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너희는 차가운 사막 먼지만 마시며 쫓겨나게 될 거다. 네놈의 그 얄팍한 제국 꿈은 여기서 끝이야.”
에드워드 스톤의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준우의 오버코트 깃을 꽉 쥔 채 부르르 떨렸다. 70대에 접어든 노신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악에 받친 아귀힘이었다. 숨결에서 풍기는 질긴 시가 탄내와 차가운 분노의 농도가 VIP 라운지의 인조 대리석 바닥을 얼려버릴 듯했다.
하지만 준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동자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스펙트럼, 오직 그의 시야에만 투사되는 투명한 장부를 읽어 내리고 있었다.
[스카우팅 원장(Scouting Ledger) Lv.2] ▶ 타깃: 에드워드 스톤 (에이펙스 스포츠 대표) ▶ 보유 리스크: 타일러 크루즈 계약 권리 인수(200만 달러 지출)에 따른 즉각적인 무릎 부상(연골 연화증 4단계) 발현. 잔여 연봉 지급 의무 발생. ▶ 계약 독소 조항 분석 완료: '부상 시 예외 면책 조항 및 드래프트 보상권 트레이드 권리' 역이용 상태.
준우는 천천히 시선을 올려 에드워드의 충혈된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호를 그렸다.
“손 치우시죠, 스톤 회장님. 나이 들어서 관절염 도지면 치료비가 더 나옵니다.”
“이 건방진……!”
“그리고.”
준우가 에드워드의 손목을 정확하게 움켜쥐었다. 쇠집게처럼 파고드는 준우의 손아귀 힘에 에드워드의 눈썹이 찰나의 통증으로 일그러졌다. 준우는 그의 손을 가볍게 털어내듯 밀어내며, 깃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사막 먼지를 마실지, 아니면 라스베이거스의 가장 깊은 밀실에서 샴페인을 터뜨릴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회장님이 아니라.”
준우는 에드워드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의 뒤로 단호한 걸음걸이의 레이첼 민과, 193센티미터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으로 주변의 경호원들을 눈빛만으로 압도하는 강도윤이 따랐다. 에드워드의 얼굴은 수치심과 분노로 검붉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
네온사인이 사막의 어둠을 인공적인 원색으로 물들이는 라스베이거스의 밤.
벨라지오 호텔 지하 3층은 일반 투숙객의 발길이 철저히 통제되는 금단의 구역이다. 거대한 와인 셀러와 가라오케 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상은 메이저리그를 움직이는 거대 자본과 권력자들이 은밀한 야합을 나누는 진짜 전쟁터, 즉 ‘백룸(Backroom)’이었다.
두꺼운 마호가니 문을 열고 준우가 들어서자, 가라오케 룸 특유의 묵직한 가죽 냄새와 고급 싱글몰트위스키 향이 훅 끼쳐왔다.
방 안에는 네 명의 남자가 소파에 깊숙이 묻혀 앉아 있었다.
가운데에 앉아 있는 이는 LA 다저스의 단장(GM), 존 해리스였다. 그의 옆에는 거대 에이전시 카르텔 ‘빅 3’의 핵심 임원들과 동부 명문 구단들의 수뇌부들이 거만한 표정으로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준우와 도윤에게 쏠렸다. 환대나 호의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명백한 적대감과 경멸이 서린 눈빛이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들어왔군.”
해리스 단장이 크리스탈 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으며 차갑게 뱉었다.
“한준우 에이전트.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거지? 이곳은 메이저리그의 정식 룰을 준수하고, 구단과의 상호 신뢰를 지키는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다. 너처럼 사기적인 트레이드로 동업자의 뒤통수를 치는 야바위꾼이 올 곳이 아니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따라 들어온 에드워드 스톤이 준우의 등 뒤에서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한 준우. 너를 위한 방은 이 라스베이거스 전체를 뒤져도 없다고.”
에드워드가 해리스 단장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으며, 테이블 위에 가죽 바인더 하나를 툭 던졌다.
“자, 신사 여러분. 이미 합의된 사항입니다. 여기 서명하시죠. 업계의 물을 흐리는 협잡꾼 한준우와 그 소속 선수 강도윤에 대한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공동 보이콧 서명서입니다. 우리는 이 바닥의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구단의 수뇌부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펜을 만지작거렸다.
에이펙스 스포츠의 수장이 직접 판을 깔고, 다저스의 해리스 단장이 총대를 멘 상황이다. 무명의 아시아계 에이전트 하나를 매장하는 것쯤은 이 거대한 카르텔에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 기득권의 거대한 장벽 앞에서도 강도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턱을 치켜든 채, 시속 100마일의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 특유의 오만하고 강렬한 기백을 뿜어냈다. 방 안의 그 누구도 감히 도윤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했다.
레이첼 민 역시 차분하게 서류 가방을 움켜쥔 채, 준우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그녀는 준우가 절대로 지는 싸움을 하지 않는 괴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준우의 굴복을, 혹은 비굴한 애원을 조롱 섞인 눈으로 기다리는 침묵의 대치 상황.
준우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 안에서 두꺼운 서류 뭉치 두 개를 꺼냈다.
“서명을 하시기 전에, 재미있는 이야기 한두 가지만 짚고 넘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해리스 단장님? 그리고 스톤 회장님도 말이죠.”
