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구구구구!
무너져 내리는 콘크리트 잔해 사이로 비명이 들려오기도 전에, 세상이 통째로 뒤집혔다. 아가리를 벌린 바닥의 나락 속에서 치솟는 열기는 피부를 구워버릴 듯 뜨거웠다. 그 파멸적인 낙하의 한가운데서 윤우는 몸을 던졌다.
괴이가 피해 간 철문 뒤로, 기형적으로 꼬인 폐쇄 공간 너머 다음 방의 붉은 불빛이 켜진다.
덜컹,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히며 외부의 열기를 차단했다. 밀폐된 어둠 속에서 오직 깜빡이는 붉은 비상등만이 두 사람의 실루엣을 기괴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윤우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쇠파이프가 휘어지고 콘크리트가 짓이겨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가 느껴졌다. 손끝으로 쓸어내려 손가락을 보니 진득한 붉은 피였다.
비릿한 철분 냄새가 입안을 가득 채웠을 텐데도, 이상하게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윤우는 혀끝을 입천장에 대고 굴려보았다. 텁텁한 모래 먼지의 질감만 느껴질 뿐, 피의 짠맛도, 이계 특유의 썩은 이끼 맛도 전혀 인지되지 않았다. 장부가 요구한 대가였다. 조금 전 폭사할 뻔한 위기에서 생존의 길을 열기 위해 장부를 갱신한 순간, 그의 미각 중 일부가 영구히 소실된 것이다.
"……살았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강태현이 바닥을 기었다. 그의 손에는 잔뜩 이가 빠진 소형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태현은 붉은 불빛 아래 드러난 윤우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눈가를 적시고 있는데도, 윤우의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공포도, 안도도 없는 그 부자연스러운 차가움에 태현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너, 진짜 인간 맞나?"
태현이 낮게 읊조렸다.
윤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옷에 묻은 먼지와 핏자국을 결벽증적으로 털어낼 뿐이었다. 그의 온 신경은 품속에 숨겨진 가죽 장부의 미세한 떨림에 집중되어 있었다. 장부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심장처럼 둔탁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아직 수지타산은 맞췄지만, 다음 거래는 더 큰 것을 요구할 터였다.
"일어나지."
윤우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여기 계속 머물면 저 문 너머의 열기에 통째로 쪄 죽을 거다."
두 사람은 기형적으로 꼬인 철골 사잇길을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사방의 철벽이 마치 살아서 꿈틀대는 거대한 뱀의 식도처럼 안쪽으로 굽어 있었다. 붉은 불빛이 벽면에 맺힌 이슬들을 피물방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뚝, 뚝 떨어지는 물소리가 고막을 기분 나쁘게 자극했다.
좁은 통로의 끝에 도달했을 때, 시야가 갑자기 넓어졌다.
그곳은 비틀린 역사(驛舍)였다.
현실 세계의 지하철역을 짜깁기해 놓은 듯한 공간이었지만, 상식은 철저히 파괴되어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선로들은 꽈배기처럼 꼬여 공중에 멈춰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정체불명의 검은 실들이 거미줄처럼 엉켜 지형을 지탱하고 있었다. 승강장 타일 바닥은 군데군데 주저앉아 시커먼 심연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괴한 역사 내부에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새로운 생존자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수십 개의 시선이 윤우와 태현에게 꽂혔다. 그 시선들에는 온기라곤 없었다. 굶주린 짐승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를 경계하는 듯한, 지독하고 끈적한 적의와 의심만이 가득했다.
역사 안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살려줘…… 제발, 다리가 부러졌어……."
구석진 벤치 아래, 한 사내가 피투성이가 된 다리를 움켜쥐고 신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주변에는 넓은 공터가 생겨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곧 괴이를 끌어들일 '시한폭탄'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저리 가! 저쪽으로 가라고!"
한 여자가 다리를 다친 사내에게 돌을 던졌다. 사내의 이마에 돌이 맞아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주변의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합리적 방관 협의회'의 완장을 찬 몇몇 사내들이 그 광경을 차갑게 지켜보며 자신들의 비상식량을 챙기기에 바빴다.
"저 쓸모없는 놈이 소리를 질러서 괴이라도 불러들이면 어쩔 거야? 빨리 저 밑 선로로 던져버려!"
"맞아, 미끼로 쓰기 딱 좋겠네."
