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하철 역 붕괴된 틈새로 미끄러져 내려간 끝에 도달한 곳은 차가운 강철의 세계였다. 습한 하수구 냄새 대신 쾨쾨한 기계유와 기분 나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숨겨진 지하 벙커의 중심부. 거대한 해치 도어를 박살 내고 들어가자,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반짝이는 홀로그램 모니터 수백 대가 늘어선 초현대식 서버실. 그리고 그 서버 데스크들을 사슬처럼 감싸고 있는 징그러운 혈관과 괴생명체들의 고치. 기계의 차가운 금속성과 괴물들의 생체 조직이 기괴하게 융합된 지옥도였다.

꾸르륵. 눈앞의 고치들이 들썩이며 점액질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기세였다. 하지만 굳이 긴장할 필요는 없다.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먼저 지워버리면 그만이니까.

손가락 끝을 가볍게 튕겼다. 뇌전의 마력이 마찰음을 내며 대기를 찢었다.

[SYSTEM: 고유 스킬 '뇌신화(Lv.8)' 발동!] [지정 영역 전역에 2,500,000V의 초고압 전류를 방출합니다.] - 연쇄 감전 피해: 89,000 (치명타!) - 생체 조직 괴사율: 99.8%

콰르릉! 눈이 멀 것 같은 푸른 섬광이 서버실 전체를 휩쓸었다. 괴물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타버린 재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계 장치들은 특수 마력 방어 코팅이 되어 있는지 멀쩡히 구동음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비어버린 방 한가운데, 메인 콘솔 앞으로 가볍게 걸어갔다. 키보드를 가볍게 두드리자 암호화된 홀로그램 스크린이 허공에 연달아 떠올랐다.

[지구 인류(Homo Sapiens) 포획 프로젝트: 파이널 스테이지 완료] [이송 대상: 총 72억 명 (생존율 98.2% 상태로 차원 이송 완수)] [잔류 지역 관리 코드: '지옥(Hell-Seoul)' - 번식 및 변이 실험장으로 전환]

당신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인류 멸망의 진짜 진실이 바로 여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곳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아포칼립스가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상위 세력이 지구인 전체를 다른 차원으로 납치해 간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쓰레기장인 이 서울을, 자신들의 살육 무기 실험장으로 꾸며놓은 것뿐.

"나만 두고 전부 납치해 갔다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나를 빠뜨린 것이 실수인지, 아니면 의도된 오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게 만들어 주겠다는 사실뿐이다.

그때, 서버실 너머 심연의 아래쪽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붉은 육벽으로 뒤덮인 최하층 번식처에서 수만 마리의 괴수들이 일제히 눈을 뜬 것이다. 동시에 붉은 경고등이 무섭게 회전하며 경고 메시지를 뿌렸다.

[WARNING: 미승인 개체의 시스템 무단 접속 감지.] [보안 프로토콜 작동. 이송 구역 로그 데이터 파기를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180초]

차원 이송의 흔적을 담은 좌표 데이터가 지워지기 직전이다. 동시에 아래층에서는 수만 마리의 괴수 군단이 당신의 목을 조르기 위해 벽을 타고 기어 올라오고 있다.

시간이 없다. 당신의 선택은 단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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