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수구 대감들께서 이미 저 먼바다 알렌 제독의 철갑 기선들에게 강화 요충지를 내주기로 서약하셨다! 네가 감히 천하를 이길 성싶으냐?"

바닥에 처박힌 사헌부 지평 임세헌이 진흙이 섞인 침을 뱉어내며 울부짖었다. 포박된 그의 관복 소매 깃 사이로 검은 탄가루가 묻어났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광기로 번득이고 있었다. 주조소 외부, 해무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강화도 앞바다에서 울려 퍼지는 헤스페루스호의 증기 고동 소리는 그 광기에 기괴한 박자를 맞추듯 대지를 흔들었다.

이진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임세헌의 일그러진 얼굴을 지나, 그 뒤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강화군수 한필주에게로 향했다. 한필주는 이미 관군들이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 대공의 사병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고 넋을 잃은 상태였다.

"이진! 네놈이 사사로이 병기를 주조하고 국법을 어지럽혔으니, 조정의 대감들께서 결코 너를 살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이 주조소의 쇳덩이들은 모조리 압수되어 조정의 소유가 될 것이야!"

임세헌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관군들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며 억지로 무릎을 꿇렸으나, 그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이진의 뒤편에서 조용히 서류첩을 정리하던 민시우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누렇게 바랜 서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왕실의 도서각에서나 볼 수 있는 정본 『경국대전(經國大典)』이었다.

"임 지평."

민시우의 목소리는 얼음물처럼 차갑고 차분했다.

"그대의 무식함이 조정을 대표하는 사헌부의 명예를 더럽히는구려. 법을 집행하는 자가 어찌 국조(國朝)의 성법(成法)조차 제대로 독해하지 못 판단 말이오?"

"무어라? 네놈이 감히 조정의 어사에게 법을 논하느냐!"

"경국대전 형전(刑典) 사송(詞訟) 조항을 똑똑히 기억하시오. '변방의 은둔한 종실이 외적의 침입 및 도적의 무리로부터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가산(家産)을 털어 방어 목적의 기물을 자가 제조할 시에는 관아에서 이를 사유물로 인정하고 함부로 적몰(籍沒)할 수 없다' 하였소. 이는 세종 조에 확립되어 성종 조에 성법으로 굳어진 우리 조선의 유구한 구례(舊例)요."

민시우가 서책의 한 구절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임세헌의 면전에 들이밀었다. 임세헌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사송 조항의 구석에 처박혀 있던, 거의 쓰이지 않던 종실 우대 및 변방 방어에 관한 율법이었다.

"더구나 이 주조소는 강화대공 저하의 사유지이며, 이곳에서 제조되는 수방 펌프와 가압 도가니는 백성들의 구휼과 영지 방비를 위한 도구일 뿐이오. 이를 역모의 병기라 참칭하여 압수하려 한 그대들의 행위야말로, 국조의 성법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왕실의 권위를 찬탈하려 한 불법(不法)이외다."

민시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쐐기처럼 임세헌의 목덜미에 박혔다. 조선은 성리학과 법치의 나라였다. 명문화된 경국대전의 성법과 조종조의 구례 앞에서는 그 어떤 세도 가문의 권세라도 명분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임세헌을 따르던 관군 장교가 완전히 칼을 내리고 고개를 숙인 이유도 바로 이 사법적 명분 때문이었다.

"이, 이 무슨 궤변을……!"

임세헌이 부르르 떨며 말을 잇지 못하자, 이진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지평 임세헌."

이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주조소 내부의 열기조차 얼려버릴 듯한 중량감이 실려 있었다.

"너는 방금 내게 아주 유용한 정보를 주었다. 조정의 수구들이 서양의 알렌 제독과 밀약을 맺고 이 강화 요충지를 내주기로 했다고 했느냐."

이진의 머릿속 톱니바퀴가 급박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안동 김씨의 영수 김좌형이 단순히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외세의 힘을 빌려 조정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그 밀약의 실체가 담긴 문서가 어딘가에 존재할 터였다.

이진은 한필주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한필주는 이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읍소했다.

"대공 저하! 살려주십시오! 소인은 그저 한양의 이조판서 대감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네놈의 관아 창고에 보관된 환곡과 장부를 뒤지면 무엇이 나올까?"

이진이 한필주의 앞으로 다가서며 차갑게 물었다.

"군수 한필주. 네놈이 지난달 한양에서 내려온 김좌형 대감의 가솔들을 은밀히 영접했다는 기록이 관아의 일기(日記)에 남아 있더군. 그들이 들고 온 상자와 한양으로 다시 가져가려던 밀서의 행방은 어디 있느냐?"

한필주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이진의 압도적인 기세와 사법적 그물망에 걸려들어 더 이상 거짓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그것이…… 이판 대감의 둘째 자제이신 승지 김성식 대감께서…… 지금 북단 선착장에서 알렌 제독의 밀사와 접선하기 위해 가마를 대기시키고 계십니다! 밀약서 원본은 그분의 품에 있습니다!"

