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공방의 북쪽 울타리가 붉은 불길에 휩싸여 스르륵 흘러내렸다. 단단한 참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마치 뜨거운 볕 아래 방치된 버터처럼 형체도 없이 뭉개지는 광경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숲속을 향해 헐레벌떡 도망치던 고블린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은 찰나의 파열음과 함께 완전히 단절되었다. 귀를 찌르는 정적 뒤로, 대기를 짓누르는 무겁고 축축한 열기가 오두막 마당 안쪽까지 가차 없이 밀려들었다.

"크르르르……."

안개 숲의 푸르스름한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것은 집채만 한 크기의 거대한 맹수였다.

사자였다. 그러나 평범한 사자가 아니었다. 녀석의 갈기는 황금빛 대신 시뻘건 마력의 폭염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네 발끝이 흙바닥에 닿을 때마다 치솟는 불꽃이 마른 풀잎들을 새까만 재로 만들었다. 핏빛으로 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이성을 잃고 오직 파괴만을 갈구하는 야수 특유의 잔혹함으로 번들거렸다.

"이건…… 단순한 마수가 아니군. 고대종인 '붉은 사자'다."

디트리히가 낮게 읊조리며 레티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 쥐인 투박한 훈련용 목검 끝에서 미세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평소의 오만하고 차분하던 황자의 얼굴에도 핏기가 가셔 있었다.

[경고: 폭주하는 야수왕의 마력 수치가 임계점을 돌파했습니다!] [마력 오염도: 98% (뇌 기능 마비 및 자폭 위험)] [정밀 정화 레시피의 해금이 시급합니다!]

레티샤의 눈앞에 번쩍이는 붉은 경고 창이 사정없이 깜빡였다. 에클레어 제조의 여파로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태였지만, 머릿속의 스위트 가계부는 사정없이 비상벨을 울려 댔다.

'이대로 두면 공방 전체가 잿더미가 돼.'

가난과 버림받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레티샤의 척추를 타고 차갑게 솟구쳤다. 어렵게 마련한 나의 안식처, 나의 일터, 그리고 드디어 품에 넣은 9,000실버가 들어 있는 저 가죽 주머니들까지 전부 불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손익 계산기가 머릿속에서 거칠게 굴러갔다. 이 마수를 정화하지 못하면 손실은 100%다. 살아야 했다.

레티샤는 떨리는 손으로 가계부 화면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이전에는 어두운 회색 실루엣으로 굳게 잠겨 있던 도감의 가장 하단, '심연의 불꽃을 품은 성스러운 사자 자리'의 공백이 붉은 사자의 등장과 동시에 붉은빛으로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주인을 부르는 것처럼, 그 은밀한 가계부의 틈새가 주황빛 마력을 뿜어내며 마침내 잠금을 풀었다.

[복선 조건 충족: '성스러운 사자 자리'의 정화 프로토콜이 해금되었습니다.] [특수 처방 레시피: '순백의 정화 설탕 커스터드 셔벗 케이크'를 해금합니다.] [제조 대가: 소유자의 잔여 임시 체력 80% 및 온정 에너지 30%를 강제 징수합니다. 동의하십니까?]

"……80%라고?"

레티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도 에클레어 때문에 체력이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80%를 더 빼앗긴다면,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영양실조와 심장이 굳어 버릴 듯한 무기력증이 그녀를 덮칠 터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 괴물이 뿜어내는 열기 때문에 벌써부터 오두막 처마 끝이 그을리고 있었다.

"동의…… 할게요. 당장 진행해요."

레티샤가 이빨을 악물며 전송 버튼을 내리눌렀다.

스스스스윽.

그 순간, 레티샤의 전신에서 핏기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싹 빠져나가는 듯한 극심한 오한이 휘몰아쳤다. 사지 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가슴속에 남아 있던 따스한 온기마저 가계부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스르륵 뽑혀 나가는 기분이었다. 기계적이고 냉혹한 감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크아아아아악!"

그때, 붉은 사자가 대지를 박차고 도약했다.

