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안개 숲의 경계선, 늙은 참나무 가지 사이에 몸을 숨긴 사내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쥔 놋쇠 망원경의 둥근 렌즈 안으로 차가운 푸른빛이 소용돌이치며 들어왔다. 오두막 마당 한구석, 반쯤 깨진 정화 결계석에 대가리를 비벼대며 온순하게 꼬리를 흔드는 거대한 얼음 늑대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잡혔다. 야수들의 사나운 눈매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달콤한 꿀을 얻어먹은 강아지처럼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깨진 유리창 너머로 홀연히 서 있는 은발 사내의 묵직한 실루엣.
사내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며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검자루를 더 깊게 움켜쥐었다.
"찾았다, 쥐새끼들. 감히 황후 폐하의 눈을 피해 이런 구석진 마수 소굴에 둥지를 틀고 있었을 줄이야."
그의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대기하고 있던 흑사자 기사단 기사들의 눈동자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안개 숲의 음산한 어둠 속에서, 차가운 살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흘 뒤 아침.
오두막의 낡은 침대 위에서 레티샤는 겨우 눈풀린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이불을 덮어쓴 것처럼 무겁고 찌뿌둥했다. 사흘 전, 상처 입은 얼음 늑대들을 정화하기 위해 초콜릿 에클레어를 구우며 스위트 가계부에 지불한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체력 15%와 온정적 감정 에너지 20%의 영구적 차감. 그 부작용은 그녀의 작고 가냘픈 육체를 가차 없이 짓눌렀다.
뺨은 눈에 띄게 까칠해졌고, 무엇보다 가슴속 한구석이 서늘하게 비어 버린 듯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기쁨도, 슬픔도, 심지어 타인을 향한 일말의 동정심마저 안개처럼 흩어져 버렸다. 오직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기계적이고 냉혹한 손익계산서뿐이었다.
'일어나야 해. 하루를 공치면 일당 50실버가 날아가고, 정화 결계석을 유지할 마력 연료비 3천 루그를 채울 길이 없어.'
레티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앞치마 비밀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차갑고 단단한 감촉. 사흘 전 디트리히가 바닥에 흘렸던, 은빛 마력을 극소량으로 수집해 진동하는 투명한 푸른빛 펜던트가 손바닥 안에서 은은하게 온기를 내뿜었다. 황실 추적자들의 마력 나침반을 교란할 수 있는 이 강력한 담보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생명줄이었다.
구겨진 앞치마깃을 단정히 정리하며 레티샤는 주방으로 걸어 나갔다.
달그락, 달그락.
부엌에서는 이미 덩치 큰 사내가 제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앙증맞은 분홍색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채 서툴게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다. 은발을 대충 뒤로 묶은 디트리히는 빗자루를 부러뜨릴 듯이 꽉 쥔 채, 흙바닥을 거의 파내듯이 쓸고 있었다.
"어이, 고용주. 일어났나."
디트리히가 낮고 대리석처럼 단단한 목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레티샤의 핼쑥한 안색을 스치자, 미세하게 미간이 좁혀졌다.
"안색이 엉망이군. 숲속의 똥개들을 치료하느라 제 몸 하나 간수 못 하는 건가?"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제 안색보다 중요한 건 오늘 디트리히 씨가 채워야 할 노동 시간입니다. 오늘 장작 열다섯 단을 더 패셔야 어제 부러뜨린 도끼 자루 값을 제할 수 있어요."
레티샤는 감정이 거세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디트리히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으나, 빚쟁이의 처지라 군소리 없이 다시 빗자루를 움직였다. 총 채무 50,000루그. 일당 50실버로 이 빚을 갚으려면 앞으로 몇 년은 이 공방의 노예로 굴러야 했다.
테이블 아래에서는 조카 레온이 작은 고사리손으로 걸레를 꼭 쥐고 끙끙대며 의자 다리를 닦고 있었다.
"누나아! 레오니 여디 아조 깨끗하게 딲았어요! 이고 바요!"
동그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자랑스럽게 행주를 흔드는 레온의 모습에 평소라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겠지만, 지금의 레티샤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잘했어, 레온. 아주 훌륭한 노동력이야. 오늘 청소 값으로 빚에서 5실버를 차감해 줄게."
"우와아! 레오니 돈 버러따!"
