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수호자이자 감사관이신 전하께서는, 제국의 안전을 위해 교회와 공조하여 이 더러운 마기의 근원을 반드시 색출해 내셔야 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바스토프 추기경의 주름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대강당의 높은 천장 아래로 흩어지는 성가대의 잔향마저 얼려 버릴 듯한 살기였다.
칼리안 헤스벨트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추기경의 붉게 충혈된 눈을 느리게 훑었다. 기사단의 심장을 얼려 버린다는 북부의 대공은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탁, 탁, 일정하게 두드렸다. 그 일정한 박자는 대강당에 남아 있던 이들의 맥박마저 쥐고 흔드는 듯했다.
“의무라.”
칼리안의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차갑고도 오만한 미소였다.
“추기경 각하께서 제국의 치안을 이토록 염려해 주시니 황공할 따름이군. 하지만 아카데미는 황실의 직속 자치령. 자치령 내부의 마기 수색은 감사원의 고유 권한입니다. 교회가 간섭할 영역이 아니지.”
“대공 전하!”
“더불어.”
칼리안이 상체를 아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푸른 빛이 도는 흑발이 촛불 아래에서 서늘하게 빛났다.
“내 사냥감은 내가 고릅니다. 늙은 사냥개의 쉰 목소리에 이끌려 화살을 날릴 생각은 없다는 뜻이지요.”
바스토프 추기경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검붉게 물들었다. 그의 손아귀에 쥔 목조 묵주 알들이 서로 비명을 지르며 삐걱거렸다. 감히 신의 대리인을 늙은 사냥개에 비유하다니. 하지만 칼리안은 이미 흥미를 잃었다는 듯 시선을 돌려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엘리샤 폰 아르덴이 서 있었다.
그녀는 마치 피비린내 나는 설전 따위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우아하게 깃펜을 정리하고 있었다. 백금 체인에 매달린 눈부신 사파이어 펜촉이 그녀의 가냘픈 손가락 사이에서 정교하게 돌아갔다.
‘와, 진짜 살벌해서 퇴근이나 할 수 있겠나.’
엘리샤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겉으로는 서양 귀족 가문의 가장 완벽한 영애처럼 고결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등 뒤는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가고 있었다.
학술제에서 세드릭과 슈테인 교수를 완벽하게 매장해 버린 것까지는 좋았다. K-직장인의 매운맛을 보여 주며 대체 불가능한 학술적 권위를 증명했으니, 이제 남은 건 안전한 은퇴 자금을 굴리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늙은 여우와 젊은 늑대가 자신을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꼴을 보니 명줄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는 기분이었다.
특히 칼리안의 그 집요한 시선.
엘리샤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칼리안은 지금 그녀가 방금 전 평판 장부를 구동할 때 방출한 ‘악녀 지치’의 냄새를 쫓고 있었다. 아르덴 가문 특유의 짙고 매혹적인 마기. 그것은 칼리안의 예민한 마력 감지 레이더에 가장 선명하게 걸려드는 붉은 표식이었다.
“학술제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엘리샤는 단호하게 선언하며 교탁을 정리했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 * *
상황은 엘리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흘 뒤,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하늘에 거대한 백색의 빛의 사슬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교황청이 발동한 ‘성흔 결계’였다. 아카데미 내부의 모든 오염 물질과 마기를 강제로 차단하고 스캔하는 최고위 성력 결계. 바스토프 추기경이 황실 평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초강수였다.
“교수님! 큰일 났어요! 지금 정문부터 후문까지 완전히 봉쇄됐어요!”
수석 조교 멜리사 로렌이 비명을 지르며 연구실 문을 쾅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갈색 머리는 며칠째 야근으로 인해 붕 떠 있었고, 손에는 정체 모를 오래된 양가죽 조각을 꼭 쥐고 있었다.
“퇴근은요? 제 퇴근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성기사들이 통행증 없이는 쥐새끼 한 마리도 못 나간다고 소리치고 있다고요! 이건 노동법 위반이에요!”
“멜리사, 진정해.”