공중을 가르는 사자의 몸뚱이 전체가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오두막을 향해 쏟아졌다. 숨이 턱 막히는 열풍에 정원의 잔디가 단숨에 그을려 타들어 갔다.

철컥!

그 폭풍의 한가운데로 디트리히가 몸을 날렸다. 그의 온몸에서 은빛 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비록 부상과 제약으로 인해 정상이 아닌 몸이었지만, 그의 검술은 황실 최고 수준의 전신(戰神)다웠다. 투박한 임시 대검이 사자의 거대한 앞발톱과 부딪히며 귀를 찢는 굉음을 냈다.

콰아아앙!

"레티샤! 뒤로 물러서라!"

디트리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단단한 어깨가 사자의 압도적인 무게와 화염을 견뎌 내느라 부르르 떨렸다. 사자의 갈기에서 튀어 오른 불꽃이 그의 옷자락을 태웠지만, 디트리히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 속에 오직 레티샤를 지키겠다는 맹렬한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도망쳐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여긴 내가 막는다!"

"안 돼요."

레티샤는 흐려지는 시야를 억지로 붙잡으며 공방의 야외 조리대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감정이 메말라 버린 탓에 목소리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기계적인 냉정함만이 그녀의 움직임을 지배했다.

"저건 검으로 죽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뇌가 타버리기 전에 열을 식혀 줘야 해요."

레티샤는 조리대 위에 놓인 커다란 유리 볼을 움켜쥐었다.

가계부로부터 흘러나온 신비로운 정화의 마력이 그녀의 손끝을 통해 재료들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들어간 것은 얼음 계곡의 차가운 정기를 품은 순백의 얼음 설탕과 신선한 목장 우유였다. 서늘하고 청량한 우유의 향이 허공으로 퍼져 나가며 주변의 숨 막히는 열기를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혔다. 뒤이어 노란 달걀노른자가 들어가고, 천연 바닐라 빈의 깊고 따스한 향기가 공기 중에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레티샤는 필사적으로 거품기를 저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마치 온몸의 뼈마디에 모래주머니를 매단 것처럼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눈가를 적셨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더 차갑게. 더 부드럽게.'

차가운 얼음 설탕이 서서히 녹아들며, 몽글몽글하고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 소스가 완성되었다. 그것은 영하의 온도를 유지하면서도 결코 얼어붙지 않는, 신비로운 순백의 셔벗 케이크였다. 은은하고 달콤한 바닐라 향과 함께 혀끝을 알싸하게 얼릴 듯한 청량한 민트 향이 3중의 입체적인 심상으로 피어올랐다. 코끝을 스치는 서늘한 우유 향, 눈꽃처럼 하얗고 보드라운 셔벗의 신비로운 촉각, 그리고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달콤한 노란빛 크림의 시각적 조화가 극에 달했다.

"하아, 하아……."

레티샤는 완성된 셔벗 케이크를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저 앞에서는 디트리히가 사자의 맹렬한 꼬리치기를 검풍으로 간신히 막아 내며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디트리히! 비키세요!"

레티샤의 냉정한 외침에, 디트리히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그와 동시에 레티샤는 온 힘을 다해 순백의 정화 셔벗 케이크를 공중으로 투척했다.

"……먹어라, 이 탐욕스러운 야수 녀석."

케이크는 포효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린 붉은 사자의 입속으로 정확하게 빨려 들어갔다.

콰지직!

붉은 사자가 본능적으로 이빨을 내리찍었다. 차가운 셔벗 케이크가 사자의 입안에서 터지는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치이이이이익-!

마치 뜨겁게 달구어진 무쇠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 같은 거대한 수증기가 사자의 입과 코, 그리고 온몸의 털 틈새로 뿜어져 나왔다. 전신을 뒤덮고 있던 시뻘건 마력의 폭염이 눈에 띄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크르, 크르릉……?"

사자의 붉게 충혈되어 있던 눈동자가 서서히 맑은 금빛으로 돌아왔다. 극심한 두통과 영양 결핍으로 폭주하던 뇌세포들이, 영하의 온도로 주입된 정화 설탕과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의 마력 정화 작용 덕분에 빠르게 진정된 것이다.

