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진동의 반지가 연주하는 고속의 공명은 칼리안의 손가락뼈를 타고 올라가 뇌수를 흔들었다.

손바닥 안에서 으깨어질 듯 쥐인 비단 향낭은 은은하기 짝이 없는 투명한 녹색을 띠고 있었으나,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향취는 지독할 정도로 선명했다. 로즈마리의 청량한 풀 냄새와 야생 세이지의 쌉싸름한 잔향이 마차의 가죽 시트 구석구석을 적셨다. 타들어 가던 가슴뼈 안쪽의 독기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자, 칼리안은 오히려 소름 끼치는 냉기를 느꼈다.

“……너는 대체 누구지?”

창밖, 빗줄기가 가늘게 흩뿌리는 아카데미의 정원 너머로 엘리샤 폰 아르덴의 가녀린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칼리안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향낭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마력 파동. 그것은 평소 그가 아르덴의 잔당을 추적할 때 감지하던 사악하고 탁한 마기—‘악녀 지치’의 서늘함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순수하지만, 동시에 얼어붙은 대지를 관통하는 북부의 성물처럼 강력한 은빛의 공명.

맥박이, 일치하고 있었다.

칼리안은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꾹 눌렀다. 단 한 번도 타인의 마력에 이토록 완벽하게 동조해 본 적 없는 심장이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고 정교한 궤도를 그리며 뛰고 있었다.

***

사흘 뒤.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중앙 대강당, ‘그랜드 홀’은 제국 전역에서 몰려든 학자와 귀족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천장 높이 매달린 수십 개의 크리스탈 샹들리에는 마법 불꽃을 받아 황금빛으로 이글거렸고, 귀족들이 걸친 벨벳 드레스와 실크 코트의 호사스러운 자락들이 스칠 때마다 사각거리는 마찰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루비와 사파이어가 촘촘히 박힌 브로치들이 인파 속에서 호사스럽게 반짝였다.

그 화려함의 중심, 귀빈석의 가장 높은 자리에 칼리안 헤스벨트 대공이 앉아 있었다. 사흘 전의 그 지독한 마력 발작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의 얼굴은 사늘하고도 완벽한 대리석 조각 같았다. 검은색 제복 깃 위로 정교하게 세공된 은색 늑대 견장이 그의 서늘한 안광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그리고 단상 아래, 교수 대기석에 앉은 엘리샤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은퇴용 비자금 장부를 머릿속으로 굴리고 있었다.

‘남부 해안가의 붉은 기와 저택. 정원에는 오렌지 나무를 심고, 하인은 딱 세 명만 둔다. 그러려면 오늘 이 귀찮은 학술제 오프닝을 무사히 넘겨야 하는데…….’

엘리샤는 오늘을 위해 특별히 맞춘 짙은 감청색의 실크 로브 깃을 우아하게 매만졌다. 소맷자락에는 은색 실로 아카데미의 문양인 날개 달린 사자가 정교하게 자수되어 있었고, 목덜미에는 가느다란 백금 체인에 매달린 청색 사파이어 펜던트가 단정하게 안착해 있었다.

완벽한 학술적 권위와 지적인 우아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철저한 손익계산서로 가득 차 있었다.

“교, 교수님…… 저 진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저기 앉아 계신 분들 다 제국 역사학회 거물들이잖아요. 우리 논문 진짜 괜찮은 거 맞죠? 퇴근하고 싶어요. 아니, 사직서 쓰고 고향으로 튀고 싶어요…….”

옆에서 멜리사가 사르르 떨리는 손으로 양가죽 서류철을 꼭 껴안은 채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톱 밑은 밤샘 작업으로 잉크 얼룩이 거멓게 들어차 있었다.

“멜리사. 내 밑에서 뼈를 묻고 정식 연구관 임용서를 받고 싶다면 그 가벼운 입술을 지퍼 채우듯 다물어라. 오늘만 넘기면 네 통장에 연구 보조비가 두 배로 찍힐 테니까.”

“두, 두 배요? 퇴근은 미룰 수 있습니다! 뼈를 묻겠습니다, 교수님!”

