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마침내 고전적인 중세 감옥 같은 대형 제단의 지지대 위에서 온몸이 쇠사슬로 포박된 윤아를 육안으로 확인한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제단 주변만큼은 기괴할 정도로 푸르스름한 인광이 감돌고 있었다. 허공에 매달린 매끄러운 돌기둥들이 거꾸로 솟아오른 고드름처럼 날카롭게 아래를 향했고, 그 뾰족한 끝자락마다 검붉은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져 바닥에 기괴한 동심원을 그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양쪽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 내 세계는 끔찍할 정도로 고요했다. 고요함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귀를 가득 채운 찐득한 타르처럼 고막과 두개골 안쪽을 묵직하게 압박해 들어왔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뼈가 들썩이는 진동, 바닥을 디딘 발바닥을 통해 타고 올라오는 차가운 대지의 잔물결만이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지표였다.

사슬에 묶인 윤아의 고개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창백한 뺨이 푸른 빛을 받아 유령처럼 번뜩였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뻗으려다 멈추었다. 내 손바닥은 이미 인간의 온기를 잃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가죽처럼 질겨진 손끝에는 감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장부를 가동할 때마다 지불했던 대가들이 내 육신을 서서히 죽은 자의 것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바스락.

발밑에서 부서지는 돌 가루의 진동이 뼈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단 주변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단순한 대기의 흐름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거대한 자궁처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그 중심에 도사린 거대한 포식자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제0구역의 최종 군주. 이 뒤틀린 이계의 심장부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살기가 살죽을 바늘로 찌르듯 아프게 박혀왔다.

시간이 없었다. 내게 남은 이계의 잔여 수명은 단 3일.

그마저도 장부의 이면 합의를 가동하며 동력으로 치환해 버린 탓에, 매 순간 내 영혼의 모래시계는 무서운 속도로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지체한다면 동생의 손을 잡기도 전에 내 육신이 먼저 먼지가 되어 흩어질 터였다.

나는 품속에서 끈적한 가죽 표지의 '기이 연명 장부'를 꺼냈다. 손에 닿는 감촉이 평소보다 훨씬 더 무겁고 축축했다. 마치 장부 자체가 내 남은 생명을 빨아들이기 위해 굶주린 짐승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구속구를 파괴해야 한다. 윤아의 사지를 결박하고 있는 저 붉게 녹슨 쇠사슬은 평범한 쇠붙이가 아니었다. 이계의 정화 작용과 억제력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오컬트적 족쇄. 일반적인 물리력이나 어설픈 장부 거래로는 저 무시무시한 구속력을 깨뜨릴 수 없었다. 내 수명을 전부 바친다 해도 장부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며 내 목숨을 즉시 거두어 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장부의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손가락 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마치 마른 가죽을 만지는 것처럼 서슬 퍼런 전율을 남겼다. 장부 구석, 고착된 핏자국 아래 감추어져 있던 미지의 특별 비밀 조항이 내 흐릿한 시야 속에 떠올랐다. 7화에서 피를 흘려가며 간신히 해독해 냈던, 계약자의 생명과 감각 외에 영역 내의 파괴적인 영적 에너지나 타인의 절망을 임시 자산으로 산입할 수 있다는 '이면의 합의' 조항.

그리고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또 하나의 패가 맞춰졌다.

2화에서 보았던, 뒤틀린 지형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영적 기차. 그 철마의 심장부에 가득 차 있던 비정상적인 열기. 이미 지난 화에서 승강기 동력으로 일부 치환해 썼으나, 내게는 여전히 그 기차가 품고 있던 거대한 영적 열기의 잔여 제어권이 장부에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이빨로 오른손 검지 끝을 사정없이 깨물었다. 통각을 잃어버렸기에 통증은 없었으나, 잇새로 툭 터져 나오는 비린 피의 온도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주저 없이 붉은 피를 장부의 빈 면에 짓이기듯 문질렀다.

[이면 합의 조항 발동.] [자산 산입: 제7 격리 이계 내 방치된 영적 열차의 잔여 열기 100% 및 이 구역에 고인 낙오자들의 절망 에너지.] [청구 사항: 한윤아를 구속하고 있는 인접 봉인 사슬의 정밀 반감 및 구조적 괴사.]

장부의 종이가 내 피를 무서운 속도로 빨아들였다. 백색의 종이 위로 검붉은 혈선들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며 글자들을 삼켰다.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욱신거리는 기묘한 박동이 느껴졌다. 내 소유가 아닌, 저 멀리 버려진 기차의 동력원이 통째로 연소하며 발생하는 영적인 열량이 내 손을 거쳐 장부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감각이었다.

치이이익!

들리지는 않았으나 시각적으로 명확히 보였다. 윤아의 몸을 옭아매고 있던 굵직한 쇠사슬들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쇠사슬 표면에 각인되어 있던 기괴한 기하학적 문양들이 불꽃을 튀기며 부서져 나갔다. 족쇄의 강도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사슬이 느슨해지며 붉은 가루를 흩뿌렸다.

그때, 윤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 시야는 이미 반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우측 청각마저 잃어버린 대가로 시력마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먼지 낀 유리창 같은 시야 너머로도, 나를 바라보는 윤아의 두 눈만큼은 선명하게 들어왔다.