윤우는 그 비정한 인간 군상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들의 말바구니 속에 담긴 날 것 그대로의 악의가 공기 중에 떠돌았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을 이정표 삼아 한 걸음 더 생존하려는 본능. 윤우는 그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동정심도, 분노도 일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황폐한 사막과 같았다. 오직 구해야 할 동생 윤아의 얼굴만이 머릿속에서 선명한 판화처럼 박혀 있을 뿐이었다.
그때, 협의회 완장을 찬 거구의 사내가 윤우 일행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이름은 배강석. 도철민의 충직한 사냥개이자, 이 구역에서 약자들을 솎아내는 역할을 맡은 자였다.
"어이, 신참들."
배강석이 이 빠진 쇠파이프를 어깨에 걸치며 이죽거렸다. 그의 몸에서 시큼한 땀내와 썩은 이스트 냄새가 풍겼다.
"이곳에 들어왔으면 통행세를 내야지? 가진 물건 다 내놓고, 몸수색 좀 하자고."
태현이 자기도 모르게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배강석의 뒤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가로막아서자, 태현은 마른 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윤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배강석의 발밑, 그리고 그 너머 어두운 대피선로 모퉁이를 향해 있었다.
"가진 게 없다면 몸으로 때워야지."
배강석이 쇠파이프로 윤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기분 나쁜 타격음이 울렸다.
"마침 저기 3번 승강장 쪽 선로가 안전한지 확인이 필요해. 괴이들이 덫을 놓았는지 아닌지, 너희 중 한 놈이 가서 밟아보고 와라. 거부하면 여기서 바로 선로 아래로 던져버릴 테니까."
주변의 생존자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안도감과, 새로운 제물이 피를 흘릴 때 얻을 관측 정보에 대한 탐욕이 엉켜 있었다. 철저한 방관과 묵인. 이것이 이계의 생존 법칙이었다.
태현이 윤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윤우야, 어쩌지? 저 자식들 진짜로 우릴 밀어 넣을 기세야."
윤우는 가만히 품속에 손을 넣었다. 가죽 장부의 표면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촉각이 무뎌진 손끝이지만, 장부가 전해오는 특유의 영적 한기는 뇌리로 곧바로 타고 올라왔다.
'거래를 시작하지.'
윤우는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장부의 페이지가 머릿속에서 스르륵 넘어가는 환각이 일었다.
[제7 격리 이계 역사 내 '안전지대' 및 '괴이 덫' 정보 매입.] [대가 지불: 왼쪽 어깨의 온기 감각 영구 상실.]
순식간에 왼쪽 어깨부터 팔꿈치까지가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감각이 마비되었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이 방에서, 오직 그의 왼팔만이 영하의 동토에 버려진 듯한 이질적인 한기가 몰아쳤다. 하지만 그 대가로 윤우의 시야에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역사의 바닥 위로, 보이지 않던 붉은색 실선들이 복잡한 그물망처럼 깔려 있었다.
배강석이 가리킨 3번 승강장 선로 쪽에는 핏빛으로 물든 거대한 아가리 모양의 영적 파동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곳을 밟는 순간, 바닥에 숨겨진 기이의 가시가 온몸을 꿰뚫을 터였다.
반면, 오히려 가장 위험해 보이는 무너진 타일 더미 바로 옆, 썩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 구역은 깨끗한 청색 빛이 돌고 있었다. 그곳이 진짜 안전지대였다.
윤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떼어졌다. 감정이 거세된 그의 얼굴에 떠오른 그것은, 조소에 가까웠다.
"알겠다. 내가 가지."
윤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배강석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말귀가 통하는 놈이군. 빨리 가봐!"
윤우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배강석과 그의 패거리들이 윤우의 뒤를 바짝 쫓으며 감시했다. 윤우는 일부러 3번 승강장의 붉은 실선 바로 경계선 앞까지 걸어갔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죽음의 덫이 발동하는 위치였다.
윤우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멈춰? 어서 발을 디뎌!"
배강석이 짜증스럽게 쇠파이프를 치켜들었다.
"이 앞은 바닥이 너무 흔들리는군."
윤우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당신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는 게 어떻겠나? 이 정도 튼튼한 다리라면 문제없을 텐데."
"이 새끼가 장난하나? 죽고 싶어?!"
배강석이 분노하며 윤우를 밀쳐내기 위해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윤우는 그 타이밍을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 배강석의 거구자 발을 내딛는 순간, 윤우는 가볍게 몸을 돌려 청색 빛이 도는 안전지대인 웅덩이 쪽으로 반 걸음 비켜섰다.
배강석의 전투화가 정확히 붉은 실선의 중심부를 밟았다.