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김좌형의 친자가 직접 밀약서를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영토를 할양하고 이권과 독점 무역권을 얻어내려는 매국의 증거가 바로 이 섬 안에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민시우."

"예, 저하."

"관군 중 신뢰할 만한 자들을 차출하여 즉시 북단 선착장으로 향하라. 포구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김성식의 가마를 압수해라. 반항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려 즉시 참해도 좋다."

"명령대로 거행하겠나이다."

민시우가 포박된 임세헌과 한필주를 싸늘하게 내려다본 뒤, 관군들을 대동하고 신속하게 주조소 밖으로 사라졌다. 그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선의 법치를 바로잡겠다는 관료로서의 집념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

두 시간 뒤, 주조소의 어두운 집무실 탁자 위에 붉은 비단으로 감싸인 가죽 가방 하나가 올려졌다.

빗물과 진흙으로 얼룩진 가방 안에서 꺼내진 것은 다름 아닌 영문과 한문으로 교차 작성된 밀약서 진본이었다. 민시우는 한양으로 도주하려던 김성식의 가마를 철저히 포위하고, 저항하던 자들의 사지를 꺾어 놓은 끝에 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진은 밀약서를 펼쳤다.

[강화도 북단 일대의 무연탄 채굴권 및 영종도 포대의 조차권을 영 제국 해군에 영구히 양도함. 그 대가로 영국 함대는 조정의 세도 가문이 지정한 상단에 한강 수로의 독점 통상권을 보장함.]

"미친 자들이군."

이진의 입에서 나지막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나라의 심장부를 서양의 함포 앞에 발가벗겨 내어주는 대가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려 한 것이다. 김좌형과 그의 패거리들은 자신들의 세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조선이 양이들의 발밑에 짓밟히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 문서 한 장이면, 한양의 안동 김씨 가문 전체를 대역죄로 옭아맬 수 있습니다."

민시우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법치주의자인 그에게 있어 이 밀약서는 세도 정치를 뿌리째 뽑아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법리적 칼날이었다.

"하지만 저하, 당장 바다에 떠 있는 저 철갑 기선이 문제입니다. 저들이 밀서가 탈취당한 것을 알게 된다면, 당장 포격을 개시할 것입니다."

민시우의 지적은 정확했다. 영국 해군의 리처드 알렌 제독은 결코 자비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밀약이 어그러졌음을 깨닫는 즉시, 그는 함포 외교의 본색을 드러내어 강화도를 불바다로 만들 터였다.

"시간이 없다."

이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만이를 불러라. 주조소로 간다."

***

주조소 내부의 열기는 이전과 달랐다. 붉은 화염이 가압 백토 가마의 틈새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장인들은 땀방울을 흘리며 거대한 황동 주물틀 주변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박도만이 가죽 앞치마를 두른 채 이진을 맞이했다. 그의 거친 얼굴에는 극도의 피로와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저하, 말씀하신 대로 황동을 기본으로 한 가압식 증기포 시제품을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박도만이 주조소 중앙에 거치된 육중한 황동제 포신을 가리켰다. 전통적인 놋쇠 주조 기법을 응용하여, 가압 백토 가마에서 뽑아낸 정밀 황동 파이프를 다중으로 덧댄 증기포였다. 화약 대신 고압의 증기를 일시에 개방하여 탄환을 날려 보내는, 이진의 지휘 아래 탄생한 중간 단계의 기계 병기였다.

"시험 사격을 해봐야 안다. 증기를 주입해라."

이진의 명령에 장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고압 증기 배관이 포신의 후미에 연결되었고, 가마에서 끓어오르는 고온의 증기가 도관을 타고 포신 내부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피스톤 밸브가 떨리며 압력 게이지가 급격히 상승했다. 이진은 눈을 감고 그의 특이능력인 '미래 공학 도해'를 활성화했다. 그의 뇌리 속에 푸른색의 3D 입체 홀로그램이 펼쳐지며 포신 내부의 압력 분포가 마이크론 단위로 시각화되어 나타났다.

[경고: 주물 내부의 미세 기포 분포율 12%. 인장 강도 부족. 임계 압력 도달 시 구조적 붕괴 예상.]

"압력을 멈춰라!"

이진이 다급하게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쿠구구구궁―!

포신 내부에서 기괴한 쇠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내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황동 포신의 중간 부분이 쩍 갈라졌다.

화르륵―!

고압의 증기가 찢어진 틈새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주조소 안은 순식간에 하얀 증기로 가득 찼고,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장인들이 바닥을 구르며 뜨거운 증기를 피하려 버둥거렸다. 박도만은 화상을 입은 손을 움켜쥔 채 찢어진 황동 포신 앞에 주저앉았다.

포신은 마치 종잇장처럼 무참하게 비틀려 찢어져 있었다. 서양의 철강 기술로 제작된 함포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 설계된 가압 증기포였으나, 조선 전통의 황동 주물 기술로는 그 엄청난 내압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안 되는 것인가……."

