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탐조등이 만들어내는 기괴한 그림자가 콘크리트 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 찢어지는 전기음과 함께 대피소의 철문이 완전히 열린 그 순간, 도철민의 목소리가 젖은 흙바닥을 긁는 쇳소리처럼 대피소 입구를 가득 채웠다.

"저놈이다! 저 한윤우라는 놈이 괴이와 내통해 가옥 안의 대원들을 전부 도살했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어둠 속에 매복해 있던 무장 안전병 열두 명이 일제히 총구를 겨누며 들이닥쳤다. 노리쇠가 맞물리는 차가운 마찰음이 사방에서 고막을 찔렀다.

피비린내 나는 공기 속에서 내 동생 윤아를 닮은 핏빛 실루엣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것이 단순한 환영인지, 아니면 가슴을 짓누르는 이 계략의 일부인지 구분할 겨를도 없었다. 도철민의 등 뒤에서 서은채가 눈물이 고인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끔찍한 배신자를 목격한 비련의 주인공처럼.

"윤우 씨……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었는데……."

가증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연출이었다. 안전병들의 살기가 서서히 좁혀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가죽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대피소 입구의 냉기가 유독 축축하게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타인의 비명이나 죽음에 동조하지 못하는 내 안의 결핍은, 이럴 때일수록 소름 끼치도록 차분한 이성만을 남겨두었다. 가슴팍 안쪽에서 ‘기이 연명 장부’가 기분 나쁜 온기를 내뿜으며 맥동하고 있었다.

도철민이 품 안에서 붉은 피가 가득 묻은, 기괴하게 휘어진 칼 한 자루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쇵소리를 내며 뒹굴어 내 발끝에 멈춘 칼날은 언뜻 보기에도 불길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저놈이 대원들의 목을 벨 때 쓴 괴이의 살인 칼날이다! 장부에 피를 바쳐 저런 저주받은 물건을 거래해 온 거야!"

도철민의 일갈에 안전병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힘을 싣는 것이 보였다. 일촉즉발의 상황.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발밑의 칼날을 내려다보았다.

칼날을 응시하며 품 속의 장부를 아주 미세하게 펼쳤다. 장부의 차가운 종이 질감이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뇌리에 거래의 대가가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거래 항목: 물질 성분 감정 및 진실 투영.] [대가: 왼쪽 약지 손가락의 온기 감각 영구 상실.]

망설임은 사치였다. 고작 손가락 하나짜리 감각 따위는 동생을 찾기 위한 여정에서 먼지보다 가벼운 무게에 불과했다. 머릿속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약지의 감각을 느끼며, 나는 장부의 힘을 개방했다.

그저 장부의 힘만을 빌린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제7 격리 이계의 뒤틀린 지형 속에서 발견했던, 비정상적인 영적 열기로 가득 차 터지기 직전이던 기차의 중심 핵을 기억해 냈다. 나는 장부를 매개로 삼아, 저 멀리 어둠 속에 방치된 그 열차의 영적 열기를 이 공간으로 끌어당겼다.

화르륵!

눈에 보이지 않는 뜨거운 열풍이 안전 가옥 입구를 휩쓸었다. 축축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메마르며 타들어 가는 탄내가 진동했다.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도철민과 서은채의 안색이 동시에 굳어졌다. 그 영적 열기를 동력 삼아, 내 눈앞에 칼날의 상세한 정보가 붉은 글씨로 부유하기 시작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낮고 선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철민 형님. 연극을 하려면 제대로 준비하셨어야죠."

"뭐, 뭐라고?"

"이 칼날에 묻은 붉은 액체는 인간의 피가 아닙니다. 상류 기지 동쪽 수로에서 서식하는 기이한 진흙과 야생 멧돼지의 쓸개즙을 3 대 7의 비율로 섞어 만든 모조 피군요. 점도를 맞추기 위해 약간의 전분 가루까지 섞으셨네요."

나는 구두 앞코로 칼날을 가볍게 툭 쳤다.

"게다가 이 칼의 재질은 괴이의 물건이 아닙니다. 상류 기지 폐기 장벽에 널려 있는 흔하디흔한 공사용 철근을 대충 갈아 만든 조잡한 모조품이죠. 날 표면에 남은 산소용접기의 그을음 자국이 아직도 탄내를 풍기고 있는데, 안전병들의 후각이 마비된 게 아니라면 이걸 구분 못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안전병들 중 몇 명이 무의식적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실제로 공기 중에 미세하게 섞여 있던, 타들어 가는 쇠 냄새와 돼지 쓸개즙 특유의 비린내가 그들의 코끝을 자극했다.

내가 나열한 성분은 너무나 구체적이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도철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 자식이 어디서 말장난을……! 죽고 싶어 환장했군!"