돈 냄새를 맡은 조교의 눈빛이 순식간에 맹수가 먹잇감을 노리듯 번뜩였다. 엘리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본주의의 힘은 국경과 신분을 초월하는 법이다.

그때, 대강당의 거대한 오크나무 문이 열리며 바스토프 추기경이 입장했다.

순백의 사제복 위에 황금빛 자수가 놓인 영대를 걸친 그는, 겉보기에는 한없이 자비롭고 신실한 성직자의 표상이었다. 가슴팍에 늘어진 묵주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엘리샤를 향해 닿는 시선만큼은 얼음송곳보다 예리했다.

추기경의 가벼운 눈짓과 함께, 단상 위로 한 남자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제국 역사학회의 원로이자, 바스토프 추기경의 숨겨진 수하인 슈테인 교수였다. 그는 일부러 엘리샤의 좌석 바로 앞까지 걸어와, 턱을 치켜들고 거만한 목소리로 대강당 전체를 울렸다.

“존경하는 제국 학회 동료들이여, 그리고 고명하신 감사관 전하.”

슈테인의 목소리가 은색 마법 증폭기를 타고 그랜드 홀의 높은 천장으로 울려 퍼졌다.

“우리는 오늘, 이 신성한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강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기만행위를 고발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최근 고대 지형학과 제국 건국사를 새로 썼다며 찬사를 받고 있는 엘리샤 폰 아르덴 교수의 논문 말입니다!”

대강당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귀족들의 눈빛에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발견한 자들의 비열한 탐욕이 서리기 시작했다.

칼리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그의 시선이 단상 위에서 꼿꼿하게 앉아 있는 엘리샤에게로 향했다.

“슈테인 교수.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학술 평의회 의장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슈테인은 기다렸다는 듯 품 안에서 두꺼운 양가죽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아르덴 교수가 발표한 고대 지형학 논문은 전면 위조되었습니다! 그녀가 인용한 고대 사료들은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기록이며, 학문적 명성을 얻어 아카데미 내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사기극에 불과합니다. 여기, 그 증거가 있습니다!”

슈테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관객석 구석이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세드릭 아르덴.

불안감에 휩싸여 엄지손톱 밑의 허연 살을 피가 배어 나오도록 뜯어내던 그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의 손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고대의 은제 깃펜이 들려 있었다.

“제, 제가 증인입니다!”

세드릭이 목소리를 높였다.

“엘리샤 교수는 아르덴 가문의 비전 마법을 사용해 고대 양가죽의 질감과 마력을 조작했습니다. 이 은제 깃펜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녀의 연구실에서 제가 직접 확보한 이 깃펜은, 고대인의 마력 지문을 고스란히 복제해 내는 위험한 금지된 아티팩트입니다!”

대강당이 웅성거림으로 뒤덮였다.

“아르덴 가문의 비전이라고?” “그럼 역시 저 여자가 반역자의 핏줄이라는 소리인가?” “위조 논문으로 제국 학회를 우롱하다니!”

바스토프 추기경은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묵주를 굴렸다. 그의 눈빛은 이미 엘리샤의 목에 단두대의 칼날이 닿았다고 확신하는 사냥꾼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앉아, 차가운 눈으로 세드릭이 든 은제 깃펜을 바라보았다.

‘저 멍청이가 결국 내 덫에 발을 들여놓았군.’

[제국 평판 장부(Ledger)를 기동합니다.] [경고: 장부 열람 및 인과율 개입 시 '악녀 지치(마기)'가 누적되어 방출됩니다. 북부대공의 마력 탐지 기전이 활성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시스템의 서늘한 기계음을 무시하며, 엘리샤는 반투명하게 떠오르는 슈테인과 세드릭의 평판 장부를 훑어내렸다.

================================== [슈테인 교수 - 평판: -45 (학계의 사기꾼)] - 숨겨진 치부: 최근 교황청 산하의 금융 길드 '바르샤'를 통해 정체불명의 상인(추기경의 차명 계좌)으로부터 5,000 골드 시온의 뇌물을 수령함. - 수령 목적: 엘리샤 폰 아르덴의 학술적 매장 및 역사 보관소 세금 포탈 원본 문서의 소각 방조.