레온은 제 삼촌의 빚이 깎인다는 사실에 마냥 신이 나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디트리히는 참담한 표정으로 제 조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실의 정통 후계자이자 고귀한 핏줄인 아이가 고작 5실버에 영혼을 팔고 있는 꼴이라니.
바로 그때, 오두막의 낡은 나무문이 쾅 하고 폭력적으로 열렸다.
"여기가 마수들을 불러들여 사악한 주술을 부린다는 시골 구멍가게인가?"
거친 고함과 함께 먼지를 풀풀 풍기며 마당안으로 들이닥친 무리가 있었다. 붉은색 벨벳 코트를 뚱뚱한 몸에 억지로 끼워 맞춘 사내. 이 주변 영지의 약초 유통을 독점하며 온갖 부를 독식해 온 수집상, 빌이었다. 그의 뒤에는 몽둥이를 든 험악한 인상의 사내 셋이 위압적인 풍채를 자랑하며 버티고 서 있었다.
빌은 코를 킁킁거리며 오두막 내부를 더러운 오물이 가득한 구덩이 보듯 훑어보았다.
"사흘 전, 숲 밖으로 약초를 캐러 가려던 내 일꾼들이 똑똑히 보았다. 이 오두막 마당에서 흉포한 얼음 늑대 무리가 얌전하게 꼬리를 흔들며 네년이 주는 가짜 약을 받아먹는 모습을 말이다!"
빌이 레티샤를 향해 뭉툭한 손가락질을 해댔다.
"비천한 시골 고아년이 어디서 사악한 마법을 배워와 마수들과 내통하는 거지? 이건 영지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다! 가짜 약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사기를 치려 한 죄로, 당장 영주님께 고발해 네년의 사지를 묶고 이 오막살이를 잿더미로 만들어 주마!"
빌의 고함에 레온이 깜짝 놀라 디트리히의 바지자락 뒤로 숨었다.
디트리히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황실의 기백과 살기가 오두막 내부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가 빗자루를 내려놓고 빌의 목뼈를 단숨에 바스러트릴 기세로 한 걸음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레티샤가 더 빨랐다.
그녀는 다정하지만 단호한 손길로 디트리히의 단단한 팔을 가로막아 세웠다.
"뒤로 물러서세요, 디트리히 씨."
"비켜라, 고용주. 저런 천박한 장사꾼 놈의 혀를 뽑아 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안 됩니다. 당신은 하루 일당 50실버짜리 우리 공방의 연약하고 소중한 알바생이에요. 만약 폭력 사태에 휘말려 관청에 끌려가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제 손해가 얼마나 막심한지 아십니까? 게다가 다치면 치료비 청구서가 두 배로 늘어날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내가 연약하다고?"
디트리히가 황당하다는 듯 자신의 탄탄한 가슴팍과 레티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검 한 자루로 마수 군대를 도륙하던 제1황자에게 '연약한 알바생'이라는 명칭은 평생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단어였다. 하지만 레티샤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진지했다.
레티샤는 조용히 품속에서 가죽 장정의 '스위트 가계부'를 꺼내 들었다. 빌과 그의 패거리들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낡은 수첩으로 보이겠지만, 레티샤의 시야에는 투명한 마력의 진단창이 빌의 머리 위로 화려하게 떠올랐다.
[대상: 빌 (영지 독점 약초 수집상)] [영양 및 마력 상태: 극심한 불균형. 간(肝) 부위에 몽환초(환각성 약재)의 마독이 85% 이상 정체되어 있음.] [신체 증상: 손끝의 미세한 떨림, 안구 충혈, 뇌압 상승으로 인한 심각한 환각 증세 및 편집증. 침샘 조절 불가로 지속적인 타액 분비.]
레티샤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빌 씨. 남의 공방을 사기꾼으로 몰아가기 전에, 본인 몸 상태나 걱정하시는 게 어때요?"
"뭐, 뭐라고? 이 계집년이 감히 누구한테……!"
"최근 들어 밤마다 숲속에서 정체 모를 불빛이 번쩍이는 환각을 보시지 않나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가끔 손끝이 마비된 것처럼 뻣뻣해지며, 본인도 모르게 입가로 침이 줄줄 흘러내릴 텐데요."
