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다 같이 죽는 거야! 네놈들의 그 알량한 장부고 뭐고, 전부 찢어발겨 주마!"

도철민의 목대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래가 잔뜩 끓어오른 짐승의 악다구니에 가까웠다. 이성을 완전히 유실한 그의 거친 손귀가 가옥 중심부에 박혀 있던 결계 해제 레버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쿠구구구궁!

왼쪽 귀의 완전한 침묵을 뚫고, 오른쪽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파열음이 고스란히 뇌수를 흔들었다. 반쪽짜리 청각은 세상의 소리를 기괴하게 비틀어 놓았다. 쇠사슬이 풀려나가는 거친 마찰음은 물속에서 울리는 둔탁한 타격음처럼 먹먹하게 일그러졌고, 대피소를 굳건히 감싸고 있던 푸른빛의 차단막은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벽면의 갈라진 틈새마다 검고 축축한 점액질의 촉수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들이쳤다. 썩은 가죽이 타들어 가는 듯한 역겨운 악취가 사방으로 번졌다. 괴이들의 굶주린 울음소리가 웅웅거리는 이명과 뒤섞여 머릿속을 헤집었다.

"미친 새끼가 결국 일을 저질렀군."

강태현이 이를 갈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노련한 눈동자가 사방으로 들이치는 괴이들의 움직임을 쫓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왼쪽 어깨부터 손끝까지 마비된 온기와 방금 전 지불한 왼쪽 청각의 공백이 몸의 균형을 사정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 머릿속이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극통이 가라앉기도 전에, 나는 품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는 '기이 연명 장부'를 꺼내 들었다.

가옥 지하로 내려가는 유일한 통로인 철제 승강기. 하지만 그곳은 이미 전력이 끊겨 거대한 고철 상자에 불과했다. 승강기 통로 아래쪽에서는 정체불명의 검은 안개와 함께 뼈마디를 부딪치는 기괴한 소리들이 역류하고 있었다.

장부를 펼쳤다. 거친 종이 질감이 손끝을 타고 시리게 전해졌다.

지금 당장 이 대피소의 붕괴 속도보다 빠르게 결계를 우회하여 하강할 동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 몸에 남은 감각을 더 이상 무작위로 지불할 수는 없었다.

그때, 장부의 우측 하단 구석에 얼룩처럼 굳어 있던 붉은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7화에서 장부의 이면을 샅샅이 해독하며 찾아냈던 미지의 특별 비밀 조항.

[이면의 합의: 계약자의 신체 감각 외에, 영역 내에 존재하는 파괴적인 영적 에너지 혹은 타인의 절망을 임시 대차대조표의 자산으로 산입할 수 있다.]

나는 즉각 장부 위에 내 피로 젖은 손가락을 문질렀다.

'지금 이 구역을 채우고 있는 붕괴의 열기, 그리고 저 뒤틀린 지형 속에서 잠자고 있던 힘을 제물로 삼는다.'

머릿속에서 2화에서 목도했던 뒤틀린 지형 속 기차의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 기차는 비정상적인 영적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계의 균열 속에서 마찰하며 축적된 그 기괴한 열원(熱源)을 장부의 거래 매개체로 강제 소환하는 것이다.

스스스스.

장부의 페이지가 스스로 넘어가며 검은 글씨가 빠르게 새겨졌다.

[거래 계약 가동: 영적 열차의 잔여 열기를 동력원으로 치환.] [대가 산정: 계약자의 이계 잔여 수명 3일 차감 및 현장 배출 에너지의 70% 강제 흡수.]

"태현 씨, 승강기 안으로 뛰어들어!"

내 외침과 동시에, 발밑의 철제 승강기가 굉음을 지르며 진동했다. 붉은 증기가 승강기 틈새로 품어져 나왔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던 기차의 영적 열기가 장부의 저주를 타고 승강기의 녹슨 톱니바퀴를 강제로 회전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강태현이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지만, 질문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기민하게 승강기 케이지 안으로 몸을 날렸다.

