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버그 유저 놈이 감히 나의 사냥개를 물어 죽였구나. 전 대륙의 판게아 길드원들에게 명한다.]
하늘을 찢고 울려 퍼지는 지고의 목소리. 붉은 성운처럼 일렁이는 판게아 총수의 거대한 환영이 눈을 부릅떴다. 설원의 만년설이 그 음파에 휩쓸려 사방으로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강태현. 저놈의 목에 현상금 100억 골드를 걸겠다. 보이는 즉시 사지를 찢어 내 앞에 대령하라!]
100억 골드. 아테리아 대륙의 중소 영지 서너 개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귓가를 찌르는 시스템 알림음이 전 대륙에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듯 울렸다.
[경고! 전 대륙 대상의 '초거대 척살령'이 발령되었습니다!] [대상자: 강태현] [현상금: 100,000,000,000 Gold] [판게아 연합 소속의 모든 랭커 및 척살 부대가 당신의 좌표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설원의 메마른 나뭇가지들이 부르르 떨렸다. 사방에서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붉은빛의 추적 마법들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이쪽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었다. 수만 명의 등 뒤에 칼을 찬 포식자들이 100억 골드라는 고깃덩어리를 보고 침을 흘리며 달려오는 형국이었다.
"태현 씨! 미쳤어요?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할 때가 아니라고요!"
귓가에 설치된 장거리 통신구 너머로 유설아의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 터져 나왔다. 그녀의 숨소리는 이미 한계를 넘은 듯 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지금 판게아 본대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떠돌이 랭커들까지 전부 눈 뒤집혀서 그쪽 좌표로 가고 있어요! 100억 골드면 아테리아 은퇴하고 현실에서 강남 빌딩을 통째로 올릴 돈인데 당연히 눈이 안 뒤집히겠냐고!"
"설아 씨, 시끄럽습니다. 귀 아파요."
태현은 귀가 먹먹하다는 듯 통신구를 살짝 떼어내며 귀를 후벼 팠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최민우가 소멸하며 남긴 척살자 가방에 머물러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가방 내벽을 더듬자, 차갑고 단단한 금속제 열쇠가 만져졌다.
[판게아 연합의 비밀 자금 장부 암호키]를 확보한 순간이었다.
태현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100억 골드의 현상 수배범이 된 상황에서도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 이 암호키로 털어먹을 판게아의 비자금 액수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1원짜리 한 장의 손해에도 발작을 일으키는 구두쇠의 회로가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망? 내가 왜 도망을 갑니까? 다 제 발로 기어 들어와 줄 귀한 고객님들인데."
"미쳤어, 진짜 미쳤어! 저 인간 저럴 줄 알았어!"
유설아가 이마를 탁 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농담할 시간 없어요! 지금 당장 거길 벗어나지 않으면 10초 뒤에 정예 기사단 마법 폭격에 가루가 될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챙길 건 확실히 챙기고 가야죠."
태현은 최민우의 유품인 전설 등급 반지와 척살자 가방을 인벤토리에 쓸어 담았다. 그리고 품 안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반투명한 양필지 조각을 꺼내 들었다.
유설아가 예전에 던져 주었던 쓰레기 골동품 더미 속에서 찾아낸 그것. 시스템의 눈을 속이고 공간 자체를 비틀어버리는 버려진 더미 데이터였다.
[아이템 정보] | 항목 | 상세 정보 | | :--- | :--- | | **이름** | 영역 이동형 가상 계약서 파편 | | **등급** | 미분류 (더미 데이터) | | **효과** | 지정된 계약 영역 내의 물리적 공간 좌표를 일시적으로 일그러뜨려 감시망을 우회함. 데메테르의 실시간 거래 필터를 통과하는 우회 통로를 개설함. |
"설아 씨가 준 이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 드디어 밥값을 할 때가 왔네요."
"내 골동품이 왜 쓸모가 없어! 아무튼 빨리 써요!"
태현이 가상 계약서 파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지지직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양필지가 붉은 불꽃을 피우며 타올랐다. 순간, 설원의 차가운 공기가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쪼개지며 태현의 신체를 감싸 안았다.
쿠구구구둥─────!
그가 서 있던 좌표 위로 수십 개의 메테오가 떨어져 내리기 직전, 태현의 신체는 이미 공간의 틈새로 완전히 가라앉아 사라진 후였다.
***
차원의 틈새 시장.
시스템의 눈길이 닿지 않는 어둡고 축축한 무법지대이자, 태현의 임시 아지트가 있는 곳이었다.
