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바람마저 숨을 죽인다.

무당의 기재 무명이 무릎을 꿇는다. 그의 진무검이 바닥에 처박힌다. 검 끝이 잘게 떨린다.

당신의 신형은 흔들림이 없다.

무명의 눈빛이 당신을 향한다. 원망도, 분노도 없다. 오직 끝없는 대양을 마주한 자의 경외만이 그 맑은 눈동자에 일렁일 뿐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정파 최고의 검수가 당신의 압도적인 힘 앞에 굴복한 순간이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갈라진 목소리가 사방으로 번져 나간다.

당신은 대답 대신 소맷자락을 가볍게 털어내며 정면의 태극전(太極殿)을 바라본다. 백 년 넘게 정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성지이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무림맹주의 옥좌가 저만치 보인다.

당신이 발걸음을 옮긴다. 스으윽. 흙먼지가 당신의 발끝에서 갈라진다. 좌우로 늘어선 정파의 장로들이 일제히 몸을 웅크린다. 그들의 손이 검자루를 거칠게 쥐었지만,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당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도(覇道)의 기운이 온 장내를 무겁게 짓누르는 까닭이다.

동시에 연무장 외곽, 검은 장포를 걸친 사파의 기인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숨죽여 당신의 등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음지의 귀물들이 마침내 양지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역사적인 장광설이다. 정(正)과 사(邪)의 견고했던 벽이 당신의 발소리에 맞춰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린다.

옥좌 앞에 당도한다. 단단한 청옥으로 조각된 의자는 무겁고 차갑다. 당신은 주저 없이 몸을 돌려 그 자리에 깊숙이 걸터앉는다. 그리고 등을 기대며 오른손으로 턱을 괸다. 지극히 오만하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황제의 형상이다.

"오늘부로 무림의 법은 새로 쓰인다."

당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심후한 내공을 타고 장내를 울린다. 사자후가 아님에도 기도가 넘쳐나 천여 명의 고막을 먹먹하게 만든다.

당신의 왼손이 옥좌의 청옥 난간을 가볍게 두드린다. 톡, 톡, 톡.

그 규칙적인 고동 소리에 맞춰, 마당에 가득 찬 일만 무인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포권을 취한다.

"맹주를 뵈옵니다!"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태극전의 천장을 두드린다.

정파의 명분도, 사파의 비법도 이제는 모두 당신의 거친 손아귀 아래 모였다. 사파의 제일인이자 무림의 맹주인 당신이 군림할 대무도림(大武道林)의 태양이 드디어 그 찬란한 빛을 사해(四海)에 뿌리기 시작한다. 무림의 역사상 전무후무할 새로운 천존(天尊)의 시대가 지평선 너머로 장엄하게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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