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그랑.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흙바닥 위로 떨어진 것은 기괴한 은빛 문양이 새겨진 작은 금속 조각이었다.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그 순간 사정없이 흔들렸다. 붉은 사자의 거대한 목덜미 털 틈바구니에서 툭 떨어진 그것은, 이미 마력 정화 작용으로 인해 검게 변해 타들어 가며 부스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불길한 마력의 잔재는 여전히 공기 중에 은은한 은빛 궤적을 그리며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황실 암살부대 ‘흑사자’ 기단원들만이 사용하는 특수 은빛 추적 인장.
"이건……."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검을 쥔 그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굳어 들어갔다. 적들의 추격망이 붉은 사자의 몸에 인장을 심어 둘 만큼 이미 공방의 턱밑까지 다가와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레티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떨어진 은빛 파편을 응시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앞치마 안쪽, 가장 깊숙하고 비밀스러운 주머니를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 안에는 지난번 식탁 아래에서 몰래 주워 보관해 둔 디트리히의 푸른빛 은빛 펜던트가 차가운 감촉을 흘리며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적이 이 근처까지 왔어. 언제든 이 평화가 깨질 수 있다는 뜻이야.'
가난과 버림받음에 대한 깊은 공포가 그녀의 척추를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겨우 마련한 이 따뜻한 안식처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때, 레티샤의 흐릿한 시야 속으로 새로운 시스템 경고창이 차갑게 떠올랐다.
[시스템 메시지: 고대 마수 '붉은 사자'의 정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도감 등록: '심연의 불꽃을 품은 성스러운 사자 자리'가 완벽하게 복원되었습니다!] [보상: 온순해진 야수왕은 이제 공방의 절대적인 우호 세력이자 노동력으로 귀속됩니다.]
가계부 첫 각성 당시, 도감 목록 가장 하단에서 차갑게 잠겨 있던 거대한 사자의 실루엣이 마침내 찬란한 황금빛으로 채워지며 완벽한 형태를 드러냈다. 가슴을 옥죄던 불안감 위로, 기묘한 성취감이 얇은 막처럼 덮여왔다.
레티샤는 타들어 가는 은빛 파편을 구두 앞코로 짓밟아 뭉개버렸다.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재를 바라보며, 그녀는 흙먼지 묻은 손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일단 들어와요. 밖에서 이러고 있어 봤자 변하는 건 없으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건조했다. 디트리히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
그 불길한 파편을 태워 없애고 경계를 드높인 지 사흘이 흘렀다.
염려했던 황실의 습격은 당장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레티샤의 디저트 공방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세상에, 저게 진짜 그 붉은 사자라고?" "오체투지하며 울부짖던 그 야수왕이 저렇게 얌전하게 누워 있다니……!"
안개 숲 깊은 곳, 레티샤의 공방 앞마당에는 이른 아침부터 기묘한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인근 마을의 모험가들은 물론이고, 멀리 국경 지대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상인들까지 수십 명의 사람이 길게 줄을 늘어선 것이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몸집이 집채만 한 붉은 사자가 공방 앞마당 넓은 그늘 아래 엎드려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며 숲을 불태우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녀석은 커다란 꼬리를 바닥에 툭, 툭 치며 한가롭게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사자 씨, 조금만 비켜바바여. 레온이 물 뿌려야 대여!"
쪼그려 앉은 다섯 살배기 꼬마 레온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분무기를 칙칙 뿌려대자, 붉은 사자는 귀찮다는 듯 귀를 쫑긋거리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돌려주었다. 그 무시무시한 야수왕이 고작 어린아이의 손짓 한 번에 고분고분하게 구는 모습을 보며, 대기열에 선 모험가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였어. 숲의 마수를 빵 한 조각으로 길들였다는 소문이 진짜였다고……!" "이봐, 얼른 줄 서! 오늘 한정 수량 다 떨어지기 전에 사야 해!"
공방의 열린 창문 틈새로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안개 숲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뿜어져 나왔다.
오늘 레티샤가 준비한 디저트는 '살구 잼을 얹은 아몬드 타르트'였다.
오븐 문이 열릴 때마다 코끝을 사정없이 간지럽히는 버터의 깊고 풍부한 풍미가 숲속 가득 퍼졌다. 갓 구워져 노릇노릇한 갈색빛을 띠는 타르트지 위에는, 설탕에 조려내어 보석처럼 반짝이는 주황빛 살구 잼이 두툼하게 얹혀 있었다. 한 입 베어 물면 바삭하게 부서지는 아몬드 슬라이스의 고소한 식감과 함께, 혀끝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사르르 녹아내리는 타르트 크림의 단맛이 머릿속을 맑게 깨우는 치유의 디저트였다.
