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한 흙먼지가 설원의 칼바람에 쓸려 나갔다.
부서진 보스방의 철문 잔해 너머로,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면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값비싼 마법 실크로 직조된 붉은 코트, 그리고 특유의 얄팍하고 오만한 미소.
과거 천벌 길드 시절, 태현의 등 뒤에 서슴없이 칼을 꽂아 넣고 그의 모든 커리어와 영혼을 시궁창에 처박았던 주역.
최민우였다.
"꼴이 제법 우스워졌네, 강태현?"
최민우가 가볍게 턱을 까딱이며 웃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붉은빛을 발하는 봉인석이 기괴한 마력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주변을 에워싼 판게아 연합의 정예 병력만 해도 어림잡아 삼백 명이 넘었다. 설원의 매서운 한기 속에서도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태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 붉은 코트를 입은 최민우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동안 쥐새끼처럼 잘도 숨어 다니더니, 드디어 대가리를 내미는구나."
태현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차분했다. 그러나 그 평온함 아래에는 뼈를 얼려 버릴 듯한 살의가 끓어 넘치고 있었다.
"쥐새끼라니. 말이 심하잖아, 옛 친구한테."
최민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나 그 순간, 최민우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태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넝마 조각이나 걸치고 다니던 버그 유저 놈이 아니었다. 3,500이라는 경이로운 대마법 전투력을 몸에 두른 태현의 눈빛은, 마치 심연 그 자체를 마주하는 듯한 소름 끼치는 위압감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다.
최민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억지로 태연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안에서 무슨 해괴한 짓을 벌였는지는 관심 없다. 하지만 시스템의 룰은 절대적이지. 네놈의 그 사기적인 클래스, 여기서 통째로 압수해 주마."
"압수?"
태현이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민우야. 네가 대가리가 나쁜 건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는데, 여전해서 다행이다. 남의 등의 빨대를 꽂아 연명하던 기생충 새끼가 이제는 법 집행관이라도 된 줄 아나 보지?"
"이 새끼가...!"
최민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격식을 차리려던 가식의 가면이 단 한마디에 쩍쩍 갈라졌다.
"과거 천벌 길드에서 네놈이 나한테 했던 짓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태현의 서늘한 시선이 최민우의 심장을 꿰뚫을 듯이 박혔다.
"내가 피땀 흘려 잡은 보스의 소유권을 가로채고, 날 시스템 오류 유저로 허위 신고해 나락으로 보냈을 때. 그때 네가 그랬지? '세상은 원래 가진 자의 편'이라고."
"그래, 그랬지! 그리고 그 사실은 지금도 변하지 않아!"
최민우가 광기 서린 눈으로 소리쳤다.
"판게아의 힘이 어떤지 똑똑히 보여줘라! 수호 성벽 전차대, 전진!"
최민우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설원의 대지가 쿵쿵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삼백 명의 대열 사이로, 거대한 강철 장갑을 두른 고대 마도 전차 세 대가 거친 증기를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수호 성벽 전차 - 판게아 커스텀] - 등급: 전설 (Legendary) - 특수 효과: 물리 및 마법 피해 95% 감쇄, 절대 장벽 전개. - 설명: 판게아 연합의 영지 방어용 최종 병기. 일반적인 유저의 공격력으로는 기스조차 낼 수 없다.
성벽 전차의 포신이 일제히 태현을 향해 조준되었다. 기계적인 마력 충전음이 귓가를 찢을 듯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붉은색 경고 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경고! 적대적 AI '데메테르'가 구역 내 비정상적인 마력 흐름을 감지했습니다.] [거래액 제한 패치 필터가 작동합니다. 현재 구역 내에서의 모든 개인 거래 및 권능 발동 수치가 제한됩니다.]
"하하하! 데메테르의 시스템 감시망이 널 옥죄고 있다! 네놈의 그 사기 계약서 따위, 이 구역에선 한 장도 발동하지 못해!"
최민우가 승리를 확신한 듯 젖혀진 목소리로 웃어댔다.
하지만 태현의 입꼬리는 오히려 더 높이 올라갔다.
"민우야. 내가 손해 보는 장사 안 한다고 했지?"
태현이 인벤토리에서 빛이 바랜 골동품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서 흘러나온 것은 오래전 유설아가 던져주었던 먼지 쌓인 더미 데이터 조각이었다.
[영역 이동형 가상 계약서 파편]이 태현의 손끝에서 푸른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스스스스─!
순간, 태현을 둘러싼 물리 공간의 경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데메테르가 쳐놓은 거래액 제한 필터의 그물이 기괴하게 꼬이며 틈새가 벌어졌다. 가상 계약서 파편이 물리 공간 자체를 계약 전용 우회 구역으로 재규격화해 버린 것이다.
"뭐, 뭐야?! 시스템 패치가 왜 안 먹혀?!"
최민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하나 더."
태현이 품에서 기괴한 룬 문자가 새겨진 돌판을 꺼내 들었다. 수수료 정화 던전의 고대 몬스터를 때려잡고 얻었던 버그형 장비, [주소 왜곡 석판]이었다.
"너희 판게아 새끼들은 항상 대가리가 나빠서 문제야. 좌표를 찍어주면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기어들어 오니까."
태현이 주소 왜곡 석판에 마나를 주입했다.
