숨을 청구합니다.]

윤우는 지워져 가는 동생의 웃음소리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오직 얼음처럼 차가운 장부의 가죽 표지뿐이었다. 이대로 기억을 바치고 동생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이 기괴한 열차의 아가리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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