"냄새만 맡아도 마력이 안정을 찾는 것 같군." "비켜봐, 내가 먼저 살 거야!"
공방 안쪽의 주방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레티샤는 이마에 맺힌 땀을 앞치마 소매로 훔쳐내며 오븐에서 끊임없이 타르트 판을 꺼냈다. 가계부를 각성한 이후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머릿속 계산기는 쉴 새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디트리히 씨! 멈춰 서 있지 말고 4번 테이블에 물수건 가져다주세요. 그리고 7번 손님 주문 접수하시고요!"
레티샤의 날카로운 외침에, 주방 한구석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던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제국의 제1황자이자, 대륙에서 손꼽히는 소드마스터인 디트리히폰 아스터. 평소라면 황성 가장 높은 곳에서 기사단의 경배를 받고 있어야 할 그가, 지금은 린넨 천으로 덮인 나무 쟁반을 든 채 빚쟁이의 서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주문 접수까지 해야 하는 건가? 장작은 이미 마당 가득 패 두었을 텐데."
"하루 일당 50실버로 5만 루그를 언제 다 갚으시려고요? 군말 말고 움직이세요, 알바생 씨. 손님들이 기다리잖아요."
레티샤가 타르트를 접시에 담으며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디트리히는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자존심을 억눌렀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레티샤가 작성해 내민 무시무시한 치료비 및 식비 계약서와, 제 지장이 아주 선명하게 찍혀 있는 종이 장부가 둥둥 떠다녔다. 빚을 지고는 하루도 발을 뻗고 자지 못하는 황가의 기질이 원망스러웠다.
"……알았다."
결국 디트리히는 불퉁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손님들 앞에 섰다. 무시무시하게 잘생긴 얼굴에 서늘한 안광을 뿜어내는 사내가 다가오자, 주문을 하려던 모험가들이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주문은. 뭔가."
"어, 그…… 아몬드 타르트 세 개랑, 따뜻한 우유 세 잔이요……."
"대기 번호표 12번이다. 저기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조용히 기다리도록."
허리에 검 대신 행주를 찬 황자의 서빙은 기가 막힐 정도로 신속하고 정확했다. 어설프게 반항하려던 모험가들도 디트리히의 서슬 퍼런 눈빛 한 번에 얌전한 양떼처럼 변해 테이블을 지켰다. 시골 공방의 서빙 알바치고는 지나치게 위압적이었지만, 매출을 올리는 데는 이만한 효과가 없었다.
"웅차, 웅차……! 누나아, 레온이 이거 배다래써여!"
그때, 주방 문을 열고 들어온 레온이 제 몸만 한 빈 쟁반을 소중하게 안고 방실방실 웃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는 모험가들이 팁으로 쥐여준 은화 몇 개가 꼭 쥐여 있었다.
"잘했어, 레온. 아주 기특하네."
레티샤가 레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아이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뺨을 붉혔다.
"헤헤, 레온이 내일두 서빙 다 하구, 삼초니보다 돈 마니 벌어오께여!"
"내일은 더 열심히 해야 할 거야. 사자 씨도 밖에서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창밖을 내다본 레티샤의 입골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마당 한편에서는 붉은 사자가 제 거대한 몸에 맞춤 제작된 커다란 마차 수레를 매달고 있었다. 숲 외곽의 목재소에서 실어 온 무거운 가문비나무 장작들과 밀가루 포대들이 수레 위에 가득 실려 있었다. 평소라면 장정 대여섯 명이 매달려도 끄는 둥 마는 둥 했을 무게였지만, 붉은 사자는 콧방귀를 한 번 뀌더니 가볍게 흙바닥을 박차며 수레를 끌고 공방 뒤편 창고로 향했다.
"크어어엉."
가끔 짐을 나르다 귀찮아지면 꼬리를 팽팽하게 세우고 으르렁거렸지만, 레티샤가 창문 너머로 구운 타르트 꼬투리 하나를 던져주자 즉시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얌전해졌다.
제국의 황자는 테이블을 닦고 주문을 받으며 손님들의 기를 죽이고, 숲의 야수왕은 무거운 짐수레를 끌며 땔감을 나른다. 그리고 귀여운 어린 황손은 고사리손으로 쟁반을 나르며 손님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
이 기묘하고도 완벽한 공방 타이쿤 일상에, 레티샤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짜릿한 만족감을 느꼈다.
