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방으로 깨져 날아간 은빛 거울들의 파편 중심부에서, 환한 광휘를 남기며 떨어지는 희귀한 약병이 눈에 들어왔다.

허공을 가르는 유색의 빛줄기는 지독하리만큼 이질적이었다. 썩은 살내음과 눅눅한 안개가 지배하는 이 공간에서, 오직 그 약병만이 스스로를 증명하듯 맑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거울령의 정수. 상실한 감각을 영구히 고정해 주는 영약이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듯 느릿하게 추락했다.

쿵, 쿠르릉!

발밑의 은빛 빙판은 이미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도철민의 수하였던 사냥개의 시체는 서은채의 실에 묶인 채 기괴하게 삐걱거렸고, 그 손에 들린 공간 붕괴석은 검은 불꽃을 토해내며 주위의 공간을 어그러뜨렸다.

"잡아! 저 약병을 잡아라!"

안개 너머에서 숨어 있던 협의회 소속의 생존자 셋이 굶주린 짐승처럼 튀어나왔다. 그들의 이지러진 눈동자는 빙판의 붕괴보다, 허공에서 빛나는 영약의 가치에 완벽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이 탐욕스럽게 손을 뻗는 찰나, 나는 품 안에서 서늘하고 축축한 가죽의 감촉을 느꼈다.

'기이 연명 장부.'

오른팔의 온기를 상실해 손끝에는 오직 영하의 혹한만이 맴돌았지만, 장부를 쥔 감각만큼은 뇌리를 찌르듯 선명했다. 나는 송곳으로 엄지손가락을 사정없이 찔렀다. 끈적한 검붉은 피가 장부의 마른 가죽 표면에 닿는 순간, 장부가 탐욕스럽게 내 피를 빨아들였다.

[거래를 제안합니다.] [물적 전송 및 귀속: 지정된 영적 개체를 장부의 이면 수납 공간으로 강제 회수합니다.] [대가: 미각의 '완전한 상실' 단계 고착화 및 심장 박동의 3% 영구 저하.]

혀끝에 남아 있던 미미한 먼지 맛조차 완전히 지워지며, 목구멍 안쪽이 석회 가루를 삼킨 것처럼 텁텁하고 무감각해졌다. 심장이 한 차례 무겁게 덜컹거리며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대가는 확실했다.

화아악!

허공에서 떨어지던 약병이 협의회원들의 손끝에 닿기 직전, 붉은 안개로 산산이 흩어졌다. 빛 무리는 공간을 건너뛰어 내 품 안의 장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빈손이 된 협의회원들이 허망하게 허공을 움켜쥐며 나를 노려보았으나, 이미 영약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내 영혼의 장부 뒤편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 이 빌어먹을 새끼가 뭘 한 거야!" "내놔! 그 약병 어디로 숨겼어!"

그들이 무너지는 빙판 위에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내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날뛰는 공간 붕괴석의 폭주를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냥개의 시체가 쥐고 있는 검은 유물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공간 자체를 찢어발길 기세였다. 이대로 가다간 영약을 쥐고도 이 균열 속에 묻히고 만다.

그 순간, 뇌리의 가장 깊은 은신처에 묻어두었던 기억의 파편이 요동쳤다.

2화에서 목격했던, 뒤틀린 지형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기괴한 열차. 비정상적인 영적 열기로 가득 차 터지기 직전의 화로처럼 부글거리던 그 고철 덩어리가 떠올랐다. 그 열차는 단순한 잔해가 아니었다. 이계의 균열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마력을 순환시키던 영적 기관이었다.

나는 장부의 빈 여백에 피 묻은 손가락을 짓눌렀다.

'그 뒤틀린 기차가 머금은 영적 열기를 이 좌표로 동기화한다. 균열을 메우는 흐름으로 전환해라.'

장부가 마치 비웃는 듯한 이명을 울렸다. 등가교환의 법칙은 자비가 없다. 기차에 잠재된 방대한 영성을 이곳으로 끌어오기 위해, 나는 내 척추를 타고 흐르는 신경의 온기 일부를 추가로 단절당했다. 등 뒤로 차가운 얼음 송곳이 박히는 듯한 극통이 일었으나, 내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고통에 동조하지 못하는 결함은, 이럴 때 최고의 방패가 된다.