빌의 뚱뚱한 몸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약초 유통권을 독점하겠다고 깊은 안개 숲에 직접 들어가 환각성 마약 약재인 '몽환초'를 무단으로 채취하셨더군요. 그 독기가 간에 완전히 쌓여 머리가 미쳐가고 있는 겁니다. 지금 당신이 마수와 내통했느니 어쩌느니 소리를 지르는 것도, 전부 그 몽환초 독기 때문에 뇌가 녹아내려 생긴 망상 증세예요."
레티샤는 차분하면서도 송곳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빌의 치부를 낱낱이 파헤쳤다. 빌의 뒤에 서 있던 험악한 장정들이 동요하며 서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쩐지 요즘 빌 나리께서 밤마다 혼잣말을 하시며 침을 흘리시더니……." "진짜 미치신 거 아냐?"
"닥쳐! 이 무식한 놈들아! 저년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다!"
빌이 표독스럽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그의 턱밑으로 침 한 줄기가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계부에 기록된 대로, 그의 간은 더 이상 마독을 해독하지 못해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사흘 안에 뇌가 타버려 진짜 미치광이가 될 터였다.
레티샤는 가계부 페이지를 넘겼다. 가계부의 종이 위로 황금빛 글씨가 떠오르며 새로운 레시피가 잠금 해제되었다.
[환각성 약독 정화 처방: 특제 설탕 코팅 약초 구운 도넛] [필요 재료: 정제 밀가루, 야생 민트 이슬 시럽, 흰 설탕 결정, 정화 효소] [지불 대가: 실제 체력 5%, 온정 에너지 5%]
'이 정도 대가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이 장사꾼 놈을 묶어둘 확실한 밧줄이 될 테니까.'
레티샤는 가계부에 동의의 뜻을 보내며 뒤를 돌았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세요. 당신의 그 썩어빠진 뇌를 고쳐줄 치료식을 만들어 올 테니.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그녀는 주방으로 신속하게 걸어 들어갔다.
남겨진 디트리히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빛으로 빌과 그의 패거리들을 압박했다. 거대한 흑사자 같은 기백을 풍기는 디트리히의 눈빛 한 번에, 빌의 덩치 큰 부하들은 침을 삼키며 몽둥이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주방 안, 레티샤는 신속하면서도 우아한 손놀림으로 도넛 반죽을 치댔다.
스위트 가계부의 마력이 그녀의 손끝을 타고 반죽에 스며들었다. 오븐의 열기 속에서 도넛이 노릇노릇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퍼지는 정제 버터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아로마가 가득 퍼졌고, 그 뒤를 이어 머리를 맑게 깨우는 청량한 야생 민트 허브의 알싸하고 달콤한 후각적 심상이 공방 안을 빈틈없이 채웠다.
노릇하게 구워진 도넛의 표면 위로, 맑은 민트 이슬 시럽을 여러 번 덧발랐다. 그 위에 눈꽃처럼 하얗고 고운 설탕 결정을 촘촘하게 굴려 굳혀내자, 마치 겨울철 나뭇가지에 내린 서리처럼 아름다운 결정이 도넛 표면에 맺혔다.
레티샤는 갓 구워낸 도넛을 쟁반에 담아 밖으로 나갔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시원한 약초의 향기가 오두막 거실을 메웠다. 빌은 그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막혔던 코가 뻥 뚫리고 머리가 가벼워지는 기이한 감각에 멍하니 침을 흘렸다.
"이걸 먹으세요, 빌 씨."
레티샤가 도넛을 내밀었다. 빌은 경계하며 뒤로 주춤거렸다.
"이, 이게 무슨 약이란 말이냐! 그저 평범한 빵쪼가리 아닌가! 여기에 독을 탄 게 분명하다!"
"어차피 사흘 뒤면 뇌가 녹아 죽을 목숨인데, 독약이든 뭐든 무슨 상관인가요? 정 못 믿겠다면 그냥 가셔도 좋습니다. 대신 평생 미치광이로 소문나 영지의 독점 상인 자리를 빼앗기게 되겠지요."
레티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그녀의 단호하고 기계적인 태도에 빌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결국 탐욕스럽고 비루한 생존 본능이 의심을 이겼다. 빌은 빼앗듯 도넛을 낚아채 입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와작!
