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서슬 퍼런 쇳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스쳤다.

빗물과 피가 한데 뒤섞여 끈적하게 달라붙은 대검 검날이 레티샤의 하얀 목덜미 바로 위에 멈춰 섰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쇠의 감촉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방금 전까지 완전히 혼절한 줄 알았던 남자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자줏빛 불꽃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갈라진 목소리에는 뼈를 찌르는 듯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남자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빛 마력이 오두막 안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 순간, 레티샤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붉은색 경고창이 사납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 긴급 경고 !!!] [환자의 은빛 마력 폭주가 임계점에 달했습니다. 3분 이내에 폭주를 진정시키지 못할 경우, 환자의 무차별 공격으로 공방이 파괴됩니다.] [첫 제과 조제(미션: 철분 및 마력 억제 비스킷) 실패 시, 소유자는 즉사(卽死)합니다.]

'즉사라고?'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겨우 빙의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워가려는데, 첫날부터 목이 날아가거나 시스템 페널티로 죽게 생겼다.

하지만 레티샤는 두려움에 떠는 대신, 가늘게 떨리는 남자의 손목을 가만히 응시했다. 은빛 마력이 흘러나오는 그의 피부 밑으로 핏줄이 검붉게 터져 나가고 있었다. 거친 호흡 사이로 비치는 입술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독한 영양 결핍과 철분 부족, 그리고 제어되지 않는 마력의 역류.

머릿속에서 가계부의 정밀 진단서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저 남자는 지금 허세를 부리고 있을 뿐이다. 찌르기도 전에 제풀에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계산은 간단했다. 여기서 저 남자를 살려내고, 그 대가를 철저히 받아내면 된다.

"칼 치우시죠. 찌르기도 전에 그쪽 심장이 먼저 터질 테니까요."

레티샤는 목에 닿은 칼날을 무시한 채,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뭐라……?"

"그 몸으로 검을 휘둘렀다간, 10초도 안 돼서 혈관이 전부 터져서 피를 토하고 죽을 거예요.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라면 얌전히 계세요."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틈을 타 레티샤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살을 에는 듯한 피로감이 전신을 덮쳤지만, 혀끝을 강하게 깨물며 제빵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위트 가계부 특수 레시피 해금: 헤이즐넛 비스킷] - 효능: 혈액 내 철분 급속 충전 및 은빛 마력 안정화. - 대가: 소유자의 육체 체력 40%, 온정적 감정 에너지 35% 지불.

'지불해. 당장 지불할 테니까 레시피 열어!'

머릿속으로 소리치자마자, 가슴 언저리에서 차가운 기운이 빠져나가며 온몸의 힘이 스르륵 풀렸다. 눈앞이 순간 아득해지고,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작은 여유마저 메마른 사막처럼 굳어버리는 감각이 들었다. 기쁨도, 두려움도 일시적으로 거세된 듯한 기묘한 무감각.

하지만 레티샤의 손놀림은 기계적일 정도로 정확하고 신속했다.

그릇에 차가운 버터를 담고 밀가루를 체 쳐 넣었다. 스크래퍼를 쥔 손이 잘게 떨렸지만, 버터가 녹기 전에 잘게 다져 거친 모래 상태로 만들었다. 고소하게 볶아진 헤이즐넛을 거칠게 빻아 반죽에 섞자, 오두막 안의 비린내를 덮는 묵직하고 고소한 향이 피어올랐다.

뒤에서 남자의 거친 신음과 함께 쇠붙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반죽에 얼음물과 설탕 시럽을 소량 섞어 뭉친 뒤, 얇게 밀어 오븐 팬에 올렸다. 그 위에 은빛 마력을 억제해 줄 수 있는 푸른색 설탕 결정을 아낌없이 뿌렸다.

화덕의 불꽃이 타오르며 고소한 열기가 공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타닥, 타다닥.