쿠구구구둥—!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증기기관이 구동하는 듯한 굉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열기의 흐름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공간 붕괴석이 만들어내던 검은 불꽃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기차의 비정상적인 영적 열기가 붕괴석의 파괴 에너지를 상쇄하며 굳혀버린 것이다. 갈라지던 빙판이 단단한 회색 석고처럼 굳어지며 진동이 멈췄다.

"……미친놈."

옆에서 황동 실린더를 쥔 채 숨을 몰아쉬던 강태현이 나를 괴물 보듯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툭 소리를 냈다. 그는 내 부자연스러운 침묵과, 방금 일어난 기적 같은 공간의 안정이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스르륵.

안개 속에서 은빛 실들이 감기며, 사냥개의 시체가 뒤로 자빠졌다. 그리고 그 뒤에서 얇은 가죽 구두를 신은 발가락이 가볍게 얼음 바닥을 디디며 걸어 나왔다.

서은채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티 없이 맑고 슬픈 눈망울을 굴리며, 양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냘픈 어깨를 가늘게 떠는 모습은 영락없이 광풍에 휩쓸린 한 송이 가련한 꽃이었다.

"어머…… 세상에. 윤우 씨, 정말 대단해요. 이 끔찍한 기이를 혼자 힘으로 잠재우시다니. 역시 제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어요. 윤우 씨라면 우리 가여운 사람들을 구원해 줄 구세주가 될 거라고 믿었어요."

꿀을 바른 듯한 음성이 고막을 간지럽혔다. 가식과 기만이 뚝뚝 떨어지는 찬사였다. 방금 전까지 시체를 꼭두각시로 부려 내 목숨을 앗아가려 했던 여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상냥했다.

나는 품에 장부를 집어넣으며, 서은채를 향해 차갑게 눈길을 주었다.

"그 조잡한 인형극은 이제 끝난 건가?"

내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온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얼어붙은 얼음판을 긁는 듯한 서늘함에 서은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머, 인형극이라니요? 저는 그저 도 형님이 보낸 사냥개가 폭주하는 걸 막으려 했을 뿐이에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윤우 씨. 저는 늘 윤우 씨 편인걸요."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한 걸음 다가오며 가슴팍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가죽 수첩을 고쳐 쥐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서은채의 손가락 사이로 수첩의 낡은 표지가 엿보였다.

그 순간, 내 품 안의 장부가 기괴한 반응을 보였다.

가죽 표면이 맥박 치듯 쿵쿵 뛰며, 내 머릿속으로 불길한 영적 파동이 전해졌다. 7화에서 장부의 이면 구석에서 해독해 냈던 그 핏빛 비밀 조항의 낙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장부는 서은채가 쥔 수첩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수첩 속에 존재한다.

이 잔혹한 사냥터를 설계하고, 우리를 쥐새끼처럼 몰아넣고 통제하는 '상층 지배 군주'의 이름과 그의 규칙들이 저 수첩 안에 일지 형태로 기록되어 있었다. 서은채는 자신이 피해자인 척 연기하면서도, 사실은 상층의 지배자와 은밀히 소통하며 생존자들을 제물로 바쳐왔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수첩, 꽤나 무거워 보이는군."

내 말에 서은채의 얼굴에서 상냥한 미소가 순간적으로 증발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수첩을 품 깊숙이 밀어 넣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일기장일 뿐이에요. 윤우 씨는 가끔 사람을 너무 무섭게 보시네요."

"도철민이 네가 그 수첩으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나?"

나는 사정없이 그녀의 위선을 파고들었다. 서은채의 하얗게 질린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가스라이팅과 선동으로 남들을 부려왔지만, 내게는 그 어떤 감정적 동요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나는 그녀의 고통이나 눈물에 아무런 연민도 느끼지 못하니까.

"……지금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니에요."

서은채는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금 가련한 가면을 썼다.

"도 형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일단 안전 가옥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해요. 윤우 씨가 얻은 그 '좌표'에 대해서도요."

