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낙하하여 멈춘 검게 그을린 지면 무더기 속에서 홀로 고요하게 우회 회전하는 고대 유물의 기운을 포착한다.

사방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했다. 공기를 찢는 굉음도, 바닥이 갈라지는 파열음도 존재하지 않는 무성영화의 세계. 고막을 영구히 잃어버린 대가는 이토록 서늘하고도 완벽한 고립으로 돌아왔다. 이명의 잔재조차 짓밟힌 머릿속에서 오직 심장의 둔중한 도끼질만이 뼈를 타고 전해질 뿐이었다.

시야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추락의 충격으로 입안 가득 고인 찝찔한 피를 뱉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무릎 아래로 느껴지는 검은 재의 감촉이 축축하고 끈적거렸다. 단순한 흙이 아니었다. 인간의 살점이 타들어 가다 만 잔해들이 이 바닥을 메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 멀리서 강태현이 허공을 향해 단검을 휘두르며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목에 핏대가 굵게 불거지고 입술이 격렬하게 움직였지만, 내게는 그 어떤 파동도 가닿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 그 수직의 어둠 위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내려앉고 있었다.

도철민. 아니, 이제는 그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기괴한 형체.

그의 상반신은 여전히 탐욕스러운 이목구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아래는 수십 개의 썩어가는 인간 다리들이 거미의 그것처럼 융합되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다리들이 바닥의 재를 짓밟을 때마다 미세한 지동이 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소리가 지워진 자리에 촉각이 기괴할 정도로 예민하게 돋아나 상황을 중계했다.

살고 싶다는 집착이 빚어낸 괴이의 형상. 도철민은 무너진 지반 위에서 우리를 완전히 짓밟기 위해 기어내려 오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내 시선은 오직 발밑, 검은 재 더미 사이에 반쯤 파묻힌 채 홀로 청백색의 조도를 내뿜으며 역방향으로 회전하는 고대 나침반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침반을 쥐고 있는 것은 흙빛으로 변해버린 해골의 손가락이었다. 가죽만 간신히 남은 고대 탐사대원의 시신. 그는 죽어서도 이 나침반을 놓지 않으려는 듯, 손가락뼈를 갈고리처럼 굽혀 유물을 움켜쥐고 있었다.

‘기이 연명 장부’를 꺼내 들었다.

가죽 표면이 내 손바닥의 피를 빨아들이며 기분 나쁜 온기를 뿜어냈다. 우측 청각을 지불하고 얻어낸 기회였다. 여기서 멈추면 내 수명 3일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나는 이 차가운 재 구덩이 속에서 도철민의 영양분이 될 터였다.

나는 장부의 구석진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7화에서 내 피로 적셔가며 간신히 해독해 냈던 미지의 특별 비밀 조항. 장부의 하단에 흐릿한 낙인처럼 새겨져 있던 붉은 실선들이 내 시선과 맞닿자 살아 움직이는 실뱀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특별 면책 및 이종 유물 동화 조항: 계약자의 감각 외에도 영역 내에 존재하는 고대의 유물이나 규격 외의 영적 자산을 장부의 대차대조표에 영구 산입할 수 있다. 단, 산입 시 유물의 본질을 완전히 해체하여 장부의 일부로 귀속시킨다.]

기이 연명 장부는 단순한 거래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계의 법칙을 삼키고 개조하는 포식자였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탐사대원의 굳어버린 손가락뼈를 구두굽으로 짓밟았다. 콰직, 하는 진동이 발끝을 타고 뇌리로 들어왔다. 힘없이 부서진 뼛조각 사이에서 고대 나침반을 낚아챘다.

나침반의 청백색 바늘이 내 손가락이 닿자마자 미친 듯이 진동했다. 바늘은 위아래가 뒤집힌 채 거꾸로 회전하며 주변의 중력을 미세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이 기괴한 공명은 제0구역의 시간과 공간이 역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증명하는 물리적 지표였다.

나는 나침반을 펼쳐진 장부의 중심에 사정없이 내던졌다.

"흡수해라."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내 의지는 장부의 가죽을 타고 단숨에 번졌다.