엘리샤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성흔 결계라고? 미친 영감탱이가 결국 판을 키우는구나. 이 결계가 완전히 활성화되면 내 몸 안에 숨겨진 마기가 강제로 공명해서 터져 나올 텐데.’
[제국 평판 장부]를 사용할 때마다 누적되는 ‘악녀 지치’는 평소에는 그녀의 체내 깊숙한 곳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성스러운 힘으로 마력을 강제 정화하는 성흔 결계 아래에서는, 그 사악한 마기가 이물질처럼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폭발적으로 방출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칼리안 대공이 직접 목을 베러 오기 전에, 결계의 낙인이 먼저 이마에 찍히게 된다. 단두대 엔딩의 고속도로가 열리는 셈이었다.
엘리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멜리사의 손에 쥐인 양가죽 조각을 바라보았다. 붉은 인장이 찍힌, 아주 오래되고 낡은 양가죽. 지난번 역사 보관소 폐기물 더미에서 멜리사가 주웠다며 자랑하던 물건이었다.
“멜리사, 그 손에 든 건 뭐지?”
“아, 이거요? 그냥 예뻐서 책갈피로 쓰려고 놔둔 건데…… 어라, 결계가 쳐지니까 여기서 미세하게 붉은 빛이 나요.”
멜리사가 쫑긋해진 귀를 흔들며 양가죽을 내밀었다.
엘리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즉시 머릿속으로 [제국 평판 장부]를 가동했다.
시야에 반투명한 황금빛 장부가 펼쳐졌다. 장부의 잉크가 번지며 멜리사가 든 양가죽 조각의 정보가 텍스트로 떠올랐다.
[아이템: 옛 성전 조세 포탈 합의서의 봉인 조각] [- 설명: 바스토프 추기경이 영구 소각하려 했던 교황청의 추악한 비리 원본을 증명하는 유일한 열쇠.] [- 상태: 성력 결계와 반응하여 진품 확인 낙인이 활성화됨.]
‘심봤다.’
엘리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추기경의 목줄을 쥘 수 있는 진짜 치명적인 무기가 바로 조교의 책상 서랍 속에 굴러다니고 있었다니. 역시 성실한 직장인은 우연한 기회로도 세상을 구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귓가에 웅웅거리는 이명이 들려왔다.
[경고: 시스템 강제 기동으로 인해 ‘악녀 지치(마기)’가 급격히 누적됩니다.] [현재 누적도: 87% — 마기 방출 임계점 돌달 임박.]
“윽.”
엘리샤는 신음하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 주위로 검붉은 마력이 번져 가며 피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지며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악녀 지치가 통제를 벗어나 외부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교, 교수님? 왜 그러세요? 얼굴이 너무 하얗게…….”
“멜리사.”
엘리샤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멜리사의 어깨를 밀었다.
“지금 즉시 지하 아카이브로 내려가서 이 양가죽 조각을 안전한 금고에 보관해. 그리고 무슨 소리가 나든 절대 위로 올라오지 마.”
“네? 하지만 교수님은요?”
“난…… 손님이 올 예정이라서 말이야. 어서 가.”
멜리사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구실 뒷문으로 허둥지둥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엘리샤는 책상을 짚고 겨우 버텼다. 손끝에서 검은 안개 같은 마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3분 안에 아카데미 전체에 그녀의 정체가 광고될 판이었다.
활로는 단 하나뿐이었다.
[제국 평판 장부]의 구석에 적힌 숨겨진 규칙. [- 아르덴의 악녀 지치는 극저온의 북부 마력과 접촉할 때 순간적으로 중화 및 동결됨.]
북부의 극저온 마력을 지닌 자. 제국에 단 한 명뿐이었다.
“하아…… 결국 그 사냥개의 목줄을 직접 쥐어야겠네.”
엘리샤는 입술을 깨물며 연구실 안쪽에 위치한 개인 밀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설치된 마법 진동 장치를 작동시켰다. 칼리안 대공이 그토록 쫓아다니던 바로 그 ‘마기’의 진동 주파수를 의도적으로 증폭시켜 허공에 뿌린 것이다.