스산한 푸른빛이 감도는 아지트의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유설아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태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태현 씨! 제정신이에요? 전 대륙 척살령이라고요! 판게아 총수 한신우가 직접 마이크 잡고 소리 지른 거 못 들었어요? 이제 아테리아 대륙에서 우리가 발붙일 곳은 없어요!"
"발붙일 곳이 없으면, 공중에 떠서 장사하면 됩니다."
태현은 태연하게 먼지 쌓인 의자에 앉아 가죽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판게아의 비밀 자금 장부 암호키를 툭 던져 놓았다.
"그리고 왜 발붙일 곳이 없습니까? 오히려 판게아 연합의 모든 랭커가 내 위치를 찾아 헤맨다는 건, 마케팅 비용을 한 푼도 안 쓰고 전 대륙에 내 존재를 홍보했다는 뜻인데."
"그 홍보 효과의 대가가 목이 날아가는 거잖아요!"
"목이 왜 날아갑니까? 나한테는 최고의 파트너들이 있는데."
태현의 시선이 아지트 안쪽에서 거대한 모루를 두들기고 있던 거구의 사내에게 향했다.
천재 대장장이 한도진. 그는 태현의 시선을 받자마자 흠칫 놀라며 망치를 멈추었다. 평소의 오만하고 위풍당당하던 기색은 어디 가고, 눈동자에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강태현, 네놈이 무슨 대형 사고를 쳤는지는 굳이 설명 안 해도 대륙 전체가 떠들썩하니 잘 알겠다. 하지만 내 용광로의 불꽃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아무리 판게아 놈들이 몰려온다 한들, 이 천재 대장장이 한도진의 걸작 방어구가 있다면……!"
"자존심 세우는 건 좋은데, 도진 씨. 판게아가 끌고 오는 게 뭔지 알면 그런 소리 안 나올 겁니다."
태현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놈들, 이번에 영지 방어용 결전 병기인 '신급 파멸포' 세 대를 끌고 이쪽 좌표로 오고 있습니다. 도진 씨가 만든 방어구로 그 포격을 버틸 수 있습니까?"
"뭐, 뭐라? 신급 파멸포라고?!"
한도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신급 파멸포. 성벽 하나를 단 한 발로 날려버리는 아테리아 대륙 최강의 공성 병기였다. 아무리 뛰어난 제작자라 한들, 개인의 방어구로 그 무지막지한 파괴 에너지를 감당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그 무식한 괴물 놈들이 기어이 미쳐 돌았구나! 고작 유저 하나 잡겠다고 영지 수호 병기를 꺼내 들다니!"
"고작 유저 하나가 아니라, 자기들의 생명줄인 비밀 장부 암호키를 쥔 유저니까요."
태현이 암호키를 손가락 끝으로 튕겼다. 금속음이 아지트의 침묵을 깨뜨렸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습니다. 도진 씨가 예전에 내게 준 아주 재미있는 선물이 있으니까."
태현이 인벤토리에서 작고 정교한 붉은색 우표 한 장을 꺼냈다. 우표 표면에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들의 형상이 아주 미세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게…… 설마 내가 줬던 [영혼의 용광로 우표]인가?"
한도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렇습니다. 가치가 높은 제물을 태울수록 그 성능이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 장치죠. 도진 씨는 이걸로 전설 등급 무구를 만들 때 쓰라고 줬겠지만, 난 좀 더 효율적인 곳에 쓸 생각입니다."
"효율적이라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그 순간이었다.
쿠우우우웅─────!
아지트 전체가 거대하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푸른빛으로 유지되던 차원의 장벽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왔네요."
태현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를 털어먹으러 온 불청객들이."
***
차원의 틈새 시장 외곽.
차원의 장벽이 허물어진 틈새로 수천 명의 판게아 정예 군단이 빽빽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거대한 황금빛 포신을 자랑하는 세 대의 '신급 파멸포'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포신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압도적인 파괴 에너지가 대기를 열기로 일그러뜨렸다.
"강태현!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당장 나와라!"
판게아의 선봉장이자 랭킹 15위의 거구 기사, '바르토'가 대검을 땅에 꽂으며 포효했다.
"총수님의 명이다! 네놈의 목을 가져가고, 네가 훔쳐 간 비밀 장부의 암호키를 회수하겠다!"
아지트의 문이 열리고, 태현이 유유히 걸어 나왔다. 그의 뒤로 사색이 된 유설아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한도진이 따르고 있었다.
태현은 몰려든 적들의 군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는 그들이 강력한 군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걸어 다니는 거대한 골드 주머니이자, 최고의 수수료 제물로 보일 뿐이었다.
"바르토 씨. 멀리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빈손으로 오셔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귀하고 값비싼 파멸포까지 선물로 들고 오시다니요."