뒤편에서는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살려줘! 윤우 씨! 제발 나를 버리지 마……!"

서은채가 피투성이가 된 채 기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이미 괴이들의 점액으로 뒤덮여 반쯤 녹아내리고 있었다. 말투는 늘 그렇듯 눈물겹고 가련했지만, 그녀의 손끝에는 동귀어진의 악의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내 다리를 붙잡아 자신을 이 지옥에서 건져줄 방패막이로 삼으려 했다.

스슥.

나는 망설임 없이 구두 끝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짓밟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지만, 내 마음에는 그 어떤 감정의 일렁임도 일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에 동조하지 못하는 내 안의 차가운 결함이, 이 순간만큼은 가장 확실한 생존의 무기가 되었다.

"은채 씨. 당신이 가르쳐준 규칙이잖아. 합리적 방관."

내 건조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 절망과 저주가 가득 들어찼다. 그녀의 몸은 이내 대피소 지하에서 치솟은 거대한 촉수 더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질식해 갔다. 그녀를 따르던 다른 협의회 무리 역시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스러졌다. 오직 쓸모 있는 동력원이자 생존 본능이 확실한 강태현만이 내 곁에 남았다.

그때였다.

"한윤우우우우!"

가죽이 벗겨진 기괴한 형상의 거구가 승강기 철망 위로 들이닥쳤다. 도철민이었다. 결계를 파괴한 대가로 괴이들에게 반쯤 잠식당한 그의 몸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었고, 눈동자는 붉은 광기로 뒤덮여 있었다. 괴물과 다름없는 완력으로 그가 승강기의 철제 문을 우두둑 찢어발겼다.

"너만 살아서 갈 줄 알았더냐! 그 장부, 내놓으란 말이다!"

도철민의 거친 손귀가 내 목덜미를 향해 짓쳐들었다. 그의 손톱 끝에서 풍기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내 옆에는 이미 이 상황을 예측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강태현이 있었으니까.

팟!

강태현이 도철민의 무방비한 가슴팍을 향해 쇠사슬을 던져 감았다. 쇠사슬이 도철민의 몸을 조여들자, 그의 움직임이 아주 찰나의 순간 정지했다.

"지금이야, 윤우!"

강태현의 외침과 동시에, 나는 장부를 쥐지 않은 오른손을 뻗어 도철민의 무릎 관절을 정확히 겨냥했다. 내 오른팔에 남아 있던 지독한 한기의 기운—5화에서 화염 괴이를 처치하고 남은 역거래의 대가—을 그곳에 집중시켰다.

콰아아아앙!

도철민의 왼쪽 무릎이 순식간에 하얗게 얼어붙으며 균열이 갔다. 그 균열의 틈새로 내 구두 굽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우두둑! 콰직!

"끄아아아아아악!"

도철민의 비명이 대피소 공동을 울렸다. 완전히 역방향으로 꺾여버린 그의 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덜렁거렸다. 그는 더 이상 승강기에 매달려 있을 힘을 유지하지 못했다.

"잘 가십시오, 도철민 씨."

내가 그의 가슴을 밀쳐내자, 그는 꺾인 다리를 부여잡고 승강기 아래의 까마득한 어둠 속, 굶주린 괴이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심연으로 추락해 갔다. 그의 비명 소리가 어둠 속에서 아주 길게 늘어지다가 이내 툭 끊겼다.

통쾌할 정도의 완벽한 배제였다. 우리를 옭아매던 가장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마침내 스스로 파놓은 무덤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없었다.

투콰콰콰쾅!

승강기를 지탱하던 영적 열차의 동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쇠줄이 끊어지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승강기 케이지가 자유 낙하하기 시작했다.

"꽉 잡아!"

강태현이 구석의 철골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칼날처럼 살을 베어냈다.

그런데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낙하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야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허공에 둥둥 뜨는 듯한 부유감이 찾아왔다.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잔해들의 파편이 아래가 아니라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승강기 틈새로 튀어 나간 내 핏방울들이 허공에서 멈추더니, 이내 내 얼굴을 향해 거꾸로 흘러내렸다.

