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오랜만이다, 강태현."

최민우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찢어졌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검은 이빨 길드의 암살자들은 이미 살기어린 눈빛으로 단검을 고쳐 쥐고 있었다. 대낮인데도 가상 영역이 걷힌 경매장 앞 광장은 마치 심해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행인들의 소리는 아득히 먼 곳의 메아리처럼 차단되어 있었고, 오직 서늘한 쇠비린내만이 코끝을 찔렀다.

"네놈이 무슨 버그를 써서 기어 올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다. 여기서 네놈의 그 건방진 클래스를 통째로 찢어발겨 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그림자가 솟구쳤다.

검은 이빨 길드의 정예 암살자 다섯 명이 공기를 가르며 쇄도했다. 그들의 단검 끝에는 시퍼런 독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목표는 태현의 목줄기와 심장. 0.1초 뒤면 살점을 뚫고 뼈를 으스러뜨릴 궤적이었다.

유설아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려던 바로 그 찰나.

"어딜 감히 우리 대주주님께 숟가락을 들이밀어!"

태현이 왼손 엄지손가락에 끼고 있던 투박한 황동 반지를 가볍게 튕겼다.

웅웅웅웅!

공간이 진동하며 태현의 신형을 중심으로 푸르스름한 육각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한도진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개량했던 전설급 방어 장구, [영혼의 수호방벽 반지]의 숨겨진 기능이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깡! 깡! 까강-!

암살자들의 단검이 태현의 옷깃에 닿기도 전에, 강철보다 단단한 마력 장벽에 부딪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이가 빠진 단검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뭐, 뭐야?!" "방어막이라고? 이 속도의 기습을 반응했다고?!"

암살자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기습의 대가들이 펼친 완벽한 협공이 일개 상인의 장신구 하나에 허무하게 막혀버린 것이다.

태현은 장벽 안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나지막이 실소를 흘렸다.

"민우야."

태현의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차분했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밑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믿었던 동료라는 허울 좋은 이름 뒤에서 자신의 등을 찌르고, 모든 아이템과 명예를 강탈해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최민우의 그 비열한 얼굴. 그때의 공포와 멸시가 태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불길처럼 타올랐다.

1원 한 장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광적인 구두쇠의 본능이, 자신을 향해 칼을 들이댄 자들을 향한 살의로 치환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한테 주는 선물치고는 너무 날카롭잖아?"

"치, 치장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일 뿐이다! 전원 무차별 난사해! 저 막 뒤에 숨은 쥐새끼의 마력이 바닥날 때까지 두들겨 패란 말이다!"

최민우가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소리쳤다. 그의 명령에 암살자 수십 명이 일제히 품에서 투척용 표창과 쇠뇌를 꺼내 들었다.

그들이 무기를 겨누는 순간, 태현의 머릿속에 시스템의 붉은 경고등이 요란하게 깜빡였다.

[경고! 적대적 정화 인공지능 '데메테르'가 플레이어의 비정상적 전투력을 감지하고 실시간 제약 패치를 준비합니다.] [전투 구역 내에서의 거래 행위에 대한 실시간 차단 필터가 활성화됩니다.]

'데메테르 이 집요한 년이 또 밥숟가락 얹으려고 하네.'

태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싸움판이 벌어지자마자 거래 시스템을 차단해 자신을 고립시키려는 적대적 AI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하지만 태현은 이미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태현이 품에서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깨진 돌 조각 하나를 꺼냈다. 유설아가 일전에 던져주었던 골동품 더미 속에서 찾아낸 비밀 병기였다.

[영역 이동형 가상 계약서 파편 (더미 데이터)] - 등급: 미분류 (시스템 비공개 데이터) - 효과: 사용 시 반경 50m 이내의 공간을 시스템 감시망이 미치지 않는 '임시 가상 계약 영역'으로 강제 전환합니다. 데메테르의 실시간 추적 및 거래 규격 제한 필터를 3분간 완전히 무력화합니다.

"설아 씨가 준 쓰레기 중에서 쓸 만한 게 딱 하나 있었지."

"어? 내, 내가 준 게 저기 왜 있어?!"

유설아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태현은 망설임 없이 파편을 움켜쥐고 으깨버렸다.

콰아아앙!