준우가 첫 번째 서류를 에드워드 스톤의 코앞에 가볍게 던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서류가 펼쳐졌다.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서류의 붉은 직인이 찍힌 페이지에 닿는 순간, 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타일러 크루즈의 무릎 연골 연화증 4단계 진단서, 그리고 회장님이 5화에서 제게 인수한 양도 계약서의 별첨 조항입니다.”
준우의 목소리는 낮고 명료했다.
“‘본 계약 체결 이후 선수의 기지 질환 혹은 선천적 결함으로 인한 부상 발생 시, 양수인은 양도인에게 어떠한 이의 제기나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으며, 해당 선수의 부상으로 인한 구단 드래프트 보상권 및 향후 트레이드 권리는 원 에이전트인 한준우에게 귀속된다.’ 회장님이 급하게 계약을 따내시느라 이 독소 조항 분석을 건너뛰셨더군요. 제 스카우팅 원장에는 아주 선명하게 나와 있었습니다만.”
“이, 이딴 조항은……!”
“이미 연방 법원 공증까지 마친 계약서입니다.”
준우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크루즈의 무릎은 완전히 나갔고, 에이펙스는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200만 달러의 위약금 청구 소송을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게다가 크루즈의 드래프트 보상권은 이제 제 겁니다. 회장님이 제 꾀에 넘어가 피를 흘리는 동안, 저는 합법적으로 자금을 확보하고 권리까지 챙겼죠. 아직도 제가 야바위꾼으로 보이십니까?”
에드워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옆에 있던 구단 단장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업계의 거물인 에드워드가 새파란 신송이 에이전트에게 완벽하게 놀아났다는 사실이 눈앞에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준우의 진짜 타깃은 에드워드가 아니었다.
준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LA 다저스의 존 해리스 단장을 응시했다. 해리스 단장은 짐짓 태연한 척 시가를 깊게 빨아들였지만, 그의 이마에 맺힌 미세한 땀방울까지 준우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준우는 두 번째 서류 뭉치를 꺼냈다. 이번에는 다저스 단장의 바로 앞, 테이블 한가운데에 단정하게 가로놓았다.
“다음은 해리스 단장님 차례입니다.”
“무슨 수작이지?”
해리스가 불쾌하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단장님은 최근 구단주 그룹으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받고 계시더군요. 다저스의 만성적인 사치세(Competitive Balance Tax) 한도 초과 리스크 때문이죠. 올해 다저스의 페이롤은 이미 2억 9천만 달러를 넘어섰고, 사치세율은 최고 구간인 50%에 육합합니다. 여기서 1달러만 더 써도 구단주인 구겐하임 그룹에서 단장님의 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죠.”
준우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상대의 영혼을 발가벗기는 듯한 확신이 실려 있었다.
“그래서 단장님이 쓰신 꼼수가 아주 흥미롭더군요.”
준우가 테이블 위의 서류 첫 페이지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다저스 내부 단장의 이중 장부, 그리고 케이맨 제도의 유령 회사를 통한 불법 세무 회피 장부 시트 원본입니다. 라틴계 마이너리거들의 계약금을 축소 발표하고, 그 차액을 해외 법인을 통해 페이백 형태로 돌려받아 사치세 한도를 교묘하게 비켜 가셨더군요. 대략 1,800만 달러 규모더군요.”
순간, 백룸의 전반적인 공기가 차디차게 얼어붙었다.
해리스 단장의 입에 물려 있던 시가가 바닥으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가 완전히 가신 채, 회색빛 사색으로 변해갔다.
“너…… 네놈이 그걸 어떻게……!”
해리스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이것은 단순한 에이전트와 구단 간의 기싸움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MLB)의 전수 조사와 연방 국세청(IRS)의 세무조사가 들어올 수 있는, 다저스 구단 전체의 파멸이자 해리스 개인의 파멸을 의미하는 핵폭탄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구단 수뇌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해리스 단장으로부터 한 걸음씩 슬그머니 의자를 뒤로 물렸다. 방금 전까지 보이콧 서명에 동참하려던 동맹은 단 1초 만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준우가 상체를 천천히 앞으로 숙였다. 그의 눈빛은 먹잇감을 사냥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중요한 건, 이 장부의 사본이 이미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국세청 조사관의 이메일 임시 보관함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죠. 제가 마우스를 한 번만 클릭하면, 단장님의 야구 인생은 오늘로 끝납니다. 감옥에서의 삶이 시작되겠죠.”
“한준우……!”
에드워드 스톤이 다급하게 해리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흔들리지 마시오, 해리스 단장! 저놈은 지금 블러핑을 하고 있는 거요! 일개 에이전트가 그런 극비 장부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소!”
하지만 해리스 단장의 눈에는 이미 이성과 판단력이 마비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서류에는 다저스 내부인조차 알 수 없는 극비 계좌 번호와 자금 흐름도가 소름 끼치도록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것은 진짜였다. 자신을 완벽하게 파멸시킬 수 있는 단두대의 칼날이었다.
해리스 단장은 자신을 붙잡는 에드워드 스톤의 손을 거칠게 탁 뿌리쳤다.
“저리 치워!”
그가 에드워드에게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리고는 테이블 너머, 자신을 지배자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한준우를 잔뜩 겁먹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의 입술이 사시나무 떨리듯 파르르 떨렸다. 마침내 마른 침을 크게 삼킨 해리스가, 굴복의 질문을 내던졌다.
“대체…… 대체 원하는 계약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