시간마저 뒤틀리고 있었다. 내 손목시계의 초침이 미친 듯이 역회전하고 있었다.

'이것은…….'

뇌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제0구역의 초반부. 이곳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었다. 이계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가동하는 '오컬트 정화 작용', 즉 시공간의 극점 역수(逆數) 흐름의 구역이었다. 들어오는 모든 불순물을 태초의 상태로 되돌려 소멸시키려는 거대한 우주의 의지 같았다.

이 흐름에 완전히 동화되는 순간, 나와 강태현의 존재 자체가 시간의 뒤편으로 밀려나 먼지가 되어 사라질 터였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10화에서 거울령을 몰살하고 얻었던 품속의 '영적 복구 물약'이 떠올랐다. 상실한 감각을 영구 고정해 주는 그 비약이야말로, 이 시공간의 침식 속에서 내 자아와 육체의 연대를 고정해 줄 최후의 열쇠가 될 터였다. 아직은 마실 때가 아니었지만, 품안에서 느껴지는 물약의 서늘한 촉감이 내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쿠웅!

지독한 금속음과 함께 승강기 케이지가 완전히 박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검게 그을린 지면 무더기 위로 사정없이 굴러떨어졌다. 온몸의 뼈가 삐걱거렸고, 입안에서 비린 피 맛이 확 퍼졌다. 왼쪽 청각이 마비된 탓에 세상은 여전히 반쯤 고요했지만, 바닥에서 전해지는 진동만큼은 생생했다.

"콜록……! 살아 있는 건가?"

강태현이 먼지 구덩이 속에서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나 역시 장부를 가슴에 품은 채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사위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타버린 뼈와 재가 산을 이루고 있는 검은 황무지. 이곳이 바로 이계의 가장 깊은 심연, 제0구역의 초입이었다.

그때였다.

내 오른쪽 귀의 미세한 청각이 기묘한 진동을 잡아냈다.

스으으으으…… 틱. 틱.

재더미로 가득 찬 검은 지면 한가운데, 홀로 고요하게 우회 회전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기운이 포착되었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어둠과 먼지를 빨아들이듯,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회전하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압도적인 고대 유물의 기운이었다. 그것이 뿜어내는 푸른 안개 속에서, 내 잃어버린 감각들이 미세하게 반응하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잿빛 소용돌이의 중심, 마치 대지가 벌린 아가리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광륜(光輪)이었다.

소리 없는 회전. 사방으로 흩날리는 재 먼지들이 그 광륜의 궤적을 따라 기묘한 동심원을 그리며 허공에 정지해 있었다. 마치 중력조차 제 방향을 잃고 헤매는 듯한 기괴한 광경이었다.

"한윤우, 저건……."

오른쪽 귀로 흘러든 강태현의 목소리는 잔뜩 젖어 있었다. 그 역시 이 비정상적인 공간의 압도적인 위압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극도로 신중해졌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바스라지는 재의 감촉이 내 발목을 잡는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광륜의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내 품 안의 '기이 연명 장부'가 가슴뼈를 뚫고 들어올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왼쪽 청각을 유실한 내 머릿속에서, 오직 장부의 박동 소리만이 이명처럼 비대칭적으로 울려 퍼졌다.

두근, 두근.

그것은 맥박이라기보다 무언가 단단한 것이 부서지는 파열음에 가까웠다.

"가까이 가지 마라. 공간이 비틀려 있어. 저 선을 넘는 순간, 몸이 조각날 거다."