[세드릭 아르덴 - 평판: -85 (배신자)] - 죄목: 카이로스 아카데미 3연구실 무단 침입 및 물품 절도. - 훔친 물품: 고대 은제 깃펜 (아카데미 정식 자산 번호: KA-8902) ==================================

엘리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녀의 몸 주변으로, 아주 미세하고 서늘한 검은 입자—악녀 지치가 장부의 구동과 함께 은밀하게 흘러나왔다.

쿵.

귀빈석에 앉아 있던 칼리안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고대 마도구 ‘진동의 반지’가 푸른빛을 발하며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사흘 전 마차 안에서 느꼈던 그 경이로운 은빛 공명과는 다른, 서늘하고 사악한 마기의 진동이었다.

칼리안의 안광이 사납게 좁혀졌다. 그의 시선이 단번에 엘리샤의 전신을 훑었다.

‘또 이 마기다. 하지만…… 사흘 전의 그 맑은 정화의 힘은 뭐였지? 이 여자, 대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건가.’

칼리안이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탁, 탁, 두드리며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대강당의 온도가 순식간에 급강하했다. 학자들이 공포에 질려 침을 삼켰다.

그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엘리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먼지 하나 일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고 고요했다. 단상 앞으로 걸어나온 그녀는, 세드릭이 들고 있는 은제 깃펜을 조용히 응시했다.

“세드릭 아르덴.”

엘리샤의 목소리는 맑고 나직했으나, 대강당의 모든 소음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네가 내 연구실에서 ‘직접 확보’했다는 그 은제 깃펜이, 정말로 내 위조의 증거라고 확신하나?”

“그, 그래! 이 깃펜의 팁에 새겨진 미세한 마법 문양이 증명한다! 고대 문서를 위조하기 위한 사악한 도구지!”

세드릭은 기세등등하게 소리쳤으나, 엘리샤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마주하자 엄지손톱을 뜯는 속도가 빨라졌다.

엘리샤는 고개를 돌려 조교 대기석을 바라보았다.

“멜리사. 사흘 전, 아카데미 구매처에서 발급받은 정식 기자재 구매 영수증과 자산 대장을 이리 가져오렴.”

“넵! 여기 대기 중이었습니다, 교수님!”

멜리사가 기다렸다는 듯, 깃털 펜을 화려하게 굴리며 단상 위로 잽싸게 뛰어 올라왔다. 그녀가 펼쳐 보인 양가죽 서류에는 카이로스 아카데미 총인장이 붉게 찍혀 있었다.

“모두 똑똑히 보시지요.”

엘리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서류의 한 줄을 가리켰다.

“자산 번호 KA-8902. 고대사 연구용으로 정식 수입된 ‘마력 전도용 은제 깃펜’. 아카데미 예산으로 사흘 전에 구입하여 내 연구실 서랍에 보관되어 있던 물건입니다. 제국 감사원의 승인을 받아 정식 통관된 일반적인 학술 기자재에 불과하지요.”

대강당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그, 그럴 리가! 이건 아르덴 가문의……!”

세드릭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으나, 엘리샤는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그런데 그 아카데미의 공적 자산이, 어째서 내 연구실 서랍이 아닌 네 손에 들려 있지? 세드릭.”

엘리샤의 눈빛이 극도로 서늘해졌다.

“카이로스 아카데미 자치 규정 제14조. 교수 연구실에 무단 침입하여 공적 자산을 절취한 자는 즉각 구금되며 제국법에 따라 처벌받는다. 세드릭 아르덴, 너는 지금 만인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절도범’이자 ‘위증죄인’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아, 아니……! 이건 추기경님이……!”

세드릭이 사색이 되어 바스토프 추기경을 바라보았으나, 추기경은 차가운 눈으로 시선을 회피할 뿐이었다. 쓸모를 다한 사냥개는 버려지는 법이다.

“게다가.”

엘리샤의 반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상 위의 슈테인 교수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슈테인 교수님. 제가 위조 논문으로 학계를 우롱했다고 하셨습니까?”