그녀의 눈빛 깊은 곳에 도사린 독기가 차갑게 일렁였다.

강태현은 우리 둘 사이의 숨 막히는 긴장감을 눈치채고 황동 실린더를 쥔 채 침묵을 지켰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쪽이 더 강하고 이용 가치가 있는지 저울질하는 눈빛이었다.

우리는 무너진 빙판의 잔해를 밟고, 기괴한 고립 영역의 안개를 헤치며 임시 피난처인 안전 가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목구멍은 완전히 말라붙었고, 신경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오직 하나, 장부 속으로 회수한 영적 복구 약물과 서은채의 수첩 속에 숨겨진 군주의 단서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뒤틀린 철골조 건물 사이에 위치한 안전 가옥의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불빛 아래 서 있는 인영들은 결코 환영의 몸짓을 하고 있지 않았다.

가옥의 철문 앞에는 무장한 생존자들, 도철민의 사병들이 붉은 탐조등을 켜둔 채 삼엄하게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구의 도철민이 피 묻은 쇠파이프를 어깨에 얹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살기로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어이, 한윤우."

도철민이 들이받을 듯이 걸어 나오며 쇠파이프를 바닥에 긁었다.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네놈이 없는 동안 가옥 안에 있던 내 심복 둘이 목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네놈이 쓰던 장부의 가죽 조각이 떨어져 있더군."

그는 내 가슴팍을 가리키며 흉포하게 짖어댔다.

"가옥 내 대원 살해 선동 및 공모 혐의다. 순순히 그 장부를 넘기고 무릎을 꿇어라. 안 그러면 이 자리에서 사지를 찢어 기이들의 먹이로 던져줄 테니까."

붉은 탐조등 불빛이 내 얼굴을 잔혹하게 비추었다. 서은채는 내 등 뒤에서 슬그머니 도철민의 뒤편으로 걸어가며, 입꼬리를 기괴하게 끌어올렸다. 함정이었다.

사방으로 깨져 날아간 은빛 거울들의 파편 중심부에서, 환한 광휘를 남기며 떨어지는 희귀한 약병이 눈에 들어왔다.

허공을 가르는 유색의 빛줄기는 지독하리만큼 이질적이었다. 썩은 살내음과 눅눅한 안개가 지배하는 이 공간에서, 오직 그 약병만이 스스로를 증명하듯 맑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거울령의 정수. 상실한 감각을 영구히 고정해 주는 영약이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듯 느릿하게 추락했다.

쿵, 쿠르릉!

발밑의 은빛 빙판은 이미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도철민의 수하였던 사냥개의 시체는 서은채의 실에 묶인 채 기괴하게 삐걱거렸고, 그 손에 들린 공간 붕괴석은 검은 불꽃을 토해내며 주위의 공간을 어그러뜨렸다.

"잡아! 저 약병을 잡아라!"

안개 너머에서 숨어 있던 협의회 소속의 생존자 셋이 굶주린 짐승처럼 튀어나왔다. 그들의 이지러진 눈동자는 빙판의 붕괴보다, 허공에서 빛나는 영약의 가치에 완벽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이 탐욕스럽게 손을 뻗는 찰나, 나는 품 안에서 서늘하고 축축한 가죽의 감촉을 느꼈다.

'기이 연명 장부.'

오른팔의 온기를 상실해 손끝에는 오직 영하의 혹한만이 맴돌았지만, 장부를 쥔 감각만큼은 뇌리를 찌르듯 선명했다. 나는 송곳으로 엄지손가락을 사정없이 찔렀다. 끈적한 검붉은 피가 장부의 마른 가죽 표면에 닿는 순간, 장부가 탐욕스럽게 내 피를 빨아들였다.

[거래를 제안합니다.] [물적 전송 및 귀속: 지정된 영적 개체를 장부의 이면 수납 공간으로 강제 회수합니다.] [대가: 미각의 '완전한 상실' 단계 고착화 및 심장 박동의 3% 영구 저하.]

혀끝에 남아 있던 미미한 먼지 맛조차 완전히 지워지며, 목구멍 안쪽이 석회 가루를 삼킨 것처럼 텁텁하고 무감각해졌다. 심장이 한 차례 무겁게 덜컹거리며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대가는 확실했다.

