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가 뺨을 사정없이 때린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 순간 머릿속의 회로가 끊어진다. 분노는 조율되지 않은 엔진처럼 날뛴다. 당신은 우산도 없이 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선다. 폭우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네온사인 빛이 빗물 고인 아스팔트 위에서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타일러 박사의 클리닉으로 향하는 지름길, 외딴 골목길로 거침없이 발을 디딘다.
쿵. 등 뒤에서 막다른 골목을 막아서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린다.
돌아보기도 전에 강력한 상향등 빛이 눈을 찌른다. 헤드라이트 불빛 너머로 검은 우비를 입은 사내 셋이 신속하게 하차한다. 도망칠 곳은 없다. 퇴로는 이미 차단되었다.
"움직이지 마라." 맨 앞의 사내가 품에서 가스총을 꺼내 들며 낮게 경고한다.
당신은 주먹을 움켜쥐고 한 걸음 내딛는다. 그러나 치직 하는 파열음과 함께 목덜미에 강한 전류가 흐른다. 테이저건의 침이 살을 뚫는다. 무릎이 먼저 차가운 바닥에 닿고, 뒤이어 구정물이 얼굴을 덮친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의식이 검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눈을 뜬다. 천장의 무영등이 백색광을 쏟아내고 있다. 두꺼운 가죽 끈이 머리와 양팔, 그리고 양다리를 고정하고 있다. 금속 침대 시트가 등 가죽을 시리게 접촉한다. 소독약 냄새와 정체불명의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환자의 바이탈은 안정적입니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알루미늄 차트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한다.
익숙한 중저음, 수화기 너머의 그 목소리다. 타일러 박사가 무영등 빛 아래로 무표정한 얼굴을 드러낸다.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도, 동정도 없다. 오직 표본을 관찰하는 학자의 건조함뿐이다.
"기억의 복원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군. 시냅스 조절 인자에 미세한 결함이 있었어." 타일러가 대가 위에 놓인 주사기를 집어 들며 중얼거린다.
실린더 속에 파란색 액체가 가득 차 있다. 주사기 표면에는 작은 라벨이 붙어 있다. *[Subject-09: Reset 104]*. 당신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왼쪽 손목 안쪽에서 발견했던, 점처럼 작고 희미한 흉터의 숫자와 완벽히 일치한다. 이 지옥 같은 루프가 이미 백 번 넘게 반복되었다는 증거다.
"이게 마지막 처방이 될 겁니다." 그가 주사바늘을 당신의 경동맥 부근에 조준하며 낮게 속삭인다.
당신은 몸을 비틀어 저항하려 하지만, 고정된 가죽 끈은 단 1밀리미터의 유격도 허용하지 않는다. 바늘끝이 살을 뚫고 들어온다. 차가운 액체가 경동맥을 타고 뇌 세포 속으로 침투한다.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된다. 어제의 기억, 범인의 목소리, 방금 느낀 분노, 그리고 당신 자신의 이름마저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진다. 추적하던 실마리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시야가 서서히 회색으로 변해간다. 타일러의 무표정한 얼굴이 암전 속으로 멀어진다. 자아가 완전히 거세된 육체만이 침대 위에 남는다. 내일 아침, 당신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공포를 안은 채 눈을 뜰 것이다. 왜 두려워해야 하는지 그 이유마저 잃어버린 채, 끝없는 미로의 첫 페이지로 되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