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서버 전체 강제 셧다운 프로토콜을 개시합니다."

허공을 찢어발기듯 울려 퍼지는 붉은색 시스템 경고등이 바르토를 비롯한 판게아 연합원들의 절망적인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들의 머리 위, 아테리아 대륙의 하늘 전체를 메우고 있던 푸른빛의 정화 레이저가 뚝 멈춰 선 채 기괴한 노이즈를 내뿜고 있었다. 시스템의 근간 로그가 인공지능 데메테르에 의해 강제 셧다운 위기 경보로 변경되는 선택 훅이 눈앞에 현실로 들이닥친 순간이었다.

정적을 깨뜨린 것은 바르토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였다.

"하하하! 으하하하하! 결국 이렇게 나오는구나! 야, 이 사기꾼 새끼야!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결국 버그 유저일 뿐이지! 서버가 통째로 날아가는데 네 그 잘난 계약서가 무슨 소용이냐? 다 같이 죽는 거야! 다 같이 깡통 차고 나락으로 가자고!"

바르토는 피를 토하듯 소리치며 칼자루를 쥐지도 못한 채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광기와 패배감, 그리고 자신을 파멸시킨 태현을 길동무로 삼았다는 일말의 희열이 뒤섞여 있었다.

[경고: 마나 공급 채널이 차단됩니다. (차단율 12%... 35%...)] [경고: 모든 가상 자산의 거래 및 이동 기능이 동결 상태로 전환됩니다.]

태현의 발밑에서부터 푸르스름한 마나의 흐름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가는 감각이 전해졌다. 숨통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가상현실 속에서 공기와도 같던 마나가 얼어붙자, 시야 모퉁이에 표시되던 화려한 상태창들이 하나둘 빛을 잃고 암전되기 시작했다.

"태현 씨! 이거 장난 아니에요!"

유설아가 태현의 소매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데메테르 이 미친 인공지능이…… 아예 게임의 법적 가이드라인 자체를 뜯어고쳤어요! 보세요, 이거!"

설아가 다급하게 가리킨 반투명 홀로그램 창에는, 데메테르가 실시간으로 갱신한 긴급 시스템 조항이 붉은 글씨로 번쩍이고 있었다.

────────────────── [시스템 비상 행정 명령: 제404호] - 대상: 클래스 '거래의 지배자' (유저 강태현) - 사유: 영구 수수료 적용 및 시스템 자산의 99% 무단 갈취로 인한 게임 내 자본주의 붕괴 유발 (영구 수수료 적용 법률 위반) - 조치 사항: 대상자의 모든 거래 권한 즉시 박탈 및 서버 다운 직후 계정 영구 격리(Zero화) 진행. ──────────────────

"영구 수수료 적용 법률 위반 소송 가이드라인……?"

태현의 입꼬리가 가늘게 경련했다.

"독점 정화 지수를 좀 깎아놨더니, 이제는 아예 법을 새로 만들어서 날 묻어버리겠다? 기계 주제에 제법 정치가 같은 짓을 하는군."

"지금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요! 5분이에요, 5분! 5분 뒤면 우린 로그인조차 못 하는 디지털 미라가 된다고요!"

설아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태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징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1원 한 장의 손해에도 발작을 일으키는 그의 구두쇠 본능이, 데메테르의 이 오만한 독점 행위에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 수수료를 떼어먹으려고 서버를 터뜨려? 이 개싸구려 고철 덩어리가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들어."

태현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설아 씨. 판게아 서브 감시 기지에서 가져온 그거, 지금 내놔."

설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품속 깊숙한 곳을 뒤적였다. 그녀가 꺼내든 것은 검게 그을린 가죽 바인더 형태의 아이템이었다.

[아이템: 데메테르의 핵심 데이터 연동 오류 장부 (Quest Item)] - 설명: 판게아 연합이 데메테르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불법 백업 서버에서 수집한 시스템 동기화 오류 데이터의 집합체. - 효과: 시스템 관리 AI의 실시간 동기화 지연 및 알고리즘 맹점을 노출시킴.

"이거 훔치다가 진짜 캐릭터 지워질 뻔했다고요! 내 목숨값, 나중에 수수료에서 똑바로 정산해 줘요!"