미끼는 던져졌다.
* * *
정확히 2분 뒤.
연구실의 튼튼한 참나무 문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스산한 겨울바람과 함께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것은 칼리안 헤스벨트였다. 그의 검은 제복 코트 자락에는 방금 전까지 결계를 통과하며 묻은 백색의 성흔 파편들이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칼리안은 느린 걸음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잉크병을 지나, 굳게 닫힌 밀실의 문으로 향했다.
“숨바꼭질은 체질에 안 맞을 텐데요, 엘리샤 교수.”
칼리안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그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밀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쿠구궁.
문이 열리자마자 차가운 냉기와 함께 짙은 암흑이 그를 맞이했다. 밀실 안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이었고, 오직 엘리샤의 가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여기로 직접 걸어 들어오시다니, 대공 전하의 용맹함에는 늘 감탄하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엘리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의 우아하고 가식적인 톤이 아니었다. 열기에 취한 듯, 조금은 가라앉고 끈적한 음색이었다.
칼리안이 밀실 안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쾅! 하고 등 뒤의 문이 굳게 닫혔다.
동시에 사방에 쳐진 방음 및 마력 차단 결계가 작동했다. 외부의 성흔 결계조차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완전한 밀실이었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칼리안이 차갑게 물으며 검 자루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검에 닿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부드럽고 가냘픈 손길이 그의 뺨을 감싸 안았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촉감.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달콤한 로즈마리와 짙은 마기의 향취가 그의 코끝을 찔렀다.
“대공 전하.”
엘리샤가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전신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그 열기는 칼리안의 차가운 제복을 뚫고 그의 살결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당신의 그 차가운 마력이…… 지금 제게 아주 절실하게 필요하답니다.”
“……!”
칼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가 반사적으로 그녀를 밀쳐내려 힘을 주는 순간, 엘리샤가 그의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칼리안의 입술 위로 사정없이 겹쳐졌다.
읍.
짧은 비명이 칼리안의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그것은 단순한 키스가 아니었다. 포식과 흡수의 행위였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칼리안의 체내에 잠들어 있던 북부의 혹독한 얼음 마력이 폭풍처럼 엘리샤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엘리샤의 체내에서 날뛰던 뜨겁고 사악한 악녀 지치가, 칼리안의 차가운 마력과 부딪치며 눈 녹듯 얼어붙고 중화되기 시작했다.
“하아…… 읏.”
엘리샤는 칼리안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그의 차가운 숨결을 남김없이 들이켰다.
그녀의 엉뚱한 독백이 머릿속을 스쳤다. ‘오, 신이시여. 북부대공표 인간 에어컨이 성능이 아주 확실하군요. 남부 휴양지 저택에 에어컨 대신 이 남자를 박제해 두고 싶을 정도입니다.’
반면, 칼리안은 난생처음 겪는 기묘한 감각에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마력 공명 능력은 상대의 마력을 스캔할 뿐, 이토록 강제적으로 공유하고 융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여자의 입술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마기는 사악하기는커녕, 지독할 정도로 감미롭고 가슴 깊은 곳의 갈증을 채워 주는 듯했다.
그의 이성이 경고했다. 이 여자는 위험하다. 이 여자가 바로 네가 찾던 아르덴의 잔당이다. 당장 목을 베어야 한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부서질 듯 움켜쥐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를 더 깊이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그 달콤한 독을 더 마시고 싶다는 본능적인 갈망에 굴복하고 있었다.
밀실 안의 공기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와 서늘한 마력의 충돌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엘리샤가 서서히 입술을 떼어냈다. 그녀의 입술 끝에 미세한 은빛 타액이 길게 늘어지다 끊어졌다. 그녀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동자는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아 맑게 빛나고 있었다.
체내의 마기 누적도가 안전 수치인 15%까지 뚝 떨어져 있었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고마워요, 전하. 덕분에 살았네요.”
엘리샤가 생긋 웃으며 그의 가슴을 톡톡 쳤다. 마치 길을 가다 아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듯 캐주얼한 태도였다.