화아악!

허공에서 떨어지던 약병이 협의회원들의 손끝에 닿기 직전, 붉은 안개로 산산이 흩어졌다. 빛 무리는 공간을 건너뛰어 내 품 안의 장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빈손이 된 협의회원들이 허망하게 허공을 움켜쥐며 나를 노려보았으나, 이미 영약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내 영혼의 장부 뒤편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 이 빌어먹을 새끼가 뭘 한 거야!" "내놔! 그 약병 어디로 숨겼어!"

그들이 무너지는 빙판 위에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내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날뛰는 공간 붕괴석의 폭주를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냥개의 시체가 쥐고 있는 검은 유물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공간 자체를 찢어발길 기세였다. 이대로 가다간 영약을 쥐고도 이 균열 속에 묻히고 만다.

그 순간, 뇌리의 가장 깊은 은신처에 묻어두었던 기억의 파편이 요동쳤다.

2화에서 목격했던, 뒤틀린 지형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기괴한 열차. 비정상적인 영적 열기로 가득 차 터지기 직전의 화로처럼 부글거리던 그 고철 덩어리가 떠올랐다. 그 열차는 단순한 잔해가 아니었다. 이계의 균열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마력을 순환시키던 영적 기관이었다.

나는 장부의 빈 여백에 피 묻은 손가락을 짓눌렀다.

'그 뒤틀린 기차가 머금은 영적 열기를 이 좌표로 동기화한다. 균열을 메우는 흐름으로 전환해라.'

장부가 마치 비웃는 듯한 이명을 울렸다. 등가교환의 법칙은 자비가 없다. 기차에 잠재된 방대한 영성을 이곳으로 끌어오기 위해, 나는 내 척추를 타고 흐르는 신경의 온기 일부를 추가로 단절당했다. 등 뒤로 차가운 얼음 송곳이 박히는 듯한 극통이 일었으나, 내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고통에 동조하지 못하는 결함은, 이럴 때 최고의 방패가 된다.

쿠구구구둥—!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증기기관이 구동하는 듯한 굉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열기의 흐름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공간 붕괴석이 만들어내던 검은 불꽃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기차의 비정상적인 영적 열기가 붕괴석의 파괴 에너지를 상쇄하며 굳혀버린 것이다. 갈라지던 빙판이 단단한 회색 석고처럼 굳어지며 진동이 멈췄다.

"……미친놈."

옆에서 황동 실린더를 쥔 채 숨을 몰아쉬던 강태현이 나를 괴물 보듯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툭 소리를 냈다. 그는 내 부자연스러운 침묵과, 방금 일어난 기적 같은 공간의 안정이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스르륵.

안개 속에서 은빛 실들이 감기며, 사냥개의 시체가 뒤로 자빠졌다. 그리고 그 뒤에서 얇은 가죽 구두를 신은 발가락이 가볍게 얼음 바닥을 디디며 걸어 나왔다.

서은채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티 없이 맑고 슬픈 눈망울을 굴리며, 양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냘픈 어깨를 가늘게 떠는 모습은 영락없이 광풍에 휩쓸린 한 송이 가련한 꽃이었다.

"어머…… 세상에. 윤우 씨, 정말 대단해요. 이 끔찍한 기이를 혼자 힘으로 잠재우시다니. 역시 제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어요. 윤우 씨라면 우리 가여운 사람들을 구원해 줄 구세주가 될 거라고 믿었어요."

꿀을 바른 듯한 음성이 고막을 간지럽혔다. 가식과 기만이 뚝뚝 떨어지는 찬사였다. 방금 전까지 시체를 꼭두각시로 부려 내 목숨을 앗아가려 했던 여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상냥했다.

나는 품에 장부를 집어넣으며, 서은채를 향해 차갑게 눈길을 주었다.

"그 조잡한 인형극은 이제 끝난 건가?"