[아이템 '주소 왜곡 석판'이 발동합니다!] [강제 정화 구역의 시스템 좌표를 재설정합니다.] [좌표 변경: 심연의 정화소 내부 -> 판게아 연합 전초기지 정예 작전실 및 현장 포위망 중심부]
우우우웅─────!!!
설원 전체를 감싸고 있던 정화 던전의 붉은 삭제 장막이, 최민우가 이끄는 판게아 정예 병력의 발밑으로 고스란히 이동했다. 던전의 살인적인 정화 에너지가 고스란히 최민우의 군대를 덮친 것이다.
"아, 악! 내 마나가...!" "갑자기 왜 던전 디버프가 여기서 터지는 거야?!"
삼백 명의 정예 랭커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무적이라 자랑하던 수호 성벽 전차의 절대 장벽이 시스템 정화 에너지에 부딪혀 유리창처럼 쩍쩍 갈라졌다.
"자, 이제 정산 시간이다."
태현이 가볍게 오른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단순한 마나가 아니었다. 정화 던전에서 흡수한 수십 명의 마나통과 스킬 정수, 그리고 3,500에 달하는 압도적인 대마법 전투력이 하나의 거대한 청색 광포로 화해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설원을 가르는 거대한 파멸의 빛이 정면으로 뻗어나갔다.
물리 및 마법 피해를 95% 감소시킨다던 수호 성벽 전차들은, 태현의 일격이 닿는 순간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먼지바닥의 가루처럼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전차의 잔해가 공중으로 비산하며 포위망의 절반을 쓸어버렸다.
단 한 방이었다.
단 일격에 판게아 연합이 자랑하던 최종 병기들이 고철 쓰레기로 변했다.
"이, 이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최민우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뒤로 물러섰다. 그의 화려한 실크 코트는 흙먼지와 전차 파편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살아남은 대원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기 바빴다.
태현이 천천히 걸어가 최민우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차가운 그림자가 최민우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민우야. 살고 싶지?"
태현의 나직한 음성에 최민우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 태현아! 내가 잘못했다!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길드 윗선에서 시킨 일이었단 말이야! 네가 원하면 내가 가진 판게아 지분도 나눠줄게! 돈이 필요하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까, 제발...!"
"지분이라."
태현이 품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계약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마침 잘 됐네. 네가 가진 그 지분, 내가 합법적으로 수수료 처리해 줄게."
"뭐...?"
"네가 판게아 연합의 배후 세력들과 맺은 '배후 핵심 지분 서약서' 말이야. 그거 연대보증 조항이 아주 기가 막히게 짜여 있더라고. 한쪽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면, 신체의 모든 소유권과 영혼의 가치까지 보증인에게 귀속된다는 조항."
태현이 계약서를 최민우의 면상 앞에 들이밀었다.
[거래의 지배자 권능 발동!] - 대상: 최민우 (판게아 연합 간부) - 계약 명목: 과거 채무 및 배신에 따른 위약금 정산 - 적용 세율: 99% (합법적 수수료 갈취)
최민우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계약서에 적힌 조항들이 스스로 살아서 움직이더니, 최민우의 영혼과 신체 구속권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난 서명 안 했어! 서명 안 했다고!"
"서명? 네가 판게아의 이름으로 낸 모든 서약서에 이미 내 권능이 우회 등록되어 있었거든. 네 배후 척살자 가방에서 털어낸 비밀 자금 장부 암호키가 아주 유용하게 쓰였지."
태현이 비웃었다.
최민우의 가슴팍에서 붉은 마력의 줄기가 뿜어져 나와 태현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최민우가 가진 캐릭터의 능력치, 장비의 옵션, 그리고 판게아 내에서의 모든 지분 권한이었다.
"아아아악!!! 내 레벨이! 내 장비가!!!"
최민우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온몸이 서서히 모래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이자는 복리로 계산하는 게 상식이야, 민우야. 네가 나한테 뺏어간 것에 비하면 이건 아주 저렴한 수수료지."
[계약 성사!] [상대방 '최민우'의 모든 소유권 및 캐릭터 데이터 99%를 수수료로 회수합니다.] [영구 귀속 완료.]
최민우의 비명소리가 설원의 바람 속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오직 한 줌의 검은 재와, 그가 차고 있던 전설 등급 반지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태현은 허리를 숙여 반지를 주워 올렸다.
"수고했다, 쓰레기 새끼."
태현이 반지를 인벤토리에 집어넣는 순간이었다.
우르르릉─────!!!
갑자기 하늘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며, 대지가 쪼개질 듯한 진동이 일어났다.
최민우가 사라진 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마력이 공중으로 치솟더니, 거대한 홀로그램 환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한 왕좌에 앉아 있는, 얼굴을 가린 사내의 형상이었다. 판게아 연합의 총수이자 아테리아 대륙의 절대 권력자.
환영의 사내가 태현을 내려다보며, 하늘을 울리는 목소리로 노효(怒吼)를 터뜨렸다.
[건방진 버그 유저 놈이 감히 나의 사냥개를 물어 죽였구나. 전 대륙의 판게아 길드원들에게 명한다.]
사내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강태현. 저놈의 목에 현상금 10억 골드를 걸겠다. 보이는 즉시 사지를 찢어 내 앞에 대령하라!]
대륙 전체를 뒤흔드는 초거대 척살령의 선포.
그 붉은 환영을 올려다보는 태현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입꼬리가 기괴하게 뒤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