칼리안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대, 정체가 뭐지?”
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열망, 그리고 혼란으로 무겁게 젖어 있었다.
“그저 평범하고 유능한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역사학 교수일 뿐이랍니다. 대공 전하의 훌륭한 학문적 동반자이기도 하고요.”
엘리샤는 우아하게 옷자락을 털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연구실 바깥문이 부서질 듯한 충격음과 함께 요란하게 흔들렸다.
“엘리샤 폰 아르덴! 게 서라! 네년의 추악한 마기 오염 죄를 교황청의 이름으로 단죄하겠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앙칼지고 비열한 목소리.
세드릭 아르덴이었다.
* * *
“세드릭?”
엘리샤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했다.
‘저 인간 조각상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네. 사형 집행 대기실에서 얌전히 기도나 하고 있을 것이지, 어떻게 기어 나온 거야?’
상황은 명백했다. 바스토프 추기경이 아카데미의 성흔 결계를 발동시키며, 자치 경비대에 잡혀 있던 세드릭을 교황청의 권한으로 강제 사면하고 사냥개로 풀어놓은 것이었다.
쾅!
마침내 연구실 문이 박살이 나며 성기사들과 함께 세드릭이 난입했다. 세드릭의 얼굴은 광기로 가득 차 있었고, 엄지손톱 밑을 피가 나도록 뜯어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하하하! 대공 전하! 여기 계셨군요! 이 사악한 악녀가 대공 전하까지 마법으로 현혹하려 한 것이 분명합니다!”
세드릭은 엘리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여자의 연구실에서 아르덴의 마기가 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저 여자가 학술제에서 제시한 증거들은 모두 조작된 것입니다! 진짜 범인은 저 여자라고요!”
성기사들이 마력 억제용 사슬을 치켜들며 엘리샤를 포위했다.
세드릭은 기세등등하게 엘리샤의 책상 위에 놓인 고대 은제 깃펜을 가리켰다.
“그 깃펜도 원래는 내가 아카데미의 발전을 위해 기증하려던 유물이었는데, 저 사악한 년이 날 모함하기 위해 훔쳐 간 것입니다! 깃펜에 내 마력 지문을 억지로 입혀서 위조한 거라고요!”
완벽한 적반하장. 교황청의 권력을 등에 업고 판을 뒤집으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엘리샤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아니, 직장 생활 하면서 제일 피곤한 게 뭔지 알아? 다 끝난 보고서 가지고 딴죽 거는 멍청한 상사나 협력업체거든.’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책상 위에 놓인 고대 은제 깃펜을 손에 쥐었다. 사파이어 펜촉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세드릭.”
엘리샤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신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이 고대 은제 깃펜은 단순한 유물이 아닙니다. 고대 제국의 세금 장부를 작성할 때 사용되던 ‘진실의 서약 펜’이지요.”
“그, 그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훔쳐서 조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럴 줄 알고, 내가 아주 재미있는 마법을 하나 걸어 두었답니다.”
엘리샤가 깃펜의 끝부분을 가볍게 톡 두드렸다.
스우우우.
허공에 거대한 투영 마법의 화면이 펼쳐졌다. 그것은 [제국 평판 장부]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엘리샤가 미리 깃펜에 새겨 둔 마력 지문 기록 장치의 영상이었다.
화면 속에서, 한밤중에 엘리샤의 연구실에 몰래 침입해 서랍을 뒤지고 깃펜을 품에 넣는 세드릭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그의 얼굴 주름 하나까지 HD 화질급으로 생생하게 드러났다.
“어…… 어?”
세드릭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이것뿐만이 아니죠.”
엘리샤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화면을 전환했다.
화면에는 세드릭이 바스토프 추기경의 비서에게 뇌물을 받으며 ‘역사 보관소의 세금 원본 장부를 소각해 주겠다’고 서약서에 서명하는 장면, 그리고 그 서약서에 은제 깃펜으로 직접 마력 지문을 찍는 순간까지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절도, 위증, 그리고 제국 공문서 위조 및 교황청과의 종교적 결탁을 통한 역사 왜곡 음모.”
