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바로 한윤우가 숨겨왔던 진짜 장부입니다!"
서은채가 품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검은 가죽 수첩을 꺼내 들었다. 사전에 치밀하게 조작해 둔, 내 장부와 기이할 정도로 닮아 있는 위조품이었다. 겉가죽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기괴한 동심원을 그리며 굳어 있었고, 그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큼하고 비린 악취가 대피소의 눅눅한 공기를 단숨에 점령했다. 그녀는 승리를 확신한 듯,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 뒤로 서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스스로를 구원자라 칭하며 우리를 기만하던 자의 추악한 계약서가 여기 있습니다. 도철민 대장님, 그리고 여러분. 똑똑히 보십시오. 이 자가 매일 밤 기이들과 거래하며 우리의 목숨을 어떻게 제물로 바쳐왔는지!"
그녀의 상냥하고도 애처로운 목소리가 컴컴한 대피소 천장을 울렸다. 벽면에 매달린 가스 조명등이 바람도 없는데 파르르 떨며 기분 나쁜 그늘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가파르게 번져갔다. 의심과 공포가 뒤섞인 눈초리들이 가시가 되어 내 온몸에 박혀왔다.
도철민이 기다렸다는 듯 턱을 쳐들며 보초 대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보초 대장의 손이 검 자루에 닿으며 가죽 비벼지는 소리가 유독 날카롭게 고막을 긁었다.
"이제 더 발뺌할 여지도 없겠군, 한윤우."
도철민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의 거친 숨결이 대피소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얗게 서렸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팍 너머, 옷자락 속에 숨겨둔 진짜 '기이 연명 장부'의 서늘한 감촉만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내 왼손 약지는 이미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는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내 영혼의 일부를 갉아먹고 있었다.
구석진 어둠 속에 몸을 묻은 강태현만이 턱을 괴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묵직하고 가라앉은 눈빛은 여전히 방관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이 연극의 결말이 어디로 향할지, 내가 정말로 저 조잡한 덫에 걸려 파멸할 것인지를 저울질하는 중이었다.
나는 가만히 입꼬리를 올렸다. 미각을 잃어 입안에 가득 고인 침조차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지만, 비릿한 공기의 흐름만큼은 생생하게 피부를 자극했다.
"서은채 씨."
내 건조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자, 서은채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그 수첩을 만들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더군요. 가죽의 질감부터 피의 냄새까지, 제법 그럴싸합니다. 하지만 장부의 거래는 언제나 철저한 '등가교환'이 원칙입니다. 당신이 들고 있는 그 종이 뭉치가 진짜라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당신이 지불하고 있는 '대가'는 무엇입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죠? 이건 당신 품에서 나온 증거품이에요!"
서은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그녀는 수첩을 쥔 손에 힘을 주었지만, 이미 그녀의 목덜미에 돋아난 얇은 혈관들이 검붉게 변하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장부를 흉내 낸 가짜 저주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 역시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음이 분명했다. 인간의 병리적인 권력욕이 만들어낸 추악한 위선이었다.
나는 품속의 진짜 장부를 가만히 움켜쥐었다. 가죽 표면의 핏자국이 내 체온을 빨아들이며 기괴한 열감을 뿜어냈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기억의 파편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제7 격리 이계의 뒤틀린 지형 속,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그 거대한 기차의 잔해였다. 2화에서 내가 발견했던 그 기차. 겉은 차갑게 식어 부식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 내부의 중심 핵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영적 열기가 비정상적으로 충전되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열기는 이계의 법칙을 뒤흔들 수 있는 거대한 에너지의 덩어리였다.
나는 장부의 가장 깊은 곳, 7화에서 내 피로 해독해 두었던 구석진 조항을 머릿속으로 불러왔다.
핏자국으로 얼룩져 거의 보이지 않던 미지의 특별 비밀 조항. 그것은 바로 '상위 반증 면책 특약'이었다. 장부의 권위와 진위 여부를 위협하는 가짜 계약이나 왜곡된 인과율이 존재할 때, 강력한 영적 에너지를 제물로 바쳐 그 위조품을 원천적으로 소멸시키고 반증하는 절대적인 규칙.