“그, 그렇다! 물증인 깃펜이 정식 기자재라 한들, 네 논문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슈테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엘리샤는 품 안에서 작은 마법 투영석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방출된 극미세한 마기가 투영석을 활성화했다.

그 순간, 대강당의 거대한 중앙 벽면에 거대한 마법 스크린이 펼쳐지며 붉은색 글씨로 가득한 장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슈테인 교수가 교황청 산하 ‘바르샤’ 금융 길드를 통해 수령한 5,000 골드 시온의 거래 명세서였다. 보낸 이의 이름은 가명이었으나, 그 자금의 최종 종착지가 바스토프 추기경의 비밀 장부와 연결된 금융 거점임이 상세하게 분석되어 있었다.

“이것은……!”

슈테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제 논문이 위조되었다는 주장의 대가로, 교황청 금융 길드로부터 5,000 골드 시온을 수령하신 명세서입니다.”

엘리샤의 목소리에는 자비가 없었다.

“학술적 양심을 단돈 5,000 골드에 팔아넘기시고, 신성한 아카데미의 강단에서 동료 교수를 음해하려 하시다니요. 이것이 제국 역사학회 원로의 품격입니까?”

관객석에서 폭발적인 야유와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슈테인이 뇌물을 받았다고?” “그것도 교황청 돈을?” “아카데미의 자치권을 침해하려는 교회의 음모였군!”

아카데미 총장단과 정교수들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감사원의 개입도 모자라, 교회가 학술제의 신성함을 더럽히려 했다는 사실은 아카데미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정면으로 짓밟는 행위였다.

“이, 이건 조작이다! 음해다!”

슈테인이 거품을 물며 비명을 질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엘리샤는 우아하게 손을 뻗어 세드릭의 손아귀에서 고대 은제 깃펜을 부드럽게 회수했다. 백금 체인에 매달린 사파이어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절도범과 뇌물 수수자는 즉시 끌어내리십시오.”

엘리샤의 단호한 명령에, 아카데미 자치 경비병들이 단상 위로 들이닥쳤다. 세드릭은 비명을 지르며 질질 끌려 나갔고, 슈테인은 다리가 풀려 엎어진 채 질질 연행되었다.

완벽한 격상 반격이었다.

엘리샤는 가볍게 옷자락을 털며, 귀빈석의 칼리안을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봤지? 난 아주 무고하고 유능한 교수일 뿐이라니까.’

칼리안은 흐트러짐 없이 단상 위에 선 엘리샤를 응시했다. 그의 심장 박동은 여전히 차분했으나, 눈빛만큼은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가 장부를 구동할 때 뿜어낸 그 미세한 ‘악녀 지치’의 냄새를 그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재미있군.”

칼리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한편, 단상 아래에서 이 모든 파멸을 지켜보던 바스토프 추기경의 얼굴은 붉다 못해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손아귀에 쥔 목조 묵주 알들이 서로 부딪치며 삐걱거리는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수하들이 이토록 허망하게, 그것도 전 제국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난도질당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추기경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퇴장하기 전, 귀빈석의 칼리안 대공을 향해 조용히 다가갔다.

“대공 전하.”

추기경의 목소리는 신실함의 가면을 벗어던진 채, 지독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교회는 아카데미 내부의 불순한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상아탑 안에는, 단순한 학술 위조를 넘어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정체불명의 사악한 마기—‘마약성 마기 발산자’가 숨어 숨을 쉬고 있습니다.”

추기경의 매서운 눈동자가 엘리샤의 등을 찌르듯 향했다가, 다시 칼리안에게로 돌아왔다.

“북부의 수호자이자 감사관이신 전하께서는, 제국의 안전을 위해 교회와 공조하여 이 더러운 마기의 근원을 반드시 색출해 내셔야 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바스토프 추기경의 강박적인 압박이 대강당의 무거운 공기 속에 가라앉았다.

칼리안의 시선이 추기경을 지나, 단상 위에서 우아하게 깃펜을 정리하고 있는 엘리샤의 하얀 목덜미에 머물렀다.

두 사람의 소리 없는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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