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통해 비쳐 드는 오후의 햇살은 꼭 살구색 실크 천을 겹겹이 얹은 것처럼 부드러운 파스텔 톤으로 방 안을 감싼다. 당신의 침대 곁에서 새끼 늑대가 연신 솜방망이 같은 발로 당신의 손가락을 툭툭 건드린다. 녀석의 보드라운 털끝에서는 갓 구운 바닐라 쿠키처럼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냉혈한 가주인 아빠 벨리알도,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큰오빠 카시안도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눈동자가 언 얼음 밑으로 흐르는 봄 시냇물처럼 다정하게 반짝이던 찰나였다. 가족들의 메마른 성벽에 조금씩 연분홍빛 따스한 흙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아 안도하려던 바로 그때, 당신의 가슴 밑바닥에서 얼어붙은 검은 가시덩굴이 일제히 돋아나 심장을 옭아매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찾아온다.
"하윽……."
작은 신음과 함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콜록, 하고 작은 기침을 내뱉자, 당신의 앵두 같은 입술 사이로 진한 산딸기 시럽 같은 붉은 핏방울이 하얀 침구 위로 툭, 툭 떨어져 번진다. 새하얀 리넨 천 위로 마치 동화 속의 붉은 장미 꽃잎이 후두둑 흐드러지는 듯한 투명하고 서글픈 가시밭길이 열린다. 마수의 심술궂은 저주가 당신의 가녀린 몸 안에서 차가운 얼음 장난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가!"
차가운 철벽 같던 벨리알이 황급히 당신을 품에 안아 올린다. 그의 커다란 손이 장난감처럼 작은 당신을 잃을까 봐 연약하게 떨린다. 저택을 급히 찾은 주치의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극지방의 만년설산 깊은 곳에 사는 거대한 빙설사(氷雪蛇)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그 신비로운 푸른 눈물만이 아기님의 가슴속에 엉겨 붙은 혹독한 서리를 사르르 녹여낼 유일한 해독제입니다."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는 와중에도 당신은 작게 한숨을 폭 내쉬며 생각에 잠긴다.
'참으로 야속한 몸이오. 이제 막 가족들의 마음에 봄볕이 불기 시작했거늘, 내 안의 겨울이 이토록 시샘을 부리니 말이오. 하지만 이대로 은가루처럼 바스러질 순 없소. 귀여운 내 마수 동생들이 저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지키고 있지 않소.'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당신은 서둘러 생각의 실타래를 잣는다. 벨리알과 카시안은 당장이라도 눈보라가 치는 극지방으로 토벌대를 보낼 듯 기세등등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이 연약한 몸뚱이로라도 그들의 옷자락을 붙잡고 눈밭에 동행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정신없는 틈을 타 이 저택의 정원에 조용히 숨겨진,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계 마수들의 비밀 둥지를 찾아 기어가야 할 것인가.
차가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당신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며, 마침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