박도만이 화상으로 붉게 진무른 손으로 찢어진 놋쇠 파이프를 어루만지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조선의 기술로는 저 양이들의 무쇠 대포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단 말인가. 아무리 가마를 개조하고 가압을 해도, 이 놋쇠덩이로는 저들의 철갑선을 뚫기는커녕 제 풀에 터져 죽을 뿐이로구나……."

장인들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의 눈에는 서양의 압도적인 문명 앞에 마주한 원초적인 무력감과 절망이 서려 있었다.

이진은 찢어진 포신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손끝이 거친 황동의 단면을 쓸었다. 초미세 촉감이 금속의 결을 따라 느껴졌다. 구리와 아연의 결합 구조가 지나치게 성기고, 고온 고압 상태에서 결정 입계가 분리되는 현상이 명확히 감지되었다.

이대로는 헤스페루스호를 막을 수 없다. 그렇다고 당장 20세기 수준의 고탄소강을 주조하려 했다가는, 그의 뇌신경이 인과율의 격차를 이기지 못하고 타버려 각혈을 하며 즉사할 것이 뻔했다. 반드시 이 시대의 전통 기술, '토법'의 범주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이진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가 급격히 회전하며 과거의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2화에서 박도만이 흘리듯 언급했던, 조선 전통 주조의 잃어버린 비법.

"도만아."

이진이 나직하게 불렀다.

"예, 저하……."

"왕실의 의례용 종을 주조할 때 쓰이던 고석율 배합비, '권석금(權石金)'에 대해 말했었지."

박도만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황소 같은 눈망울이 흔들렸다.

"권석금이라니요? 그것은 아주 먼 옛날, 선조들께서 종의 소리를 맑게 하고 두께를 얇게 하면서도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 쓰던 비법입니다만…… 지금은 그 배합비가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저 구리에 주석과 비장의 광물을 섞었다는 구전만 있을 뿐입니다."

"그 비장의 광물이 무엇인지 내가 안다."

이진이 지시하자, 민시우가 즉시 지필묵을 가져왔다. 이진은 거침없이 붓을 놀려 도면 위에 기하학적인 수식과 배합 비율을 적어 내려갔다.

"구리 78%, 주석 20%. 그리고 여기에 미량의 규소(硅素)와 아연, 그리고 인(燐)을 포함한 백토의 미세 분말을 투입한다. 이것이 바로 권석금의 실체다."

현대 공학에서 말하는 '실리콘 청동(Silicon Bronze)'과 '인청동(Phosphor Bronze)'의 중간 형태인 고강도 특수 합금의 토법식 배합비였다. 규소와 인은 동합금의 탈산제로 작용하여 주조 시 미세 기포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금속의 인장 강도와 내식성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다. 조선의 선조들은 과학적인 원리는 몰랐을지언정,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이 놀라운 합금비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 배합비를 적용하면, 황동보다 세 배 이상 높은 압력을 견뎌내는 포신을 주조할 수 있다. 찢어지지도, 폭발하지도 않는 조선의 진정한 가압 증기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박도만은 이진이 써 내려간 배합비를 바라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단순한 도면이 아니었다. 실전된 조선의 기예가 현대의 정밀한 화학적 논리와 결합하여 완벽한 설계도로 부활한 순간이었다.

"저하…… 이것이 참으로 가능하다면, 서양 놈들의 무쇠 포보다 가벼우면서도 더 강력한 힘을 내는 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조선의 종을 만들던 쇠붙이로 저들의 배를 부술 수 있단 말입니다!"

박도만의 눈에 다시금 열정의 불꽃이 타올랐다. 절망에 빠졌던 장인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이진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서양의 군공 기술에 조선 전통 기예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결합해 나가는 과정이 주는 지적인 전율이 주조소 안의 모든 이들을 전율케 했다.

하지만 박도만은 이내 도면의 하단을 가리키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저하, 이 고석금은 일반 화력으로는 도가니 속에서 제대로 녹지 않습니다. 미량의 규소와 백토 성분이 균일하게 융합되려면, 특수한 도토 가압로 내부의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하며, 송풍의 조율이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완벽해야 합니다. 사람의 손으로는 그 미세한 불길의 흐름과 공기의 양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도가니 내부의 온도 편차가 생기는 순간, 합금은 불균일해져 유리처럼 깨져버릴 터였다. 장인들의 기술로는 제어할 수 없는 신의 영역에 가까운 정밀 제어가 필요했다.

이진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직접 손끝의 감각을 가마의 송풍 밸브에 대고, 뇌신경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도가니 내부의 물리적 변화를 1마이크론 단위로 실시간 감지하며 제어해야만 했다. 그것은 그의 수명을 갉아먹고, 극심한 신경 발작을 유발할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 바다에서 들려오는 헤스페루스호의 증기 고동 소리가 그의 심장을 압박하고 있었다.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준비해라."

이진이 가압 가마의 송풍구 앞으로 걸어가며 나지막이 명령했다.

"내가 직접 불을 잡겠다."

그의 손끝이 뜨겁게 달아오른 놋쇠 밸브 위에 닿는 순간, 그의 눈앞에 푸른빛의 도해가 거칠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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