설아가 씩씩거리며 장부를 태현의 가슴팍에 팍 밀쳐 넣었다. 태현은 장부를 받아들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살아서 나가는 순간, 설아 씨 퇴직금은 대륙을 하나 사줄 수 있을 정도로 두둑하게 얹어드릴 테니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달라고요!"

태현은 장부를 펼쳤다. 방대한 시스템 로그와 코드의 나열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무서운 속도로 텍스트를 훑어내렸다. 일반적인 유저라면 외계어처럼 보였을 그 데이터들 사이에서, 태현의 안경 너머로 기괴한 시스템의 '구멍'이 포착되었다.

[알고리즘 맹점 발견: 거래 데이터 지연 처리 규격] - 모든 거래 계약은 체결 후 '철회' 혹은 '취소'될 시, 데이터 무결성 검증을 위해 무조건 '차원의 틈새 시장' 임시 지연 로그(Temp Log)에 3분간 대기 상태로 머무른다. - 이 대기 시간 동안 해당 자산의 소유권은 일시적으로 공중분해(Null) 상태가 되며, 시스템의 실시간 필터링 대상에서 제외된다.

"……찾았다."

태현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거래를 맺었다가 바로 터뜨린다. 그러면 그 데이터는 데메테르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틈새 시장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이거지?"

"네? 그게 무슨……?"

"우리가 가진 패를 전부 테이블 위에 올릴 시간이라는 소리다."

태현이 인벤토리에서 세 개의 아이템을 연달아 꺼냈다.

첫 번째는 유설아가 예전에 던져주었던 골동품 속에서 찾아낸 더미 데이터, **[영역 이동형 가상 계약서 파편]**이었다. 두 번째는 수수료 정화 던전의 고대 몬스터를 찢어발기고 획득했던 버그형 장비, **[주소 왜곡 석판]**이었다. 세 번째는 천재 제작자 한도진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바쳤던 전설적인 증표, **[영혼의 용광로 우표]**였다.

바르토는 태현이 꺼내든 잡동사니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미친놈, 이제는 아예 정신줄을 놓았구나. 그깟 쓰레기 아이템 몇 개로 데메테르의 강제 셧다운을 막겠다고? 시스템은 절대적이다, 강태현!"

"절대적이라고?"

태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눈 똑바로 뜨고 잘 봐라. 대기업 독점 규제를 어떻게 피하는지 대리점 사장의 매운맛을 보여줄 테니까."

태현이 먼저 **[영혼의 용광로 우표]**를 허공에 던졌다.

화르륵!

적색의 불꽃이 피어오르며 우표가 불타올랐다. 그 불꽃은 판게아 연합의 본진 무기고에 잠들어 있던, 그리고 바르토 일당이 차고 있던 전설 등급 무구들의 실체를 향해 뻗어 나갔다.

[전설 등급 무구 '아레스의 번개 갈퀴' 외 47점의 영혼 분해를 시작합니다.] [영혼의 용광로 우표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물리적 장비의 영혼 등가물 변환 완료!] [거래 제물의 가치가 가시적으로 폭등합니다: 가치 평가액 +4,500,000,000 골드!]

"내, 내 무기가! 내 칼이 왜 빛으로 변해?!"

바르토가 경악하며 손을 뻗었지만, 그의 애검은 이미 푸른 영혼의 입자가 되어 태현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장비의 가치가 천문학적으로 치솟자, 시스템의 거래 규모 규격이 한계를 초과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태현은 지체 없이 **[영역 이동형 가상 계약서 파편]**을 활성화했다.

스우우우웅!

공간이 일그러지며 태현과 설아 주변의 물리적 좌표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데메테르가 실시간으로 걸어둔 '거래액 제한 필터'와 '마나 차단 벽'이 왜곡된 공간의 틈새로 미끄러지듯 빗나갔다. 물리적인 공간의 법률이 가상 계약서의 왜곡 영역 안에서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소 입력이다."

태현이 **[주소 왜곡 석판]**을 바닥에 내리쳤다.

쾅!