파편이 부서지며 뿜어져 나온 회색빛 안개가 순식간에 광장 전체를 덮쳤다. 대낮의 풍경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깨져나가며, 사방의 벽과 바닥이 무수히 많은 디지털 계약서 양식으로 뒤덮인 기묘한 가상 공간이 펼쳐졌다.

데메테르의 붉은 경고창이 지직거리며 노이즈 속으로 사라졌다. 실시간 감시망의 회로를 완벽하게 우회한 것이다.

"이게... 무슨 공간이지? 마법인가?"

최민우가 당황해 주춤거리는 사이, 태현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겨 빛나는 황금빛 계약서 한 장을 허공에 띄웠다.

"자, 신사 숙녀 여러분. 무단으로 남의 사유지에 침입해서 살상용 무기를 휘두른 소감이 어떠십니까?"

태현의 입꼬리가 악마처럼 말려 올라갔다.

"합의하셔야죠?"

"합의? 미친 소리 하지 마라! 저놈의 목을 따면 끝나는 일이다!"

암살자 대장이 단검을 꼬쳐 쥐고 돌진했다. 그러나 그가 태현의 수호방벽을 향해 무기를 내지르는 순간, 허공에 떠 있던 황금빛 계약서가 붉게 타오르며 그들의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을 형성했다.

[특수 계약: '무분별한 사유재산 무단 침해에 따른 비물질 배상 합의 거래'가 체결되었습니다.] [피계약자(검은 이빨 길드원 일동)가 공격 행위(불법 물리력 행사)를 개시함에 따라, 본 계약서의 모든 면책 약관 및 강제 징수 조항에 소급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뭐, 뭐라고?!"

암살자들의 몸이 허공에 굳어버렸다. 그들의 발끝에서부터 시뻘건 불길이 타고 올라오며 시스템 메시지가 그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계약 조건에 의거하여, 피계약자들의 장비 옵션을 '벌금 수수료' 명목으로 몰수합니다.] [클래스 '거래의 지배자' 고유 권능 발동!] [수수료율: 99%]

"아아악! 내 몸이... 내 장비가!"

암살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착용하고 있던 시커먼 가죽 갑옷과 시퍼런 단검에서 은색과 금색의 마력 입자들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마력 입자들은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며 그대로 강태현의 인벤토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수료 압류 완료!] - 검은 이빨 정예 암살자 세트의 '물리 방어력' 99% 영구 압류. - 독니의 단검 세트의 '은신 시 치명타 확률' 99% 영구 압류.

태현의 눈앞에 그들의 장비 정보가 가차 없이 실시간으로 갱신되어 표 레이아웃으로 나타났다.

| 대상 장비 | 원래 성능 | 압류 후 성능 (남은 1%) | 귀속 대상 | | :--- | :--- | :--- | :--- | | **그림자 가죽 갑옷** | 물리 방어력 +1,200 | 물리 방어력 **+12** | 강태현 (영구 귀속) | | **독니의 암살 단검** | 치명타 확률 +45% | 치명타 확률 **+0.45%** | 강태현 (영구 귀속) |

"어, 어라...? 왜 갑자기 몸이 이렇게 가볍고... 추운 거지?"

암살자 대장이 허탈한 목소리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수백만 골드를 호가하던 전설급 가죽 갑옷은 이제 시장통에서 파는 얇은 삼베옷만도 못한 종이 쪼가리가 되어 있었다. 단검 역시 닭강정 꼬치용 나무 막대기 수준의 공격력으로 전락해 버렸다.

"내, 내 방어력이 12라고? 야, 너 방어력 몇이야?" "나... 8인데? 지나가는 슬라임한테 한 대 맞아도 의문사할 수준인데?!"

암살자들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주저앉았다. 최상위권 랭커들을 소리 소문 없이 암살하던 살인 병기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초보 유저보다 못한 깡통 덩어리가 된 것이다.

태현은 인벤토리에 실시간으로 쌓이는 미친 듯한 능력치 능력치 더미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아주 쫀득하네. 이 정도 옵션이면 시장에 내다 팔아도 집 한 채는 사겠어."

그때, 바닥에 떨어진 암살자 대장의 가방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주머니 틈새로 붉은빛을 내뿜는 정교한 기계 장치와 양장본 장부가 보였다.

태현의 매서운 눈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 획득: **판게아 연합의 비밀 자금 장부 암호키** - 설명: 판게아 연합의 총수가 관리하는 극비 비자금 계좌와 미등록 차원 영토의 보안망을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이거 아주 묵직한 건수가 걸렸군.'