사자는 입안에 남아 있는 달콤하고 시원한 감각에 취한 듯, 혀를 내밀어 입술 주변을 핥았다. 혀끝을 부드럽게 감싸는 달콤함과 온몸의 열을 식혀 주는 청량함에 녀석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르륵.

사자의 몸을 감싸고 있던 거친 화염이, 이제는 마치 케이크 위의 촛불처럼 은은하고 무해한 온도로 가라앉았다. 제국 역사상 최중의 재앙이자 마수들의 왕이라 불리던 고대종 '붉은 사자'의 위용은 간데없었다.

"캬우우우……."

녀석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얇고 귀여운 소리를 내며 레티샤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왔다.

"조, 조심해라!"

디트리히가 황급히 검을 가누려 했지만, 레티샤는 덤덤하게 손을 뻗어 사자의 콧등을 짚었다. 사자는 기분이 좋은 듯 거대한 머리를 레티샤의 무릎에 턱 얹고는, 몸을 웅크리며 갸르릉거리는 진동을 내기 시작했다. 마치 커다란 길고양이가 집사에게 응석을 부리는 모양새였다.

"웅아아! 사쟈다! 몽실몽실한 큰 고냥이야!"

어느새 오두막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레온이 눈을 반짝이며 달려 나왔다. 아이는 두려움도 없는지 사자의 풍성한 갈기 속으로 고사리 같은 손을 들이밀며 꺄르르 웃었다.

"누나야! 이 고냥이 너무 뜨뜻하구 보드라와아! 나두 만져볼래애!"

"레온, 위험하니까 뒤로……."

디트리히가 황당한 얼굴로 제 조카를 말리려 했지만, 붉은 사자는 오히려 레온의 손길이 마음에 드는 듯 꼬리를 더 거세게 흔들며 레티샤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비벼 댔다.

[시스템 메시지: 고대 마수 '붉은 사자'의 정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도감 등록: '심연의 불꽃을 품은 성스러운 사자 자리'가 완벽하게 복원되었습니다!] [보상: 온순해진 야수왕은 이제 공방의 절대적인 우호 세력이자 노동력으로 귀속됩니다.]

"……하아."

레티샤는 다리가 풀려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몸 안의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가계부에 지불한 체력 80%의 대가는 혹독했다. 심장이 느리게 뛰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는 온순해진 거대한 사자와, 무사히 지켜낸 공방, 그리고 바닥에 뒹굴고 있는 고블린들의 돈주머니가 보였다.

"해냈군. 믿을 수 없는 실력이야."

디트리히가 검을 거두며 레티샤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 경외감과 걱정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몸은 괜찮은 건가? 얼굴색이 유령처럼 하얗다."

"괜찮아요…… 장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얻은 게 더 많으면 이익이에요."

레티샤가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하며 사자의 거대한 머리를 둔하게 쓰다듬었다. 사자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골바람 같은 숨결을 뿜어내며 레티샤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때였다. 사자가 기분 좋게 목덜미를 흔들며 골골거리던 순간, 녀석의 풍성하고 붉은 갈기 털 깊숙한 틈바구니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칭그랑.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흙바닥 위로 떨어진 것은, 기괴한 은빛 문양이 새겨진 작은 금속 조각이었다.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그 순간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것은 황실 암살부대 '흑사자' 기단원들만이 사용하는 특수 은빛 추적 인장의 파편이었다. 이미 마력 정화 작용으로 인해 검게 변해 타들어 가며 부스러지고 있었지만, 그 불길한 마력의 잔재는 여전히 공기 중에 은은한 은빛 궤적을 그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적들의 추격망이 붉은 사자의 몸에 인장을 심어 둘 만큼, 이미 공방의 턱밑까지 다가와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부스러지는 은빛 인장의 파편을 바라보는 레티샤의 흐릿한 시야 속으로, 새로운 시스템 경고창이 차갑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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