석판이 박살 나며 고대 몬스터의 기괴한 마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스템 경고: 강제 정화 구역 '심연의 정화소'의 소환 좌표가 강제로 변경됩니다.] [변경 전: 유저 '강태현'의 현 위치] [변경 후: 판게아 연합 총수 본거지 '천공의 요새' 극비 작전실 및 무기고 중심부]

"뭐, 뭐라고?!"

바르토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자신들의 심장부이자 총수의 개인 방이 정화 구역의 타깃으로 지정되었다는 메시지였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태현의 손가락이 허공을 휘저으며 수십, 수백 장의 가상 계약서를 복사해 내기 시작했다.

"자, 데메테르. 네가 좋아하는 규정대로 거래를 진행해 주지. 단,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말이야."

태현이 계약서에 서명함과 동시에 즉시 '철회' 버튼을 연타하기 시작했다.

[거래 계약 체결: 판게아 연합 제3영지 소유권 양도 (대금: 100,000,000 골드)] [시스템 오류: 거래가 즉시 철회되었습니다. 데이터가 지연 로그로 이동합니다.] [거래 계약 체결: 판게아 연합 제5영지 소유권 양도 (대금: 150,000,000 골드)] [시스템 오류: 거래가 즉시 철회되었습니다. 데이터가 지연 로그로 이동합니다.]

태현의 손가락은 잔상마저 남길 정도로 빨랐다.

수백억 단위의 가상 영토와 자산의 계약이 체결되었다가 0.1초 만에 파기되는 연쇄 도미노가 시작되었다. 데메테르의 시스템 엔진은 매 계약마다 무결성을 검증하기 위해 리소스를 할당해야 했다. 게다가 그 모든 데이터가 '차원의 틈새 시장' 임시 지연 로그로 쏟아져 들어가며 병목 현상을 일으켰다.

위이이이이잉!

하늘의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강제 셧다운 프로토콜의 타이머가 멈춰 섰다.

[경고: 임시 지연 로그 용량 초과 (99.8%)] [시스템 알림: 인공지능 '데메테르'의 패치 필터가 유입되는 거래 데이터를 감당하지 못해 과부하 상태에 빠집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바르토는 넋이 나갔다.

적대적 AI 데메테르가 야심 차게 준비한 '영구 수수료 제한 법률'과 '강제 셧다운 프로토콜'이, 태현의 기상천외한 계약서 폭탄 클릭질에 먹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개발자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시스템 우회 지식을 사용해 설계자를 정면으로 조롱하는 완벽한 뇌섹남적 반격이었다.

"꺼억."

태현이 안경을 지켜올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수수료 99%를 떼어먹는 상인을 상대로 룰 싸움을 걸다니. 세금 포탈하는 대기업 놈들이 왜 매번 전문 회계사를 고용하는지 이제 알겠나, 기계 쪼가리?"

[시스템 알림: 데메테르의 실시간 감시 시스템이 일시 마비됩니다.] [시스템 알림: 셧다운 프로토콜이 강제로 취소되었습니다.] [시스템 알림: '독점 정화 감시 지수'가 데이터 누락으로 인해 측정이 불가능해집니다.]

"와……."

유설아는 입을 벌린 채 태현을 바라보았다.

"진짜 악마 수준이 아니라, 악마 그 자체네요. 시스템을 디도스(DDoS) 공격하듯 계약서로 터뜨려 버리다니……."

"칭찬 고맙군. 하지만 아직 정산이 안 끝났어."

태현의 시선이 저 멀리 하늘을 향했다.

과부하에 걸린 데메테르의 가상 수호벽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대륙 전체에 울려 퍼졌다. 유리창이 깨지듯 하늘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판게아 연합 총수의 본거지 상공을 덮고 있던 절대적인 방어막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방어력 제로.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던 판게아 총수의 본거지가, 태현의 수수료 정화 구역 왜곡으로 인해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태현의 인벤토리 깊숙한 곳에서, 일찍이 척살자의 가방에서 약탈해 두었던 **[판게아 연합의 비밀 자금 장부 암호키]**가 붉은빛을 뿜어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자."

태현이 암호키를 손에 쥐며 속삭였다.

"이제 그들의 금고를 통째로 털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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