"닥쳐라, 이 사기꾼 놈이! 죽어서 네 무덤에서나 헛소리를 지껄여라! 전 포수, 조준!"
바르토의 외침과 함께 세 대의 신급 파멸포가 태현을 향해 포신을 꺾었다. 포구에 모여드는 붉은 마력의 구체가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그 파괴적인 에너지는 아지트 전체를 흔적도 없이 증발시키기에 충분했다.
"발사하라!!!"
콰아아아아앙─────!!!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세 줄기의 붉은 열선이 태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대지가 녹아내리고 공간이 찢어지는 파괴의 광경.
"태현 씨!!!"
유설아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태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품에서 꺼낸 [영혼의 용광로 우표]를 허공에 가볍게 던졌다.
"도진 씨. 잘 보세요. 전설적인 아이템은 이렇게 쓰는 겁니다."
태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계약 발동. 제물의 등가 교환을 신청한다."
화르륵!
공중에 뜬 우표가 붉은 화염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그와 동시에, 태현이 아지트 사격 지대에 미리 전개해 두었던 마법 장벽이 우표의 불꽃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메시지] [히든 클래스 '거래의 지배자' 권능이 발동합니다!] [특수 매개체 '영혼의 용광로 우표'의 분해 권능이 가동됩니다.] [적의 공격 에너지 '신급 파멸포의 화력 수치'를 거래 제물로 지정합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태현을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세 줄기의 붉은 파괴 광선이, 아지트 장벽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멈추어 섰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허공에 굳어버린 열에너지가, 서서히 굳어 가더니 투명한 보석의 결정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잉─────!
"어, 어어?! 내 파멸포의 에너지가 흡수되고 있어?!"
포수들이 경악하며 제어 장치를 두들겼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신급 파멸포의 초고밀도 파괴 수치가 정밀한 순수 마력 보석 원재료로 용해 분해되며 우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가치는 고스란히 태현의 거래 인터페이스로 환산되었다.
[분해 완료!] [신급 파멸포 3대의 화력 에너지 분해 가치: 4,500,000,000 Gold 등가물] [계약 조항 적용: 수수료 99% 강제 회수!]
"수수료는 제때 제때 떼어 가는 게 정석이죠."
태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당신은 거래의 지배자로서 상대방의 공격 가치 중 99%를 수수료로 갈취하였습니다.] [갈취한 가치 수치: 4,455,000,000 Gold 등가물] [이 가치를 아지트 방어 시스템 '귀축 가치 장벽'에 영구 주입합니다!]
우우우웅─────!!!
아지트를 둘러싸고 있던 허름한 장벽이 순식간에 황금빛의 거대한 성벽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그 표면에는 뚫을 수 없는 절대적인 수수료의 구속력이 깃들어 있었다.
[귀축 가치 장벽이 300% 추가 가동되었습니다!] [경고: 이 장벽을 물리적으로 타격할 시, 타격한 대미지의 99%가 반사되며 타격자의 장비 내구도를 영구적으로 압류합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바르토가 멍하니 황금빛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들이 쏜 최강의 결전 병기 포격이, 고작 종이 한 장에 분해되어 적의 방어벽을 신화 등급 수준으로 강화해 주는 제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고맙습니다, 바르토 씨. 덕분에 아지트 리모델링 비용을 아주 크게 아꼈네요."
태현이 생긋 웃으며 손을 털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도진은 턱이 땅에 닿을 정도로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내, 내 우표를 저런 괴물 같은 방식으로 쓰다니……! 저놈은 대장장이가 아니라 진짜 악마가 분명하다!"
유설아 역시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대단하네요. 돈 안 들이고 성벽을 세우는 창조 경제라니. 징글징글한 구두쇠 인간 같으니라고."
"칭찬은 넣어 두세요. 아직 정산이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태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바르토와 판게아 군단을 쏘아보았다.
"너희 총수 한신우가 나한테 100억 골드의 현상금을 걸었죠? 그렇다면 나도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해줘야 예의 아니겠습니까."
태현이 인벤토리에서 검고 무거운 석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석판 표면에는 기괴한 버그 코드가 실시간으로 흐르고 있었다.
[주소 왜곡 석판]
수수료 정화 던전의 깊은 곳에서 고대 몬스터를 때려잡고 얻어낸, 시스템의 좌표 공간을 강제로 덮어씌우는 희대의 버그 아이템이었다.
동시에, 태현의 머리 위에 적색 경고등이 격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위험!] [현재 '독점 정화 감시 지수': 99.8%] [감시 지수가 100%에 도달하기 직전입니다! 시스템 총체 '데메테르'가 강제 영구 삭제 프로토콜을 준비합니다!] [당신을 정화하기 위한 '심연의 정화소' 공간 포탈이 아지트 상공에 개방됩니다!]