비스킷이 구워지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아기자기하게 울려 퍼졌다. 오븐 틈새로 흘러나오는 향은 실로 매혹적이었다. 헤이즐넛의 기름지고 풍부한 견과류 향이 코끝을 진하게 자극했고, 녹아내리는 버터의 부드럽고 짭조름한 풍미가 혀끝에 침을 고이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푸른 설탕 결정이 열을 받아 캐러멜화되면서 풍기는 달콤하고 알싸한 향이 오두막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조제 완료! 헤이즐넛 설탕 결정 비스킷 (치유 등급: A)] [페널티가 일시 보류됩니다.]

레티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갓 구워낸 비스킷 쟁반을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대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의 은빛 마력이 이성을 집어삼키기 직전이었고, 붉은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먹어요."

레티샤는 아직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는 비스킷을 남자의 입술 사이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읍……! 무슨 짓을……!"

남자는 반사적으로 반발하려 했으나, 입안으로 부서져 들어온 비스킷의 맛에 순간 얼어붙었다.

바삭-!

경쾌하게 부서지는 식감과 함께, 헤이즐넛의 깊고 묵직한 고소함이 혀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뒤이어 씹히는 푸른 설탕 결정이 입안에서 톡톡 터지며, 가슴 속의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차갑게 식혀주는 청량한 단맛을 뿜어냈다. 쌉쌀하면서도 달콤하고, 고소하면서도 시원한 이색적인 맛의 조화가 그의 입안을 지배했다.

"어……?"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비스킷을 삼키자마자, 타들어 가던 식도와 위장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혈관을 터뜨릴 것처럼 날뛰던 은빛 마력이 거짓말처럼 뼈마디 속으로 얌전히 수렴되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를 찌르던 극심한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손끝에 힘이 돌아왔다.

디트리히는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폭주하던 마력이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제국의 그 어떤 고위 신관도 해내지 못한 마력 정화를, 이 허름한 오두막의 소녀가 구운 과자 나부랭이가 해낸 것이다.

그는 떨리는 눈빛으로 레티샤를 올려다보았다. 사과를 해야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오랫동안 황자로 살아온 그의 오만이 툭 튀어나왔다.

"너…… 내게 무엇을 먹인 거지? 황족에 대한 위해는 즉참에 처해질 수 있는 대죄…… 윽!"

하지만 호기로운 도발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마력은 안정되었으나 뒤늦게 몰려오는 극심한 피로와 영양실조의 여파가 그의 덩치 큰 몸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말을 말던가……."

레티샤가 한숨을 쉬며 대꾸하기도 전에, 디트리히는 대검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완전히 바닥에 엎어졌다.

"삼똔……!"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있던 꼬마 레온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기어 나왔다. 레온은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와 디트리히의 옷자락을 흔들다가, 이내 레티샤의 치맛자락을 꼬물거리는 손으로 꼭 붙잡았다.

"냥이 누나아…… 삼똔 뜌근 고야아? 삼똔 아뿌면 앙대어……."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서툰 발음으로 울먹이는 꼴이 제법 가련했다. 레티샤는 주머니에서 남은 비스킷 조각을 꺼내 레온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안 죽어. 그냥 피곤해서 자는 거야. 아기도 이거 먹고 얌전히 있어."

"움…… 바샤캐에…… 꼬소해어……."

레온은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입안에서 바삭하게 씹히는 비스킷의 달콤한 맛에 금세 양 볼을 실룩거리며 안정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보며 레티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신을 짓누르는 탈력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지만, 가계부를 정리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스르륵.

허공에 스위트 가계부의 투명한 페이지가 펼쳐졌다.

[소유자 상태: 극심한 영양 및 감정 에너지 고갈 (경고: 휴식 필요)] [치료 대상 영양 진단 및 처방 결과 보고] - 환자 1 (디트리히): 은빛 마력 폭주 98% 정화, 철분 수치 정상화 진행 중. - 환자 2 (레온): 마력 불안정 수치 완화, 심리적 안정 상태 도달.