'역시 계산대로야. 공짜로 먹이고 재워줄 필요는 없지. 일한 만큼 갚게 만드는 게 가장 합리적이야.'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즈음, 마당을 가득 메웠던 손님들의 발길이 마침내 뜸해졌다. 마지막 손님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타르트 상자를 들고 나간 뒤에야 공방의 문이 바쁘게 닫혔다.
"오늘 영업 끝입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레티샤의 선언에 디트리히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고, 레온은 사자의 푹신한 배를 베개 삼아 이미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레티샤는 주방 테이블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가죽 표지의 '스위트 가계부'를 펼쳤다. 오늘 하루 동안 벌어들인 골드와 은화가 테이블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가계부의 펜촉이 스스로 움직이며 붉은 잉크로 숫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일일 정산 결과] - 판매 수익: 아몬드 타르트 120개 (6,000루그) - 음료 및 포장 서비스 수익: 2,500루그 - 붉은 사자 배달 및 용역 수익: 1,800루그 ==================================== 총매출: 10,300루그
[시스템 메시지: 축하합니다! 일일 매출액 최초 10,000루그 돌파 달성!] [보상 지급: 공방 정화 결계 2단계 업그레이드 전용 '고대 결정 충전석'이 지급됩니다.]
가계부의 책장 사이에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푸른빛을 내뿜는 정체 불명의 결정석 하나가 툭 떨어졌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결정석은 스스로 미세하게 진동하며, 공방 내부의 공기를 한층 더 맑고 쾌적하게 정화하기 시작했다.
레티샤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디트리히 씨, 이것 좀 보세요."
그녀가 결정석을 들고 공방 앞마당 기단으로 향했다. 디트리히 역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오두막의 중심을 받치고 있는 낡은 결계석 홈에 레티샤가 새로 얻은 '고대 결정 충전석'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지이잉 하는 맑은 기계음과 함께 오두막 주변을 감싸고 있던 푸른빛 정화 결계가 눈에 띄게 두꺼워지며 구형의 거대한 반투명 장막을 형성했다.
숲의 불길한 안개와 마수가 내뿜는 탁한 기운이 결계 표면에 닿자마자 하얀 연기가 되어 증발해 버렸다. 이제 그 어떤 외부의 습격이나 황실의 추적자라 할지라도, 이 장막을 쉽게 뚫고 들어올 수는 없을 터였다.
"이건…… 고대 엘프들의 결계 마법과 유사하군."
디트리히가 결계의 표면을 검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경외감이 한층 더 깊어졌다.
"이 정도 결계라면 웬만한 정예 기사단이 들이닥쳐도 며칠은 거뜬히 버틸 수 있겠어. 대체 이런 힘을 어디서 얻은 거지?"
"말했잖아요. 장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요."
레티샤는 결계의 든든한 온기를 느끼며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비로소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는 자신만의 완벽한 요새를 구축해 나가는 기분이었다. 가난과 불안으로 밤잠을 설치던 기억들이 저 멀리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
결계의 빛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레티샤의 시야가 급격하게 흐려졌다.
지독한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시작해 심장을 향해 무섭게 타고 올라왔다. 손끝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들고 있던 가계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심장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뛰며 숨 가쁜 통증이 가슴을 짓눌렀다.
"레티샤?"
디트리히의 다급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레티샤는 바닥에 주저앉지 않기 위해 기단 벽면을 간신히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핏기를 잃고 파랗게 변해 있었다. 온정적 감정 에너지와 체력을 대가로 디저트를 구워내던 부작용이, 오늘 하루 동안의 무리한 노동과 겹쳐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흐려지는 시야 우측으로, 가계부가 내뿜는 기괴한 적색 경고창이 사정없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위험: 과도한 타인 온정 지출로 인한 급격한 육체 생명력 감퇴 및 가관절 중독 발생!] [경고: 시스템의 등가교환 법칙에 따른 누적 부작용이 임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상태: 해독 불가. 현재 남은 생명력 에너지 위험 수치 도달. 즉각적인 휴식 및 처방이 없을 시 자아 상실 및 영구적 신체 마비에 빠집니다.]
"아……."
메마른 신음이 레티샤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붉게 타오르는 경고창의 글씨가 그녀의 눈동자를 물들였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며 정신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순간, 디트리히가 굳은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안아 올렸다.
그의 다급한 외침을 마지막으로, 레티샤의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