태현은 조용히 암호키를 품속 깊은 곳에 찔러 넣었다. 최민우의 배후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치명적인 열쇠가 제 발로 굴러 들어온 셈이었다.

"강태현... 네놈이 진짜 미쳤구나! 감히 판게아 연합의 장비를 건드려?! 이건 전면전이다!"

최민우가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분노보다 짙은 공포가 서려 있었다. 자신이 데려온 정예 암살자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무력화된 현실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전면전? 민우야, 넌 아직도 네가 나랑 대등한 줄 아는구나."

태현이 천천히 최민우를 향해 걸어갔다. 수호방벽을 유지한 채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사신이었다.

"옛날에 네가 내 뒤통수 치고 낄낄거릴 때,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딱 하나야. 이 새끼가 가진 모든 걸 합법적으로 털어먹고 길바닥에 나앉게 만들겠다."

"이, 이 괴물 같은 새끼...!"

최민우는 뒷걸음질 치다 제 발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판게아 연합의 간부라는 위세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비참한 꼴이었다.

"도진 씨, 저기 깡통들 시끄러우니까 망치 뒤쪽으로 가볍게 재워줘요."

"오냐! 안 그래도 이 몸의 걸작을 모독한 놈들이라 아주 고깝던 참이다!"

한도진이 신이 나서 거대한 대장간 망치를 치켜들었다. 방어력이 0에 수렴하게 된 암살자들은 한도진이 가볍게 휘두른 망치 자루의 바람만 맞고도 그대로 흰자위를 드러내며 기절해 나자빠졌다.

"히익!"

최민우는 그 모습을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헐레벌떡 도망치기 시작했다.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광장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꼬락서니를 보며 태현은 굳이 쫓지 않았다. 어차피 암호키를 손에 넣은 이상, 그놈의 숨통을 죄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니까.

"와, 진짜 지독한 인간... 아니, 지독한 대주주님이시네요. 저 비싼 장비 옵션을 통째로 깡통으로 만들다니."

유설아가 혀를 내두르며 태현을 바라보았다.

"비싸니까 터는 거지, 설아 씨. 공짜로 굴러들어 온 99%인데 안 먹으면 벌 받아."

태현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생긋 웃었다. 사방에 널브러진 고수들의 장비가 완벽하게 발가벗겨진 채 뒹굴고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완벽한 사이다이자, 철저한 인과응보였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은 채 3초를 가지 못했다.

우우우우웅-!

갑자기 가상 계약 영역의 하늘이 붉은색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영역을 유지하던 더미 데이터의 유효 시간이 다하기라도 한 듯, 회색 안개가 걷히며 시스템의 기계적인 적색 경고음이 광장 전체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삐--! 삐--! 삐--!

[경고! 시스템 허용 한도를 초과한 극단적 수수료 착취 행위 감지!] [적대적 정화 인공지능 '데메테르'의 강제 개입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시스템 독점 정화 감시 지수가 임계값에 도달합니다!]

태현의 눈앞에 나타난 감시 지수 상태창이 미친 듯이 붉은빛을 뿜어냈다.

[현재 감시 지수: 100%] [시스템 정화 프로토콜 '강제 삭제' 단계에 진입합니다.] [소멸을 방지하기 위해 강제 사제 구역(디버깅 전용 특수 격리 던전)으로 플레이어의 영혼을 즉각 이송합니다.]

"어...? 대주주님! 머리 위에 빛이!"

유설아의 다급한 비명이 들렸다.

태현의 발밑에서부터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시스템이 강제로 캐릭터를 삭제하기 직전, 격리 구역으로 영혼을 강제 압송하는 연쇄 전송 마법진이었다.

"태현 동지! 이 빛은 대체 뭔가?!"

한도진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태현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공간 자체가 분리되고 있었다.

'쳇, 데메테르 이 년이 기어코 100%를 채우자마자 강제 이송을 때려버리는군.'

태현은 밀려오는 강력한 공간 이동의 충격 속에서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야가 하얗게 멀어지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의 심연 속으로 몸이 추락하는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강제 사제 구역 '심연의 정화소'에 진입합니다.] [제한 시간 내에 디버깅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할 경우, 캐릭터 정보가 영구 삭제됩니다.] [남은 시간: 03:00:00]

차가운 기계음이 귓가를 때리는 동시에, 태현의 몸이 완전히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