내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온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얼어붙은 얼음판을 긁는 듯한 서늘함에 서은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머, 인형극이라니요? 저는 그저 도 형님이 보낸 사냥개가 폭주하는 걸 막으려 했을 뿐이에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윤우 씨. 저는 늘 윤우 씨 편인걸요."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한 걸음 다가오며 가슴팍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가죽 수첩을 고쳐 쥐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서은채의 손가락 사이로 수첩의 낡은 표지가 엿보였다.

그 순간, 내 품 안의 장부가 기괴한 반응을 보였다.

가죽 표면이 맥박 치듯 쿵쿵 뛰며, 내 머릿속으로 불길한 영적 파동이 전해졌다. 7화에서 장부의 이면 구석에서 해독해 냈던 그 핏빛 비밀 조항의 낙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장부는 서은채가 쥔 수첩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수첩 속에 존재한다.

이 잔혹한 사냥터를 설계하고, 우리를 쥐새끼처럼 몰아넣고 통제하는 '상층 지배 군주'의 이름과 그의 규칙들이 저 수첩 안에 일지 형태로 기록되어 있었다. 서은채는 자신이 피해자인 척 연기하면서도, 사실은 상층의 지배자와 은밀히 소통하며 생존자들을 제물로 바쳐왔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수첩, 꽤나 무거워 보이는군."

내 말에 서은채의 얼굴에서 상냥한 미소가 순간적으로 증발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수첩을 품 깊숙이 밀어 넣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일기장일 뿐이에요. 윤우 씨는 가끔 사람을 너무 무섭게 보시네요."

"도철민이 네가 그 수첩으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나?"

나는 사정없이 그녀의 위선을 파고들었다. 서은채의 하얗게 질린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가스라이팅과 선동으로 남들을 부려왔지만, 내게는 그 어떤 감정적 동요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나는 그녀의 고통이나 눈물에 아무런 연민도 느끼지 못하니까.

"……지금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니에요."

서은채는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금 가련한 가면을 썼다.

"도 형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일단 안전 가옥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해요. 윤우 씨가 얻은 그 '좌표'에 대해서도요."

그녀의 눈빛 깊은 곳에 도사린 독기가 차갑게 일렁였다.

강태현은 우리 둘 사이의 숨 막히는 긴장감을 눈치채고 황동 실린더를 쥔 채 침묵을 지켰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쪽이 더 강하고 이용 가치가 있는지 저울질하는 눈빛이었다.

우리는 무너진 빙판의 잔해를 밟고, 기괴한 고립 영역의 안개를 헤치며 임시 피난처인 안전 가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목구멍은 완전히 말라붙었고, 신경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오직 하나, 장부 속으로 회수한 영적 복구 약물과 서은채의 수첩 속에 숨겨진 군주의 단서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뒤틀린 철골조 건물 사이에 위치한 안전 가옥의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불빛 아래 서 있는 인영들은 결코 환영의 몸짓을 하고 있지 않았다.

가옥의 철문 앞에는 무장한 생존자들, 도철민의 사병들이 붉은 탐조등을 켜둔 채 삼엄하게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구의 도철민이 피 묻은 쇠파이프를 어깨에 얹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살기로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어이, 한윤우."

도철민이 들이받을 듯이 걸어 나오며 쇠파이프를 바닥에 긁었다.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네놈이 없는 동안 가옥 안에 있던 내 심복 둘이 목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네놈이 쓰던 장부의 가죽 조각이 떨어져 있더군."

그는 내 가슴팍을 가리키며 흉포하게 짖어댔다.

"가옥 내 대원 살해 선동 및 공모 혐의다. 순순히 그 장부를 넘기고 무릎을 꿇어라. 안 그러면 이 자리에서 사지를 찢어 기이들의 먹이로 던져줄 테니까."

붉은 탐조등 불빛이 내 얼굴을 잔혹하게 비추었다. 서은채는 내 등 뒤에서 슬그머니 도철민의 뒤편으로 걸어가며, 입꼬리를 기괴하게 끌어올렸다. 함정이었다.

"대답이 없군, 한윤우."