유리처럼 얇고 바삭하게 얼어붙은 겉면의 설탕 코팅이 입안에서 경쾌하게 부서졌다. 달콤함이 혀끝을 스치기도 전에, 도넛 속에서 흘러나온 청량한 약초 퓨레가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흘러내렸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하며 향긋한 민트의 향이 위장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역동적인 미각의 향연이었다.
"어……? 어어어?!"
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순간,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우욱! 쿨럭! 퉤!"
빌이 바닥에 대고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그의 입에서 시커멓고 찐득한 연기 같은 마독의 타액이 한 사발 쏟아져 나왔다. 검은 독기가 바닥에 닿자마자 치익 소리를 내며 증발해 버렸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던 빌이 천천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던 손끝이 거짓말처럼 멈춰 있었다. 붉게 충혈되어 침침하던 시야가 씻은 듯이 맑아졌고, 머리를 짓누르던 끔찍한 두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머, 머리가 맑아……! 손이 안 떨어! 내가 살았다! 내가 살았어!"
빌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제 몸을 더듬었다.
이건 단순한 제과 제빵이 아니었다. 제국 최고의 치유 마법사나 고위 연금술사조차 해내지 못할, 완벽한 해독 처방이었다. 눈앞의 가녀린 시골 소녀는 신비한 의술을 지닌 기적의 치료사였던 것이다.
제 목숨을 구한 달콤한 도넛의 맛과 가공할 효능에 압도당한 빌은, 서 있는 디트리히의 무시무시한 안광과 레티샤의 차가운 눈빛 앞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지, 제가 눈이 멀어 위대한 치료사님을 몰라뵈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레티샤는 가죽 가계부를 툭툭 치며 차가운 비즈니스 미소를 지었다.
"말씀드렸잖아요, 공짜 호의는 없다고. 치료비는 확실하게 청구하겠습니다."
"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제 영지의 모든 약초를 바치겠습니다!"
"약초는 필요 없고, 앞으로 저희 공방에 제과용 최고급 백설탕 10자루와 정제 버터 5상자를 매달 무상으로 상납하세요. 만약 하루라도 늦거나 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가져온다면, 다음번 마독이 도졌을 때 해독 도넛은 없을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바치고말고요! 최고급 버터와 설탕으로 당장 사흘 안에 준비하겠습니다!"
빌은 눈물을 흘리며 레티샤가 내민 간이 상납 계약서에 지장을 꾹 찍었다. 초라한 시골 소녀의 지식을 의심하고 공방을 불태우려던 탐욕스러운 독점 상인은, 결국 기계적인 진단 역량과 달콤한 도넛 한 방에 기가 완전히 꺾여 무릎을 꿇고 값비싼 원재료를 바치는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장 나가세요. 먼지 날립니다."
레티샤의 냉정한 축객령에 빌과 그의 패거리들은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오두막 문밖으로 허겁지겁 도망쳐 나갔다.
"흥, 꼴좋다아!"
레온이 빗자루를 든 삼촌의 등 뒤에서 고소하다는 듯 메롱을 해댔다. 디트리히는 팔짱을 낀 채, 제 고용주인 레티샤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대단하군. 칼 한 자루 쓰지 않고 영지의 거상을 무릎 꿇리다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제 몸값을 해야 안전한 집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레티샤는 가계부를 정리하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비록 감정 에너지 소모로 가슴속은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공방의 가장 귀한 원재료인 최고급 설탕 10자루를 공짜로 확보했다는 사실에 머릿속 주판알은 경쾌하게 굴러갔다. 이로써 공방의 재정 자립도가 한 단계 격상된 셈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빌 일행이 마당을 벗어나 안개 숲길로 허겁지겁 사라진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사방의 공기가 기이하게 후끈거리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오두막 창틀에 서려 있던 얇은 성에가 순식간에 녹아내려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끼에에엑! 카아악!
동쪽 골짜기 방향에서 수천 마리의 새들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채 반대편으로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이어 숲의 깊은 안개를 붉게 태워버릴 듯한, 거대한 검은 회오리 구름 모양의 열풍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오두막을 향해 밀려오기 시작했다. 땅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격렬한 야수의 포효가 온 안개 숲을 뒤흔들었다.
디트리히가 즉시 검자루를 쥐며 레티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동쪽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좁혀졌다.
"이 기운은…… 단순한 마수가 아니다."
안개 숲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붉은 화염의 장막 너머로, 이성을 잃고 광폭화한 거대한 야수왕의 실루엣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