그리고 그 아래로, 레티샤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붉은색 글씨들이 한 줄씩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긴급 처방에 따른 가계부 정산 내역] - 특수 약재(박하 슈가 시럽, 헤이즐넛 마력 억제 비스킷) 원가: 5,000 골드 - 영양 정밀 진단 및 마력 정화 기술료: 15,000 골드 - 야간 응급 진료 및 기밀 유지 수수료: 20,000 골드 - 소유자의 생명력 및 온정적 에너지 등가교환 보상비: 10,000 골드 -------------------------------------------------- [총청구 금액: 50,000 골드]

"오, 오만 골드……?"

레티샤의 입에서 헛바람이 빠져나왔다.

제국의 보통 시골 가정이 1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도 100골드를 모으기 힘들었다. 5만 골드면 가만히 앉아서 이 평화롭고 안전한 안개 숲의 공방을 성채 수준으로 증축하고도 남을 천문학적인 거금이었다.

가계부는 아주 냉혹하고 정확하게 손익을 계산해 주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저 잘생긴 황자님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빚더미 위에 누워 있는지 꿈에도 모를 터였다.

'돈이 없다면 몸으로 때워야지.'

레티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녀의 머릿속 주판알이 탁, 탁 소리를 내며 맹렬하게 굴러갔다. 황족이라 돈이 많을 것 같지만, 지금은 황후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는 도망자 신세다. 품에 금화 몇 닢이나 남아 있으면 다행이겠지.

그렇다면 이 5만 골드를 어떻게 회수해야 할까?

공방의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달 들어가는 마력 연료비, 무거운 밀가루 포대를 나르고 장작을 패야 하는 고된 노동, 그리고 앞으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공방을 지켜줄 튼튼하고 무력 있는 보디가드.

눈앞에 누워 있는 이 제국 최강의 전신이라 불리는 황자는, 아주 훌륭하고 값싼 고급 노동력이 될 자질이 충분했다.

레티샤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거친 양피지 한 장과 붉은 인묵을 꺼냈다.

사각사각.

펜촉이 양피지 위를 가볍게 미끄러지며, 아주 악랄하고 꼼꼼한 조항들로 가득 찬 계약서를 작성해 나갔다.

[채무 변제 및 노동 고용 계약서] - 채무자: 디트리히 폰 아스터 외 1명 - 채권자: 레티샤 - 채무액: 금화 50,000루그 (또는 이에 상응하는 노동력) - 변제 방식: 일 채무 차감액 50실버. 단, 공방의 서빙, 청소, 장작 패기, 마수 격퇴 등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 무단이탈 시 채무액은 복리로 증액됨.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의 빗소리가 점차 가늘어지고, 숲의 안개가 오두막 창문을 토닥일 때쯤 바닥에 누워 있던 디트리히가 신음을 흘리며 가늘게 눈을 떴다.

"으음……."

그는 상체를 일으키며 이마를 짚었다. 몸이 가벼웠다. 뼛속까지 시리던 마력의 폭주 흉터가 완벽하게 아물어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의 눈앞에,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티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곁에는 조카 레온이 입가에 헤이즐넛 가루를 묻힌 채 레티샤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디트리히는 헛기침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정신이 드는군. 험한 꼴을 보였다. 내 신세를 졌으니, 훗날 내 정당한 신분을 되찾으면 반드시……."

"훗날 같은 소리 하고 계시네."

레티샤가 콧방귀를 뀌며 양피지 서류를 그의 코앞에 툭 던졌다.

"그 전에 당장 청구서부터 해결하시죠, 황자님?"

디트리히는 의아한 표정으로 양피지에 적힌 숫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50,000이라는 숫자를 본 순간, 그의 고결한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과자 몇 조각과 약초 시럽의 값이 어찌 오만 골드란 말이냐! 제국 수도의 대성당 신관에게 치료를 받아도 이 정도는 안 나온다!"

"신관들이 마력 폭주를 정화할 수 있던가요? 게다가 저희 공방 기밀 유지비와 제 목숨을 위협한 대가까지 합친 아주 '합리적인' 가격인데요."

레티샤는 한 걸음 다가서며, 붉은 인묵을 묻힌 계약서를 디트리히의 콧등 앞까지 들이밀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밤안개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돈 없으시죠? 그럼 몸으로 때우셔야죠. 여기 지장 찍으세요, 알바생 씨."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