나는 마음속으로 장부와 거래를 시작했다.
'기차의 영적 열기를 끌어온다.'
장부가 내 요구를 무겁게 받아들였다. 징벌적인 대가가 즉각적으로 내 몸을 덮쳤다. 이번에 장부가 청구한 대가는 내 오른발 끝의 온기와, 동생 윤아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아주 사소한 저녁 식사의 기억이었다. 머릿속에서 따뜻했던 한때의 장면이 가위로 오려내듯 툭 끊겨 나가며 회색빛 무(無)로 변했다. 오른발 끝동이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순식간에 마비되어 감각이 사라졌다.
지독한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지만,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극한의 감정 결핍은 고통마저도 계산의 영역으로 밀어 넣었으니까.
그 대가의 대가로, 장부는 멀리 떨어진 기차의 영적 열기를 이 대피소 안으로 강제로 전송했다.
화르륵!
갑자기 서은채가 들고 있던 검은 수첩에서 푸르스름하고 축축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앗! 아아악!"
서은채가 비명을 지르며 수첩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돌바닥에 떨어진 수첩은 평범한 불꽃이 아닌, 영혼을 태우는 듯한 시퍼런 인화(燐火)에 휩싸여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종이가 타들어 가며 내는 소리는 마치 수많은 사람의 비명처럼 기괴하게 고막을 찔렀다.
"이, 이게 무슨……!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은채는 바닥에 주저앉아, 타들어 가는 가짜 수첩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불꽃은 그녀의 손가락 끝에 닿기도 전에 그녀의 내면을 타격했다. 조작된 저주가 역류한 것이다.
"컥……! 으, 으윽!"
서은채가 목을 움켜쥐며 핏물을 울컥 토해냈다. 그녀의 하얗고 고운 목덜미를 타고 검은 혈관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솟아올랐다. 상냥함과 가련함으로 무장했던 그녀의 얼굴이 고통과 당혹감으로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들이민 조작 서류는 형체도 없이 불타 한 줌의 검은 재로 변해 흩어졌다.
대피소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괴괴한 침묵에 잠겼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믿고 의지하려 했던 협의회의 간부, 서은채가 스스로 지어낸 거짓의 무게에 눌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한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서은채의 앞에 섰다. 내 발걸음 소리가 대피소의 습한 공기를 가르며 차갑게 울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는 서은채를, 나는 오직 유아독존의 싸늘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연민이나 분노 따위는 먼지 한 톨만큼도 섞이지 않은, 극도로 건조하고 무감각한 시선이었다.
"거짓으로 장부의 인과를 흐린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서은채 씨."
내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기에 오히려 더 깊은 공포를 자아냈다.
"당신이 쥐고 흔들려던 그 얄팍한 권력욕이, 결국 당신의 목줄을 죄게 되었군요."
"한…… 윤우…… 너, 네가 어떻게……!"
서은채는 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서려 있던 오만함은 간데없고, 오직 생존을 구걸하는 짐승의 비참한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매일 밤 타인을 미끼로 던지며 살아남았던 그녀가, 이제 자신이 그 미끼가 되었음을 직감한 것이다.
대피소의 생존자들이 동요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서은채가 우릴 속인 건가?" "가짜 수첩을 만들어서 한윤우를 모함하려고 했어……." "저 괴물 같은 꼴을 봐. 진짜 저주를 품고 있었던 건 저 여자였잖아!"
비난의 화살이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어 서은채와 도철민을 향했다. 모독과 모함을 기획하던 자들이 제 꾀에 스스로 걸려 파멸하는 순간이었다. 군중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토하는 서은채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 내 품속의 진짜 장부가 무겁게 진동했다.
페이지가 스스로 넘어가며, 서은채의 거짓 조작이 수포로 돌아간 대가로 장부의 새로운 거래가 성립되었음을 알렸다. 이계의 법칙은 엄격했다. 사기와 기만으로 장부를 모독하려 한 자의 가장 가치 있는 정보가 승리자에게 양도되는 규칙이었다.