도철민이 권총을 뽑아 들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죽음의 위협 앞에서 눈동자가 흔들리거나 목소리가 떨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 눈동자는 거울처럼 잔잔했고,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감정적 동요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냥감을 관찰하는 도살자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그 이질적인 평정심이 주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무장 안전병들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이, 진짜 쇠 냄새가 나는데?"

"철민 형님이 가져온 칼, 진짜 폐기 장벽 철근으로 만든 거 아니야?"

동요의 속삭임이 웅성거림으로 변해 대피소를 가득 채웠다. 안전병들의 총구가 조금씩 바닥을 향해 기울어졌다. 그들의 내적 갈등은 이미 침묵의 공기 속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나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도철민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 안전 가옥의 원초적 결계가 파괴되어 괴이들이 침입했다고 하셨죠? 결계 장치가 훼손된 흔적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품 속의 장부를 한 페이지 더 넘겼다. 장부 구석에 핏자국으로 새겨져 있던 미지의 특별 비밀 조항이 찰나의 순간 붉게 점멸했다. 7화에서 해독했던 그 비밀 조항의 힘이, 대피소 벽면에 설치된 결계 장치 위로 푸른빛의 영적 잔상을 투사했다.

지지직—

허공에 푸른빛의 홀로그램처럼 결계 장치를 조작했던 누군가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외부의 충격으로 파괴된 것이 아니었다. 내부에서 아주 정밀하게 나사를 풀고 마법진의 연결 고리를 끊어낸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손자국 위에 남은 독특하게 뒤틀린 지문의 형태가 허공에 거대하게 확대되어 나타났다.

"저 지문의 흉터……."

안전병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도철민의 오른팔이자 보초 대장인 사내의 오른손으로 쏠렸다. 그의 검지 손가락에는 과거 괴이에게 물려 생긴, 톱니 모양의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허공에 떠오른 지문 속 흉터와 자로 잰 듯 완벽하게 일치했다.

"보초 대장, 네놈이 결계를 직접 해제하고 대원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구나."

내가 던진 나지막한 선언이 대피소 내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형님! 이건, 이건 음해입니다! 저놈이 요술을 부려 지문을 조작한 겁니다!"

보초 대장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안전병들의 차가운 시선이 이제는 도철민과 보초 대장을 향해 꽂혔다. 자신들을 지켜줄 결계를 고의로 훼손해 동료들을 죽음의 미끼로 던진 배신자들. 합리적 방관 협의회의 이기적인 생존 방식조차도, 동료의 직접적인 등 뒤를 찌르는 이 치졸한 공작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다.

침묵의 정적이 흐르던 대피소 입구는, 순식간에 도철민을 심판하기 위한 징벌의 탁자로 뒤바뀌어 있었다. 도철민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려 턱끝에서 떨어졌다.

"이…… 이 개새끼가 정말……!"

도철민이 이성을 잃고 내게 달려들려던 그때였다.

"잠깐만요."

그늘 속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서은채가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눈물에 젖어 있지 않았다. 살기 어린 눈빛과 함께, 그녀의 입꼬리가 기괴하리만치 길게 찢어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품 안에서 붉은 실로 꼼꼼하게 묶인, 오래된 검은 가죽 책 한 자루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그 책의 표지에는 내 품 속에 있는 것과 소름 끼치도록 유사한 기이한 인장이 피로 각인되어 있었다.

"윤우 씨의 말이 맞아요. 철민 형님이 조잡한 짓을 했네요. 하지만…… 이것도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서은채가 검은 가죽 책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책이 허공에서 스스로 스르륵 펼쳐지며, 내 장부와 완전히 동일한 불길한 영적 파동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한윤우 씨가 진짜로 숨겨두었던, 대원들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 작성한 '진짜 연명 장부'의 이면 계약서예요. 당신들이 죽어간 진짜 이유가 바로 이 책에 쓰여 있답니다."

서은채의 목소리가 대피소의 차가운 벽면에 부딪치며 기괴한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나는 굳어지는 안면 근육을 억누르며 그녀가 든 책을 응시했다. 그것은 단순한 위조품이 아니었다. 장부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무언가였다.

서은채가 들고 있는 검은 가죽 책의 표면에서 검붉은 진액이 땀처럼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가죽이 아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미세하게 전율하는 인간의 등 가죽을 기워 만든 듯 불규칙한 모공과 솜털이 돋아나 있었다. 대피소 내부의 습한 공기가 그 책 주위로 빨려 들어가며 서늘한 서리를 만들어냈다.

"은채 씨…… 그게 정말입니까?"

한 안전병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도철민의 조잡한 공작에 흔들렸던 신뢰가, 서은채가 들고나온 기괴한 책의 압도적인 주술적 존재감 앞에서 다시금 요동치고 있었다.

서은채는 슬픈 듯 눈꼬리를 가늘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이 탐조등 불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났다. 타인의 동정심과 공포를 가장 완벽한 비율로 배합해 내는 악마적인 재능이었다.