강태현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차갑고 단단한 그의 손길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의 경고를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내 눈은 오직 그 푸른 소용돌이의 핵, 검게 그을린 대지 위에 반쯤 묻혀 있는 무언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고대의 정교한 톱니바퀴 장치처럼 보였다. 톱니의 표면에는 인간의 해골을 형상화한 기괴한 문양들이 촘촘히 각인되어 있었고, 그 장치들은 기어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겠다는 듯 완강하게 역방향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그 장치의 바로 옆, 이미 완전히 풍화되어 뼈대만 남은 시체 한 구가 보였다. 시체의 오른손은 그 역회전하는 장치를 움켜쥐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메마른 손가락 끝에는, 정체불명의 거꾸로 돌아가는 고대 나침반이 매달려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안구 뒷면에 다시 한번 장부의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이전의 거래와는 궤를 달리하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적인 문장이었다.

[감지: 제0구역의 왜곡된 쐐기.] [경고: 해당 구역의 시공간 붕괴율 89%. 쐐기를 확보하지 못할 시, 10분 이내에 존재의 영구 소멸 확정.] [거래 제안: '고대 나침반'의 소유권 획득을 위한 간섭 경로 개척.] [대가 청구: 우측 청각의 영구 상실, 혹은 동생 '한윤아'의 목소리에 대한 완전한 청각적 기억의 소실.]

턱밑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동생 윤아의 목소리. 그것은 내가 이 지옥에서 매일 밤 스스로를 되뇌며 되새기던 유일한 온기였다. 만약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가 그녀를 찾았을 때 나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하지만 우측 청각마저 잃는다면, 나는 완전한 침묵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기이한 데스 게임에서 소리를 완전히 잃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장부는 내 망설임을 비웃듯, 붉게 타오르는 글씨의 밝기를 더해갔다. 심장이 조여드는 고통이 오른쪽 가슴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옥죄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거래의 지연은 곧 장부가 내 목숨을 직접 청구하겠다는 경고였다.

"한윤우! 정신 차려! 뒤를 봐!"

강태현의 거친 외침이 오른쪽 귀를 때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호흡을 멈췄다.

우리가 내려온 승강기 통로의 잔해 위로, 검은 재들이 스르륵 모여들며 거대한 형상을 빚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도철민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추적하던 그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상반신은 도철민의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하반신은 수십 개의 썩어가는 인간의 다리들이 융합되어 꿈틀거리는 기괴한 거미의 형태였다.

"장부…… 내 장부……."

도철민의 목소리가 겹겹이 겹쳐진 기괴한 에코를 그리며 울려 퍼졌다. 그는 꺾인 다리들을 질질 끌며, 그러나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제0구역의 어둠이 그를 집어삼키고 새로운 괴이로 재탄생시킨 것이 분명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걸어오는 발걸음마다 바닥의 검은 재가 들끓으며 수천 마리의 검은 지네 같은 유충들이 사방으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젠장, 끝이 없군."

강태현이 단검을 고쳐 쥐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빛에 처음으로 짙은 절망이 서렸다.

내 손끝이 품속에 든 영적 복구 물약의 차가운 병 표면에 닿았다. 아직은 마실 때가 아니다. 감각을 복구하기 전에,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돌파할 강제적인 거래가 먼저였다.

나는 장부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장부의 하얀 페이지를 붉게 적셨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

나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벽증적인 고집으로, 장부가 요구하는 가장 가혹한 대가를 선택했다.

"……우측 청각을 가져가라."

그 선언과 동시에, 우측 고막을 찢을 듯 울리던 도철민의 기괴한 울음소리와 강태현의 거친 숨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완전한 침묵.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일시에 소멸했다. 소리가 사라진 빈자리를 메운 것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하고 차가운, 오직 내 심장의 진동뿐이었다. 기괴한 무음의 세계 속에서, 나는 천천히 고대 나침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끝이 나침반에 닿기 직전.

나침반의 거꾸로 돌던 바늘이 뚝 멈추더니,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진동을 따라, 내 발밑의 검은 대지가 거대한 싱크홀처럼 아래로 무너지며 붉은 인이 박힌 글자들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그 글자들은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동생, 한윤아의 정확한 좌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좌표가 가리키는 장소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좌표 확인: 제0구역, 한윤우의 심장 내부.]

완전한 적막 속에서, 내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서늘한 한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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