장부의 붉은 페이지들이 살아있는 아가리처럼 쩍 벌어졌다. 수십 개의 핏빛 점액질 촉수들이 뿜어져 나와 고대 나침반을 옭아맸다. 청동으로 된 외피가 찌그러지고, 유리 덮개가 미세한 가루로 부서지며 장부의 종이 속으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장부가 가혹한 대가를 요구하며 내 영혼을 강하게 조여 왔다. 나침반을 완전히 해체하고 역설계하기에는 거래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장부의 수지타산이 어긋나면 내 목숨 자체가 청구될 판이었다.

새로운 자산이 필요했다. 내 감각을 더 바칠 수는 없었다. 이미 양쪽 청각과 미각, 어깨의 감각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여기서 더 잃으면 동생을 구하기도 전에 고깃덩어리가 될 뿐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급박하게 계산을 돌렸다. 자산. 이 영역 안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파괴적인 영적 에너지.

‘기차.’

뇌리에 번뜩이는 기억이 스쳤다. 2화에서 이 기괴한 이계의 뒤틀린 지형을 조사할 때, 궤도 위에 멈춰 서 있던 검은 열차를 발견했었다. 그 기차는 단순한 철제 덩어리가 아니라, 비정상적일 정도로 뜨거운 영적 열기로 충전된 거대한 마력로였다. 지난 승강기 하강 때 그 열기의 극히 일부만을 치환해 동력으로 썼을 뿐, 본체에 잠재된 열기는 여전히 이 지하의 맥동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장부의 이면 합의 조항을 가동했다. 내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피가 장부의 여백에 기차의 궤도 형상을 그려 나갔다.

[거래 제안: 제7 격리 이계 상층부에 정체된 영적 열차의 잔여 열기 전량을 장부의 연소재로 충당함.]

장부가 내 제안을 검토하듯 차갑게 식어갔다. 이윽고, 장부의 붉은 글씨가 요동치며 거래의 성립을 알렸다.

화르륵!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내 전신을 타고 엄청난 열기가 들이쳤다. 저 멀리 지상에 있던 열차의 영적 열기가 공간의 틈새를 뚫고 내 장부로 다이렉트로 수신되는 순간이었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던 제0구역의 냉기가 순식간에 증발하며, 내 몸을 중심으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고대 나침반이 완벽하게 용해되어 장부의 일부로 귀속되었다.

[고대 나침반 역설계 완료.] [제0구역의 역회전 역장 해석 능력을 획득했습니다. 이제 왜곡된 시공간의 궤적을 육안으로 판독할 수 있습니다.]

내 시야가 기이하게 변했다.

단순히 어두컴컴하던 지하 공간 위에, 수많은 푸른색과 붉은색의 기류들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기류는 붕괴하고 소멸하는 순방향의 중력 붕괴선이었고, 푸른 기류는 시간이 역수 흐름을 타며 모든 물리 법칙을 되돌리는 안전한 역장의 궤적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내 심장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박동이 울렸다. 소리가 사라진 내 내면에서,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영적인 파동이었다.

- 오빠…….

그것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슴뼈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날카롭고도 애절한 사념의 파동. 제0구역의 최하층, 보이지 않는 철조망 너머에서 홀로 주저앉아 울음소리마저 잃어가는 윤아의 기도가 내 심장에 직접 박힌 것이었다.

- 추워……. 너무 어두워. 오빠, 나 여기 있어…….

윤아의 존재 좌표가 왜 내 심장 내부를 가리켰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동생의 영혼은 이미 제0구역의 핵심 인과율과 동조되어 있었다. 그녀의 숨결과 생명력이 이 이계 전체의 뒤틀린 공간을 가로질러, 내 심장으로 직접 영적 신호를 송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장부가 내게 제0구역의 진실을 계시하듯 차가운 활자들을 뿜어냈다.

[제0구역의 본질 규명.] [이곳은 단순한 괴이의 서식처가 아닙니다. 이계 전체의 뒤틀린 인과와 차원을 정렬하여 억지로 유지하는 '인접 봉인처'입니다.] [봉인의 중심에 존재하는 쐐기가 파괴되거나 해방될 경우, 이계 전체의 인과율이 붕괴하며 현실 세계로 통하는 통로가 강제로 열립니다. 그러나 쐐기가 해방되는 순간, 영역의 붕괴 속도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것입니다.]