도철민이 한 걸음 더 내딛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린 체취와 눅눅한 흙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미각은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후각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예민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들린 가죽 조각이 탐조등의 붉은 빛을 받아 검붉게 번들거렸다. 내 장부의 가죽과 흡사한 질감이었으나, 그 표면에서 풍기는 냄새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죽은 자의 살갗을 약품에 절여 억지로 무두질한 모조품이었다. 서은채의 손가락 끝에 묻어 있던 은빛 실의 잔향이 그 모조 가죽 위에서도 미세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내 침묵을 거부로 받아들였는지, 도철민의 사병 셋이 동시에 총구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철컥이는 쇳소리가 습한 공기를 가르고 고막을 찔렀다.

"침묵은 죄를 인정하는 거지."

도철민이 이를 갈며 쇠파이프를 치켜들었다. 그의 굵은 목줄기에 돋아난 핏대가 분노보다는 탐욕으로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장부를 빼앗아 이 사냥터에서 불멸의 권력을 쥐겠다는 광기가 그의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3% 느린 탓에, 가슴속에서 둔중하고 느린 고동이 울릴 때마다 이계의 서늘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공포는 없었다. 타인의 악의를 마주해도 내 안의 연민이나 두려움은 한 비늘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이 상황을 타개할 가장 차가운 계산 공식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 가죽 조각에선 은채 씨의 화장품 냄새가 나는군."

내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지자, 도철민의 옆에 서 있던 서은채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그녀는 급히 도철민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윤우 씨…… 어쩜 마지막까지 저를 모함하려 하세요? 도 형님, 저 무서워요. 저 사람이 제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여전히 눈물겨운 어조였으나, 그녀의 얇은 입술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호선을 그리며 뒤틀려 있었다.

그때였다. 내 가슴속에 품은 '기이 연명 장부'가 내 피부를 찌르듯 차가운 박동을 보냈다.

스르륵.

장부의 이면에서 핏빛 글씨가 내 망막 위로 떠올랐다.

[경고: 피난처의 '침묵의 등가교환' 규칙이 깨졌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살육자가 안전 가옥의 내부 경계를 오염시켰습니다.] [피의 냄새를 맡은 '상층의 파수꾼'이 하강합니다.]

쿵.

안전 가옥의 두꺼운 철문 너머에서 무겁고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도철민과 그의 수하들의 시선이 일제히 가옥의 문으로 쏠렸다. 붉은 탐조등 불빛이 미친 듯이 점멸하며 찢어지는 전기음을 냈다. 서은채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끼이이익—

기름칠이 되지 않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대피소의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쪽의 어둠은 기이하리만큼 깊고 축축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질척이는 무언가가 바닥을 기어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으으읍, 하아아아.

가래가 끓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도철민이 '죽었다'고 주장했던 그의 심복 둘이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온전하지 않았다.

사내들의 목은 뒤로 완전히 꺾여 척추 뼈가 살가죽을 뚫고 나와 있었고, 그들의 눈동자는 흰자위만 남은 채 고여 있었다. 꼭두각시처럼 흐느적거리는 그들의 손에는 서은채의 가죽 수첩에 그려진 것과 동일한 기괴한 인장들이 피로 그려져 있었다.

"어…… 어?"

도철민이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주춤거렸다.

꺾인 목덜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쇠를 긁는 듯한 기이의 목소리였다.

"계약자가…… 제물을 바쳤다……."

시체들의 손가락이 일제히 도철민과 서은채, 그리고 나를 가리켰다.

그들의 기괴한 손짓과 동시에, 내 품 안의 장부가 미친 듯이 뜨거워지며 새로운 거래 조항을 강제로 펼쳐 보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장부는 이 피비린내 나는 상황을 집어삼킬 준비를 마친 듯 붉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은채 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도철민이 비명을 지르며 서은채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서은채는 이미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자신의 가죽 수첩을 펼쳐 들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실들이 도철민의 사병들의 목을 단단히 휘감았다.

"도 형님. 이제 그만 가 주셔야겠어요."

서은채의 상냥한 음성이 피비린내 나는 공기 속으로 잔인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꺾인 시체들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핏방울들이 허공에 떠올라 하나의 익숙한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윤아.

내 동생의 실루엣이 피의 안개 속에서 일그러진 채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며,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내 이성이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저것은 환영인가, 아니면 정말로 내 동생의 영혼이 이곳에 묶여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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