"철민 형님은 그저 윤우 씨의 악행을 밝히려다 서툴러서 실수를 하신 것뿐이에요. 진짜 증거는 바로 여기 있었는데…… 제가 너무 늦게 가져왔네요. 미안해요, 모두들."

그녀가 책장을 한 장 넘겼다.

스스스스—

마른 낙엽이 쓸리는 소리가 아니라, 젖은 살가죽이 서로 마찰하며 내는 눅눅하고 불쾌한 청각적 자극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내 품 안의 '기이 연명 장부'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슴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작열감이 밀려왔다. 방금 전 대가로 지불해 완전히 얼어붙은 왼쪽 약지 손가락의 무감각과, 가슴을 짓누르는 뜨거운 통증이 기묘한 대조를 이루며 내 신경망을 유린했다.

장부가 내면에서 거칠게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경고: 허가되지 않은 유사 규칙서가 인접 영역에서 공명 중.] [위조된 계약 조건이 본 장부의 수지타산을 교란하고 있습니다.] [수지 불일치 발생 시, 소지자의 생명력을 즉시 청구합니다.]

목구멍 안쪽에서 비린 피 맛이 울컥 올라왔다. 나는 턱관절을 악물며 표정의 붕괴를 막아냈다. 타인의 고통에는 무감각하지만, 내 몸을 파괴해 가며 원하는 답을 찾아내려는 내 안의 결벽증적인 집착이 이 끔찍한 통증 속에서도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저것은 단순한 위조품이 아니다.

내 장부 구석에 핏자국으로 각인되어 있던, 지난 7화에서 겨우 해독해 냈던 '미지의 특별 비밀 조항'의 파동과 무섭도록 닮아 있었다. 서은채는 어떻게든 내 장부의 존재와 그 작동 원리를 알아채고, 기지 지하의 기이 배양 연구소에서 흘러나온 부산물들을 융합해 이 일시적인 '역방향 위조품'을 주조해 낸 것이 분명했다.

"여기에 적혀 있어요."

서은채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죽 책의 붉은 페이지를 짚었다.

"한윤우. 대가: 대원 6명의 생체 정보와 영혼의 파편. 거래 내용: 안전 가옥 내부로의 무혈입성 및 기이의 추적 회피……."

그녀가 이름을 호명할 때마다, 안전병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실제로 지난 밤 사냥에서 실종되었던 동료들의 이름이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미리 대원들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고 그 정보를 이 위조 책에 기록해 둔, 고도로 기획된 알리바이 싸움이었다.

"이래도 발뺌할 셈인가, 한윤우!"

도철민이 기세를 회복한 듯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보초 대장 역시 검을 빼 들고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피소 안의 공기가 다시 나를 파멸시키기 위한 올가미로 변해 사방에서 조여왔다.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이 상황을 관조하고 있는 강태현과 시선을 나누었다. 그의 집요하고 의심 가득한 눈빛은 여전히 아군도 적군도 아닌, 오직 생존만을 바라는 관찰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내가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지, 혹은 여기서 무너질지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폐부로 스며드는 공기가 유독 비리고 축축했다.

"서은채 씨."

내 건조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자, 서은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책, 참 공들여 만드셨군요. 하지만 장부의 거래는 언제나 '등가교환'이 원칙입니다. 당신이 주장하는 그 계약이 성립하려면, 내가 지불한 '진짜 대가'가 무엇인지도 거기 적혀 있어야 앞뒤가 맞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릴 하려는 거죠?"

"그 위조품을 유지하기 위해, 당신은 지금 무엇을 지불하고 있습니까?"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내 왼손 약지는 이미 감각을 잃어 완전히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손을 들어 올려 서은채가 든 책을 가리켰다.

"장부를 흉내 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텐데요. 예를 들면…… 그 고운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매 순간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를 삼키고 있다거나 하는 식의 대가 말입니다."

그 순간, 서은채의 우아한 목덜미에 돋아난 얇은 혈관들이 일제히 검붉게 변하며 꿈틀거렸다. 그녀의 상냥한 미소 뒤에 감춰진 이중성과,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는 병리적인 악의가 그 찰나의 순간 만천하에 드러났다.

서은채의 눈에 서린 상냥함이 순식간에 벗겨지며, 날것의 살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닥쳐……."

그녀가 잇새로 쇠 긁는 소리를 내뱉은 순간, 그녀가 들고 있던 위조 책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대피소 바닥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척추가 꺾인 시체들의 환영이 아니라, 진짜 기이의 실체화된 그림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가슴속 진짜 장부가 이계의 법칙을 강제로 재조정하려는 듯 피를 토하듯 붉은 빛을 내뿜으며 내 온몸의 감각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요동쳤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는 극통 속에서, 내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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