서은채가 움켜쥐고 있던 그녀만의 비밀 수첩이 허공에서 스러지며, 그 안의 정보가 내 장부의 빈 페이지 위로 피로 쓴 글씨처럼 무섭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스스스슥.
종이 위에 붉은 선들이 얽히고설키며 정교한 지도와 숫자들이 그려졌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계의 가장 깊고 위험한 심연인 '제0구역'의 정확한 위치 좌표였다. 동생 윤아가 갇혀 울부짖고 있을 그 어둠의 중심지.
내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격통이 일었지만, 입가에는 마침내 기괴한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단서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게 흘러갔다.
"이…… 이 개새끼가아아아!"
단상 위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도철민이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채 포효했다. 그의 얼굴은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랐고,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서은채의 음모가 실패하고 군중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파멸뿐이었다. 그의 생존 광기가 극치에 달했다.
"다 같이 죽는 거야! 나 혼자 보낼 줄 알고!"
도철민이 광기 어린 고함을 지르며 대피소 구석, 영적 결계를 통제하는 거대한 철제 제어 장치로 몸을 날렸다.
"안 돼! 멈춰!"
보초 대장이 경악하며 소리쳤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도철민의 억센 손이 결계 해제 레버를 거칠게 내리눌렀다.
콰아아앙!
대피소 전체를 감싸고 있던 푸른빛의 결계막이 유리창이 깨지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대피소의 철문이 굉음과 함께 뜯겨 나갔다. 문밖의 짙은 어둠 속에서, 붉은 밤의 솎아내기 게임만을 기다리던 기이한 존재들의 굶주린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차가운 죽음의 바람이 대피소 내부로 사납게 휘몰아쳤다.
붉은 안개가 깨진 결계의 틈새로 질척하게 밀려들었다. 복도 저편에서부터 스며든 것은 단순한 기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혀처럼 바닥을 핥으며, 대피소 내부에 남아 있던 온기를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콧수염을 적시는 공기에서 비릿한 쇠 조각 냄새와 썩어가는 낙엽의 탄취가 동시에 풍겼다.
사람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결계가…… 결계가 깨졌어!" "도철민, 이 미친 새끼가 무슨 짓을 처한 거야!"
철제 제어 장치 앞에 선 도철민은 광소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뒤틀려 있었고, 양손은 쇠파이프를 쥔 것처럼 바르르 떨렸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붉은 안개를 배경으로 선 그의 실루엣은 마치 심연에서 걸어 나온 아귀와 같았다.
"나만 죽을 수 없지. 나만 이곳에서 썩어갈 순 없어! 한윤우, 네놈이 가진 그 장부만 있었어도……!"
그가 핏대를 세우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광기에 젖은 그의 발소리가 눅눅한 바닥을 짓밟을 때마다 찌걱거리는 기분 나쁜 수음이 대피소를 채웠다.
나는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오른발 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온 마비감이 발목을 지나 무릎팍까지 단단하게 굳혀 놓고 있었다. 장부와의 거래로 지불한 '온기'의 대가였다. 납 덩어리를 매단 듯 무거운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중심이 무너지며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찰나,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차가운 손 하나가 내 어깨를 억세게 잡아챘다.
강태현이었다.
그는 나를 부축해 뒤로 끌어당기면서도, 눈동자만큼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니라, 내 품속에서 붉은빛을 흘리고 있는 기이 연명 장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발을 다쳤군, 윤우 씨."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구원의 손길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내가 이 혼란 속에서 장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가장 가까이서 관찰하고, 기회가 된다면 그것을 가로채기 위해 곁에 머무는 것에 불과했다. 이 이계에서 타인의 호의는 언제나 가장 날카로운 독을 품고 있는 법이니까.
스스스스스.
대피소 천장의 갈라진 틈새에서 실처럼 가는 머리카락들이 비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끝에는 눈동자가 없는 허연 사람 얼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것들이 허공에서 기괴하게 목을 꺾으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붉은 밤의 솎아내기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아악! 내 몸에서 이거 떼어내!"