콰득!
"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역사의 천장을 흔들었다.
바닥의 콘크리트 타일이 순식간에 뒤틀리며, 뼈로 만들어진 기괴한 가시 수십 개가 솟구쳐 올라 배강석의 발목과 종아리를 관통했다. 푸른 불꽃이 가시 끝에서 피어오르며 그의 살점을 태워 들어갔다. 배강석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고, 그가 쓰러진 자리에서도 가시들이 추가로 솟구쳐 그의 어깨와 팔을 꿰뚫었다.
"사, 살려줘! 이봐! 구해줘!"
배강석이 피를 토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의 패거리들은 기겁하며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누구도 그를 돕기 위해 손을 뻗지 않았다. 협의회의 철칙인 '침묵의 등가교환'이 발동한 것이다. 배강석의 비명은 그들에게 '저곳이 죽음의 구역'이라는 소중한 정보를 주었을 뿐이었다.
윤우는 안전지대에 선 채, 피칠갑이 되어 가는 배강석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안전지대는 이쪽이었는데. 아쉽게 됐군."
윤우의 건조한 목소리가 비명 소리 사이로 스며들었다. 주위의 생존자들은 소름 끼치는 눈빛으로 윤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일부러 배강석을 유인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누구도 감히 윤우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규칙을 완벽히 간파하고 이용하는 자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였다.
태현 역시 침을 꿀꺽 삼키며 윤우의 뒤를 따랐다. 윤우가 딛는 발바닥의 궤적만을 정확히 밟으며, 두 사람은 소란스러운 무리로부터 벗어났다.
윤우는 역사 구석, 어두운 대피선로 모퉁이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찌그러진 채 방치된 기차 잔해가 뒹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괴수가 씹다 버린 고철 조각처럼 처참하게 구겨진 형상이었다. 하지만 윤우의 눈에 비친 그것은 단순한 고철이 아니었다.
스스스스…….
기차 잔해의 틈새로 아지랑이 같은 영적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뺨에 닿는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뜨거웠다. 1화에서 마주했던 그 '영적 충전 열차'의 잔해임이 분명했다.
윤우는 허리를 숙여 기차 잔해 옆의 벽면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불에 반쯤 타버린 노선도가 붙어 있었다.
"이건……."
태현이 다가와 손전등 빛을 비추었다.
노선도 위의 역 이름들은 전부 피로 지워져 있었고, 오직 하나의 붉은 선만이 기괴하게 꼬인 채 종착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종착역의 위치에는 검고 붉은 낙서로 '제0구역'이라 적혀 있었다. 동생 윤아가 갇혀 있는 최악의 심연이었다.
윤우는 손을 뻗어 타버린 노선도를 만졌다.
손끝이 완전히 무뎌져 종이의 질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손가락을 타고 들어오는 기분 나쁜 열기는 뇌를 직접 자극했다. 이 노선도와 기차 잔해는 단순한 함정이 아니었다. 이 이계의 중심부로 향하는 열차의 궤도이자, 어쩌면 이 공간을 통째로 무력화할 수 있는 거대한 열쇠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미회수 복선 감지. 장부에 기록하시겠습니까?]
머릿속에서 건조한 기계음이 울렸다. 윤우는 품속의 장부를 꺼내 손가락 끝의 피로 노선도의 궤적을 덧그렸다. 장부의 한 페이지가 붉게 물들며 기차 잔해의 열기가 장부 내부로 흡수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우야, 기분이 이상해. 사방이 너무 조용해졌어."
태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기를 고쳐 잡았다.
과연 그랬다. 조금 전까지 배강석의 비명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던 역사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붉은 비상등마저 완전히 꺼지고, 오직 기차 잔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안광만이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스으으으으…….
선로의 틈새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기는 차갑고 축축했으며, 썩은 살점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이 소리는……."
멀리서 대지를 흔드는 거대한 굉음이 들려왔다.
쿠구구구구!
역사 전체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꼬인 선로들이 쇠사슬 끊어지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비명이 다시 사방에서 터져 나왔지만, 이미 늦었다.
그들이 서 있던 대피선로의 기차 잔해, 그 거대한 철문이 돌연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굳게 닫혔다.
"어, 어라? 문이 안 열려!"
태현이 철문을 들이받으며 소리쳤지만, 용접이라도 된 듯 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기차 내부의 벽면들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철판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내부 온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도의 고열이 내려앉았다.
가장 가학적인 덫이 가동되는 순간이었다. 탈출구는 사라졌고, 열차는 붉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