윤아의 눈이 크게 동그래졌다. 이내 그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더니,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내 귓가에는 아무런 소리도 닿지 않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 혹은 척추 깊은 곳에서 윤아의 목소리가 영적인 공명음이 되어 고통스럽게 울려 퍼졌다.

‘오빠……? 오빠야?’

그것은 귀로 듣는 음성이 아니었다. 영혼과 영혼이 맞닿아 일어나는 지독한 파동이었다.

‘왜 이제 왔어…… 왜 몸이 이 모양이야…… 흐윽, 오빠 얼굴이 왜 그래…….’

윤아의 입술 모양이 일그러지며 흐느끼는 것이 보였다. 내 손을 잡으려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마른 팔목이 쇠사슬의 남은 잔해에 긁혀 붉은 피를 흘렸다. 그 피는 차가운 석조 바닥으로 떨어져 검게 번졌다.

순간, 내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타인의 비명에도, 동료들이 괴이에게 찢겨 죽어가는 광경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내 감정의 결벽증적인 방벽. 그 철저하게 얼어붙어 있던 감정의 댐이, 윤아의 눈물 한 방울에 삐걱거리며 균열을 일으켰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연민도, 슬픔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건만, 동생의 울음소리만큼은 내 마모된 영혼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린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감정에 휩쓸려 계산을 그르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냉혹할 정도의 이성이다. 여기서 흔들리면 둘 다 죽는다.

스으으으…….

제단 뒤편의 거대한 암흑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쳤다.

그림자가 스스로 형태를 갖추며 솟아올랐다. 그것은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으며, 형체는 고정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검은 타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군체의 표면마다 수천, 수만 개의 황금빛 눈동자가 일시에 개안하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동자들이 일제히 깜빡일 때마다 공간의 중력이 뒤틀렸다.

내 뇌리 속으로 거대하고 무거운 의지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것은 고막을 찢는 소리가 아니라, 뇌세포 하나하나를 직접 짓밟는 압도적인 사념이었다.

[가련하고 오만한 필멸자여.]

최종 군주의 비웃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차갑고, 습하며, 지독한 악의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네놈이 쥐고 있는 그 하찮은 가죽책이 너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믿었느냐? 네 잔여 수명은 고작 사흘도 남지 않았다. 감각마저 대부분 잃고 시들어가는 육신으로, 감히 이 심연의 영토에서 제물을 가로채려 하다니.]

군주의 황금빛 눈동자들이 일제히 붉게 충혈되며 나를 압박했다.

[네 장부의 저울은 이미 상실의 무게로 기울어져 있다. 거래의 수지타산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장부는 네 얄팍한 목숨을 가장 먼저 청구할 것이다. 네놈은 이곳에서 동생과 함께 영원히 썩어갈 운명이다.]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 군주의 선고는 백번 지당한 사실이었다. 내 몸은 이미 한계였다. 청각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시각마저 흐릿하며, 남은 수명은 단 3일. 장부와의 등가교환 법칙에 따르면, 내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무리한 요구를 추가하는 순간 내 목숨은 그 자리에서 장부의 대가로 지불되어 소멸할 터였다.

하지만 내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들리지 않는 세상 속에서, 내 웃음소리 역시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내 가슴속에 흐르는 냉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나는 피 묻은 장부를 양손으로 더욱 단단히 거머쥐었다. 영혼이 수축하고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압박 속에서도, 내 눈빛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군주의 수만 개 눈동자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계산은 내가 한다."

내 목소리가 내 목구멍을 통해 나가는 진동이 느껴졌다. 거칠고, 낮으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였으리라.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그건 네 하찮은 기준으로 내린 결론이겠지. 이 장부의 가치는 네놈 따위가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장부를 군주의 눈앞에 치켜들었다. 장부의 가죽 표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개가 내 전신을 감싸 안으며 보이지 않는 은신 장벽을 형성했다. 군주의 무시무시한 살기와 영적 압박이 그 장벽에 부딪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내 목숨을 청구하겠다면 청구하라고 해라. 어차피 윤아를 구하지 못한다면 내 목숨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거래의 저울판 위에 내 생명 전체를 올려놓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계산을 끝까지 마칠 것이다.

맹수 같은 기세에 군주의 황금빛 눈동자들이 일제히 좁혀졌다. 분노와 경악이 뒤섞인 기류가 어둠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감히 필멸자 주제에 지배자의 권능 앞에서 이토록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대적할 줄은 몰랐으리라.

[건방진지고, 벌레 같은 놈이.]

군주의 사념이 지독한 살의를 담아 폭발했다.

스스스스스릉!

제단의 바닥이 거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흔들림이 아니었다. 공간 전체의 분자 구조를 파괴하는 듯한, 절대 복종의 초파괴 지진파가 군주의 몸체에서부터 방사형으로 뻗어 나왔다.

쩍! 쩍쩍!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장부의 붉은 은신 장벽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진동이 내 뼈를 타고 사정없이 몰아쳤다. 장벽의 파편들이 허공에서 빛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지진파의 강력한 압력이 내 흉부를 정통으로 타격했다. 목구멍에서 울컥하며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왔다. 발밑의 석조 바닥이 완전히 붕괴하며, 나와 윤아가 서 있는 제단 자체가 통째로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은신 장벽이 완전히 분쇄되는 그 찰나의 순간, 군주의 거대한 암흑 손길이 내 심장을 향해 짓쳐 들어왔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