문가에 서 있던 보초 하나가 머리카락 더미에 휩싸였다. 가느다란 실 같은 머리카락들이 그의 살가죽을 파고들며 붉은 피를 빨아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미라처럼 말라붙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비명은 기이들을 부르는 가장 달콤한 초대장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마다 머리카락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사람들의 목을 감싸 쥐었다. 대피소 안은 순식간에 산지옥으로 변했다.
"한윤우!"
도철민이 내 앞까지 육박했다. 그의 손에는 언제 쥐었는지 모를 날카로운 철판 조각이 들려 있었다. 광기에 물든 그의 눈에는 오직 내 품속의 장부만을 빼앗겠다는 집착만이 번득였다.
"그걸 내놔! 그걸 내놓으면 난 살 수 있어! 제0구역이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그가 철판 조각을 내 목덜미를 향해 내리찍었다.
둔탁한 파열음이 일었다. 내 가슴속에서 진짜 장부가 스스로 페이지를 들추며 붉은 인을 토해냈다. 장부가 내 의사와 무관하게, 다가오는 치명적인 위협을 감지하고 강제 방어를 작동시킨 것이다.
스르릉.
도철민의 철판 조각이 내 목전에서 허공에 고정된 듯 멈춰 섰다.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붉은 실들이 그의 손목과 발목을 꽁꽁 묶어 공중에 매달아 버린 것이다. 장부의 이면에서 흘러나온 저주가 그의 사지를 죄어들었다.
"꺼, 꺽……! 이거 놓아라! 윤우 씨, 은채야! 살려줘……!"
도철민의 목뼈가 기괴한 각도로 뒤틀리며 우두둑 소리를 냈다. 그의 눈동자가 뒤집히며 핏줄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장부의 방어는 공짜가 아니었다.
머릿속이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극통과 함께, 장부가 새로운 대가를 청구하는 서늘한 문장이 내 안구 뒷면에 붉게 각인되었다.
[거래 성립: 침입자 배제.] [대가 지불 청구: 좌측 청각의 영구 상실, 혹은 동생 '한윤아'와의 가장 소중한 약속에 대한 기억.]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아와의 약속. 그것은 내가 이 지옥 같은 이계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였다. 그것을 잃는다면 나는 더 이상 '한윤우'로 존재할 수 없었다.
"……청각을 가져가라."
내 건조한 독백과 동시에, 왼쪽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멀어지더니 이내 완전한 적막이 찾아왔다. 왼쪽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잘려 나간 듯 기괴한 비대칭의 침묵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반쪽짜리 청각으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과 괴이들의 울음소리는 기묘하게 왜곡되어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했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던 서은채가 광소 섞인 울음을 터뜨리며 기어왔다. 그녀의 손끝이 내 구두 끝에 닿았다.
"너도…… 너도 결국 괴물이야, 한윤우. 그 장부의 노예가 되어 서서히 죽어갈 뿐이라고……."
그녀는 품속에서 마지막 남은 소형 기폭 장치를 꺼내 들었다. 대피소 지하에 매설된 기이 배양액 탱크를 터뜨릴 심산이었다. 그녀의 눈에 서려 있는 것은 동귀어진의 악의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스위치를 누르려던 그 찰나.
쿠구구구궁!
대피소 바닥이 통째로 아래로 꺼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 대피소 전체를 지탱하던 이계의 공간 자체가 뒤틀리며, 아래쪽에 도사리고 있던 거대한 공동(空洞)이 입을 벌린 것이다.
그 어둠의 심연 속에서, 내가 방금 획득한 '제0구역'의 좌표가 붉은 낙인처럼 명멸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떨어지는 잔해 속에서, 나는 몸을 던지는 강태현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기괴한 침묵 속에서, 내 몸을 삼키는 어둠을 향해 기꺼이 추락했다.
과연 이 어둠의 끝에 기다리는 것은 동생의 구원일까, 아니면 내 영혼의 완전한 소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