쿠릉! 쿠릉!
하늘이 쪼개지며, 차원의 틈새 시장 상공에 거대한 차원의 구멍이 뚫렸다. 그 안에서 아테리아 대륙의 모든 버그와 오염을 태워버리는 푸른색의 정화 레이저가 충전을 시작했다. 스치기만 해도 캐릭터의 영혼까지 소멸시키는 시스템의 절대적인 멸망의 빛이었다.
"꺄악! 저게 뭐야! 진짜 삭제되는 거 아니에요?!"
유설아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태현 씨! 지수가 거의 100%라고요! 이대로 가면 진짜 끝장이에요!"
"끝장이라니요. 좌표만 잘 찍으면 이것만큼 완벽한 병기가 없는데."
태현이 주소 왜곡 석판을 꽉 쥐었다. 그의 손 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석판의 버그 코드를 활성화했다.
"판게아 연합의 비밀 자금 장부 암호키. 거기에 등록된 판게아 총수의 본진 좌표를 이 석판에 동기화한다."
[동기화 완료!] [강제 정화 구역의 타겟 좌표가 '차원의 틈새 시장'에서 '판게아 연합 정예 호화 작전실'로 강제 변경됩니다!]
"뭐, 뭐라고?!"
바르토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태현이 석판을 바닥에 강하게 내리쳤다. 석판이 산산조각 나며, 상공에 열려 있던 시스템 정화 포탈의 좌표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지지지직─────!!!
하늘에 뚫려 있던 거대한 정화의 구멍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저 멀리 판게아 연합의 본진이 있는 수도 영지 상공으로 순식간에 이동해 갔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하늘을 뒤흔드는 무자비한 푸른색의 정화 레이저가 판게아 연합의 호화 작전실과 본 성채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아아아악!!! 본진이! 우리 본진이 정화되고 있다!!!"
"시스템 오염 구역 지정이라니! 대피해! 당장 대피해!!!"
수화기 너머로 판게아 본진에 있던 랭커들의 처절한 비명과 폭발음이 섞여 들어왔다. 시스템이 내린 무자비한 정화의 불꽃은 판게아 연합이 수년간 쌓아 올린 철옹성 같은 성채와 무기고를 문자 그대로 '존재 자체를 삭제'시키며 녹여버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손가락 움직임으로, 자신을 죽이려던 적들의 본진을 시스템의 손을 빌려 완벽하게 초토화해 버린 것이다.
"꺼억."
태현이 가볍게 트림을 하듯 소리를 냈다.
"아주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군요. 청소비는 따로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판게아 연합 본진의 방어 설비 및 무기고 99%가 소멸하였습니다.] [소멸한 물리적 자산의 영혼 가치가 당신의 계정으로 귀속됩니다.] [독점 정화 감시 지수가 정화 구역 양도로 인해 45%로 급격히 하락합니다.]
"완벽하네."
태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전 대륙 척살령이라는 최악의 위기를, 복선 아이템들의 기가 막힌 조합과 시스템 규칙의 맹점을 역이용한 사기적인 거래로 단숨에 역전시킨 순간이었다. 바르토를 비롯한 판게아의 정예 군단은 넋이 나간 채 공포에 질려 태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 통쾌한 해소의 순간도 잠시였다.
갑자기 대기가 얼어붙을 듯 차갑게 식어 내렸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푸른빛의 정화 레이저가 기괴한 소음을 내며 일시 정지 상태로 허공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태현의 눈앞에,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거대하고 붉은 시스템 경고창이 시야 전체를 가득 메우며 나타났다.
[!!!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 감지 !!!] [경고: 클래스 '거래의 지배자'가 시스템의 근간 제어권을 침해하였습니다.] [인공지능 '데메테르'가 비상 권한을 발동합니다.]
위이이이이잉─────!
귀가 먹먹할 정도의 사이렌 소리가 전 대륙의 유저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테리아 대륙 전체 시스템의 강제 셧다운 프로토콜을 개시합니다.] [남은 시간: 00:05:00] [서버 셧다운 후, 불법 거래 대상자 '강태현'의 캐릭터 데이터는 영구 격리 및 영포(Zero) 화 처리됩니다.]
"……어?"
유설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셧다운이라고요? 데메테르가…… 게임 자체를 꺼버리겠다고 하는 건가요?!"
태현의 입꼬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적대적 AI 데메테르가 규칙 위반을 잡다 못해, 아예 판 자체를 엎어버리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 것이다.
5분 뒤, 서버가 닫히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지만 태현의 눈동자 속에는 공포 대신, 오히려 전율에 가까운 광기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판을 엎으시겠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