윤아가 바로 그 쐐기였다.

협의회의 간부들이나 괴이들이 윤아를 제0구역 깊은 곳에 묶어두려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녀가 해방되면 이 감옥 같은 이계 자체가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아아아!"

도철민의 일그러진 얼굴이 내 시야의 상단에 가득 찼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타액과 검은 연기가 허공을 더럽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의 수십 개의 인간 다리들이 바닥을 내리찍으며 만들어내는 진동이 내 발끝을 타고 사정없이 요동쳤다.

강태현은 이미 도철민의 무자비한 사냥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뒹굴며 도망치고 있었다. 다른 생존자 낙오자 몇 명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도철민의 거대한 다리에 밟혀 피떡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바닥의 지반이 붕괴하며 거대한 싱크홀처럼 아래로 무너져 내리는 아수라장.

그 아수라장 속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길을 보고 있었다.

길이 보였다.

무너져 내리는 검은 잔해들 사이로, 오직 푸른색의 역회전 기류만이 꼿꼿하게 솟구치며 안전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그저 무작위로 무너지는 절벽처럼 보이겠지만, 내게는 완벽하게 설계된 계단과 다름없었다.

나는 품속의 영적 복구 물약을 가볍게 쥐었다가 다시 밀어 넣었다.

지금은 고통을 느낄 때가 아니다. 감각을 복구하느라 지체할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전진뿐이다.

나는 신발 끈을 질질 끌며, 푸른색 기류가 흐르는 첫 번째 잔해를 향해 도약했다.

바스락.

발끝이 닿은 돌덩이는 붕괴하는 와중에도 역장의 힘을 받아 공중에 정지해 있었다. 나는 그 반동을 이용해 곧바로 다음 푸른 기류로 몸을 날렸다.

도철민의 거대한 거미 다리 하나가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소리 없는 파괴. 그러나 내 시야에는 그의 다리가 떨어질 궤적이 붉은 소멸선으로 이미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가볍게 상체를 비틀어 그 궤적을 비껴갔다. 다리가 바닥을 강타하며 엄청난 충격파와 먼지가 일어났지만, 내 몸은 이미 세 단계 위의 안전 지대로 도약한 뒤였다.

"저, 저 자식 봐라!"

도망치던 강태현의 입모양이 그렇게 움직이는 듯했다. 그의 두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차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낙오자들이 붕괴하는 바닥에서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추락하는 동안, 나는 중력을 거스르듯 허공에 떠 있는 잔해들을 딛고 고속으로 질주했다. 소름 돋을 정도로 정교하고 우아한 도약의 연속이었다.

도철민이 분노한 듯 수십 개의 다리를 광적으로 휘저으며 나를 쫓아왔다. 하지만 역장의 흐름을 완벽히 판독한 나를 잡기에는 그의 덩치가 너무나 비대했고, 그의 지능은 너무나 낮았다.

나는 그가 휘두르는 다리 사이의 좁은 틈새를 스치듯 지나치며, 그의 거대한 몸체를 아득히 초월하여 심연의 공동 아래로 몸을 던졌다.

바람이 내 뺨을 세차게 때렸다. 소리는 없었으나, 살을 에는 듯한 한기와 압도적인 중력의 변화가 전신을 엄습했다.

하강. 끝없는 하강의 끝에 마침내 발이 단단한 석조 바닥에 닿았다.

무릎을 굽혀 충격을 흡수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은 제0구역의 가장 깊은 최하층, 이계의 모든 뒤틀림이 시작되고 끝나는 인접 봉인처의 중심부였다.

주변의 풍경은 기괴하게도 중세의 거대한 지하 감옥을 연상시켰다. 이끼와 검은 핏자국이 말라붙은 거대한 돌기둥들이 원형으로 솟아 있었고, 그 기둥들 중심에는 거대한 대형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의 지지대 위.

붉게 녹이 슬어 있는 굵직한 쇠사슬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와 한 소녀의 사지를 허공에 단단히 고정하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낯익은 얼굴.

온몸이 쇠사슬로 포박된 채, 고개를 힘없이 떨구고 있는 내 동생.

한윤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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