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리에 박히던 성좌들의 인과율 서치가 거두어진다. 그들은 지상에 떨어진 성배의 소멸을 단순한 시스템 잡음으로 처리했다. 메시지 창이 허공에서 붉게 깜빡이다 바스러진다.
[알림: 원인 불명의 데이터 소실 감지.] [알림: 동기화 일시 오류로 규정합니다.]
신들의 오만은 인류의 유일한 구멍이다. 당신은 성배의 열기를 심장 깊숙이 밀어 넣는다. 타는 듯한 통증이 혈관을 타고 돌지만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이제 사냥터를 구축할 시간이다.
당신은 서대문의 무너진 상가 지하로 발걸음을 옮긴다.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어둠 속,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 사이에 한 사내와 여자가 숨어 있다. 훗날 '무형검'이라 불릴 백서진. 그리고 '방벽의 여제' 권세아. 아직 힘을 개화하지 못한 풋내기들이다.
당신이 다가서자 백서진이 녹이 슨 쇠파이프를 치켜든다.
"멈춰라. 더 오면 찌른다."
"쇠붙이로는 하늘의 괴물들을 찌르지 못한다."
당신의 건조한 목소리가 지하실을 울린다. 권세아가 백서진의 옷자락을 잡으며 아지랑이 같은 눈으로 당신을 응시한다.
"밖에 있는 저 괴물들을 아는 것처럼 말하네."
"하늘을 지배하는 성좌들이다. 인간을 유희 거리로 삼으러 왔다."
당신은 품에서 푸르게 빛나는 성배의 파편 두 조각을 꺼내 들어 보인다. 희미한 은총의 빛이 어두운 지하를 채운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그 마력 반응에 흔들린다.
"이게 뭐지?"
"너희가 신들의 목을 벨 숨겨진 칼이다. 기회를 주지."
백서진이 침을 삼킨다.
"조건은?"
"내 사도가 되어라. 그리고 사냥개의 역할을 수행해라."
긴 침묵 끝에 백서진이 쇠파이프를 내린다. 권세아 역시 떨리는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동맹이 맺어졌다.
당신은 그들을 데리고 북한산 자락의 한적한 계곡으로 이동한다. 이곳은 첫 번째 성좌, '간교한 도살자'의 화신들이 강림할 주요 길목이다. 당신은 대지에 복잡한 기하학적 궤적을 그리며 피의 장벽을 설계하기 시작한다. 성좌의 눈을 가리고, 강림하는 사냥감들의 발목을 꺾을 올가미다.
수풀 너머에서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쓴 광신도들이 냄새를 맡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놈들의 척후병이다.
백서진이 날이 선 검자루를 잡는다. 권세아의 손끝이 긴장으로 떨리기 시작한다.
"놈들이 온다. 덫은 아직 미완성인데."
사냥감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다. 활성화되지 않은 덫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신들의 눈을 속일 불꽃을 터뜨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