엘리샤가 깃펜을 가볍게 흔들며 생긋 웃었다.
“이 모든 증거가 이 은제 깃펜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답니다. 내가 조작했다고요? 아카데미의 마력 감지 기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세드릭.”
“이, 이럴 리가…… 이건 환각 마법이다! 추기경 각하! 성기사단장님! 저년의 목을 치십시오!”
세드릭이 비명을 지르며 성기사들에게 명령하려 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의 등 뒤에서, 지옥의 심연보다 더 차가운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리안 헤스벨트가 천천히 밀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입술은 아직도 엘리샤와의 접촉으로 인해 미세하게 젖어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내 구역에서 감히 누구의 목을 치겠다는 건가.”
칼리안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성기사들의 발밑이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콰과광! 하는 소리와 함께 연구실 바닥 전체가 빙판으로 변하며 그들의 다리를 단단히 옭아맸다.
“전, 전하! 저 여자는 아르덴의 마약성 마기 발산자입니다! 추기경 각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드릭이 목숨을 구걸하듯 외쳤다.
칼리안은 엘리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예민한 마력 감지력이 발동했다.
하지만 엘리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오직 차갑고 순수한 북부의 성질뿐이었다. 방금 전 그녀가 칼리안의 마력을 완벽하게 흡수하여 자신의 마기를 동결시켰기 때문이었다.
“마기?”
칼리안이 낮게 읊조렸다.
“이 방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오직 나의 것뿐이다. 교황청의 개들이 감히 내 마력을 마기라 부르며 감사관의 수사에 훼방을 놓는군.”
“어, 어……?”
세드릭의 눈동자가 공포로 흔들렸다.
“끌고 가라.”
칼리안의 단호한 명령에, 연구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공가 직속 검은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성흔 결계의 제약을 비웃듯 성기사들을 가차 없이 제압하고, 세드릭의 멱살을 잡아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전하! 살려 주십시오! 전하! 엘리샤! 이 나쁜 년아! 네가 감히 나를—!”
세드릭은 짐짝처럼 질질 끌려 나갔고, 그의 비명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완벽한 격상 반격이자 사이다 같은 해소였다. 은제 깃펜의 복선은 이로써 완벽하게 회수되었고, 세드릭은 다시는 재기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 * *
소란스러운 무리가 모두 사라진 연구실.
박살 난 문틈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어스름한 저녁 빛이 창가로 스며들며, 방 안에 단둘이 남은 엘리샤와 칼리안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엘리샤는 깃펜을 서랍에 넣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직장 내 괴롭힘 유발자 하나는 확실하게 처리했네. 이제 오늘 야근 수당 청구하고 진짜 퇴근해야지.’
하지만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 칼리안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넓은 어깨와 압도적인 피지컬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칼리안은 숨이 아직 가쁜 채로, 붉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엘리샤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천천히 올라와 엘리샤의 턱끝을 부드럽게 쥐어 올렸다.
피할 수 없는 집요한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엘리샤 폰 아르덴.”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주체할 수 없는 혼란과, 그녀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 지략가로서의 집착 때문이었다.
“방금 전의 그 마력 융합…… 그리고 그대의 이 완벽한 알리바이.”
칼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가, 다시 그녀의 맑고 영악한 눈동자로 향했다.
“그대는 대체 내게 무엇이지? 내가 사냥해야 할 아르덴의 마지막 잔당인가.”
그가 허리춤의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르릉, 하며 검날이 아주 미세하게 칼집에서 벗어나 차가운 은광을 발했다.
“아니면…… 내 평생을 바쳐서라도 소유해야 할 동반자인가.”
검을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냥감을 향해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북부의 사냥개가, 생애 처음으로 검을 뽑아야 할지 아니면 무릎을 꿇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샤는 그의 떨리는 칼자루를 내려다보며, 입술 끝을 매끄럽게 올렸다.
소리 없는 두뇌 싸움과 집착의 서막이, 닫힌 연구실 안에서 더욱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