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온기에 엘리샤는 숨을 멈췄다.

칼리안의 시선은 뱀처럼 집요하게 그녀의 붉은 입술 위에 머물러 있었다. 긴장감으로 짓씹어 터진 입술 끝에서 배어 나온 붉은 핏방울이 그의 장갑 끄트머리에 묻어났다. 칼리안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으며, 묘하게 뒤틀린 갈망이 그의 잘생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이 오만하고 영악한 여자의 진짜 얼굴을 기어코 제 손으로 찢어내겠다는 맹수 같은 집착이었다.

엘리샤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미친 대공이 지금 남의 피를 닦아주면서 로맨스릴러를 찍고 자빠졌네. 내 틴트가 얼만데 감히 땀내 나는 가죽 장갑으로 문지르는 거지?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지만, 참자. 저 남자는 내 목숨줄을 쥐고 있는 감사관이다.’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를 뒤로 물리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매 안단에 수놓인 실크 레이스를 정리하며 차분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음 기회로 미루시지요, 전하. 그 전에 제 정당한 재산부터 돌려받아야겠습니다.”

엘리샤는 세드릭이 흘린 피가 낭자한 바닥 한가운데, 덩그러니 떨어져 있던 은빛 물건을 가리켰다.

세드릭이 체포당하며 떨어뜨린 고대의 은제 깃펜이었다. 깃대마다 섬세하게 양각된 월계수 잎사귀와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만년필 촉이 촛불 아래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1화에서 세드릭이 그녀의 연구실에서 훔쳐 갔던 바로 그 아르덴 가문의 유물이었다.

“그것은 제 개인 소장품이자, 아카데미에 정식으로 등록된 학술용 마력 깃펜입니다. 펜촉 안쪽에 제 고유 마력 지문이 각인되어 있지요. 세드릭이 제 학술 자료를 도용하려 했다는 결정적인 물증입니다.”

칼리안의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깃펜을 구두 끝으로 가볍게 툭 차서 공중으로 띄운 뒤, 한 손으로 가볍게 낚아챘다. 깃대를 훑는 그의 손가락 움직임이 매끄러웠다.

“과연.”

칼리안이 펜촉 안쪽을 들여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미세한 각인이 있군. 아르덴 가문의 문장과 정확히 일치하는군.”

“도난 신고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전하께서 직접 범인을 잡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엘리샤는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칼리안은 은제 깃펜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떨어뜨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엘리샤의 눈앞에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복선 회수 완료: '배신자 세드릭의 은제 깃펜 도난 사건'이 해결되었습니다.] - 보상: 세드릭의 위증죄 혐의 확정 및 아카데미 내 평판 수치 +500 - 현재 누적 평판: 3,200 (명망 있는 신예 교수)

동시에 세드릭의 현재 상태가 평판 장부의 한구석에 붉은 글씨로 갱신되었다.

[세드릭 아르덴: 아카데미 지하 감옥에 수감 중. 극도의 분노와 패배감 속에서 교황청 비밀 연락책에게 구명요청 서한을 보낼 음모를 꾸미는 중.]

엘리샤는 장부를 스캔하며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감옥에 처넣어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가 교황청과 완전히 끈이 닿게 둘 수 없었다. 그녀의 은퇴 자금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흐름을 통제해야 했다.

“이것으로 내 의문이 하나 풀렸군.”

칼리안이 가죽 장갑을 벗어 책상 위에 던져놓으며 말했다. 그의 흑청색 제복 소매 사이로 단단하게 단련된 손목이 드러났다.

“하지만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자치권 뒤에 숨은 네 진짜 목적이 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엘리샤 교수, 네가 단순한 역사학자라고 믿기에는 지나치게 판을 잘 짜는군.”

“과찬이십니다, 전하. 저는 그저 제 밥그릇을 지키고 싶은 평범한 월급쟁이... 아니, 학자일 뿐입니다.”

“평범한 학자는 대공의 심문실에서 살아남을 생각을 하지 않지.”

칼리안은 품 안에서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두꺼운 가죽 문서를 꺼내 그녀의 책상 위에 거칠게 던졌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살짝 피어올랐다. 겉표지에는 금박으로 ‘제국-Vatican 공동 역사 교류전 검수본’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다음 주에 있을 학술제에서 발표할 전시 자료다. 제국 감사원과 교황청 사절단이 공동으로 검수해야 하는 제국의 건국사 원본이지. 하지만 내 직감이 말하더군. 이 문서 곳곳에 교황청의 사악한 덧칠이 되어 있다고.”

칼리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교황청의 학자들은 교활하다. 그들이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역사적 왜곡을 잡아내지 못하면, 이번 학술제는 교황청이 황실의 권위를 짓밟는 무대가 될 것이다. 황실 감사관으로서 내 지위를 걸고, 이 문서를 완벽하게 검수해야 한다.”

“그것을 왜 저에게 주시는지요? 역사학과에는 저보다 경험이 많으신 노교수님들이 많습니다만.”

“그 늙은이들은 이미 바스토프 추기경의 돈줄에 매수되었거나, 교황청의 파문 협박에 오줌을 지릴 겁쟁이들이니까.”

칼리안이 엘리샤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서늘한 얼음나무 향이 그녀의 정수리를 내리눌렀다.

“너라면 교황청의 눈치를 보지 않겠지. 아니, 오히려 그들을 이용해 네 평판을 올릴 기회로 삼을 테지. 어떤가, 엘리샤 교수? 나와 손을 잡고 이 위조된 역사서를 해체해 보겠나?”

엘리샤는 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대공이 직접 가져온 기밀 업무라. 이것만 성공하면 아카데미 총장단도 날 함부로 자르지 못할 독보적인 학술 권력을 쥐게 된다. 칼리안을 내 완벽한 방패막이로 삼을 기회야.’

“좋습니다. 기꺼이 전하의 눈과 귀가 되어 드리지요.”

엘리샤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

그날 밤, 엘리샤의 개인 연구실은 거대한 도서관을 방방곡곡 뒤집어놓은 듯한 난장판이 되었다.

바닥에는 양가죽으로 장정된 수십 권의 고서가 널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정제되지 않은 독한 마력 잉크 냄새가 진동했다. 은은한 로즈마리 향 촛불이 타오르며 어두운 방 안을 붉게 물들였다.

“전하, 놀고 계시지 말고 저기 세 번째 선반 위에 있는 ‘북부 정벌사’ 4권을 좀 꺼내 주십시오.”

엘리샤는 깃펜을 입에 문 채, 산더미 같은 자료 분석에 열중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지시했다.

북부의 지배자이자, 제국 황실의 사냥개로 불리는 칼리안 헤스벨트 대공은 지금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생 명령만 내리며 살아온 그가, 일개 초임 교수에게 부려지고 있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왜 네 책 심부름을 해야 하지?”

“공동 연구를 제안하신 것은 전하십니다. 그리고 이 자료는 고대 북부 방언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북부 출신이신 전하께서 직접 대조해 주셔야 빠른 작업이 가능합니다. 자, 서두르시지요. 밤은 짧고 분석할 서류는 산더미입니다.”

엘리샤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K-직장인 시절, 마감 직전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부하 직원을 굴리던 버릇이 고스란히 튀어나온 것이었다.

칼리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미친 듯이 양가죽 서류를 분석해 나가는 그녀의 옆모습에 묘한 경외감마저 들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교황청이 정교하게 숨겨놓은 세금 포탈 합의서와 영토 위조의 흔적들이 추풍낙엽처럼 폭로되고 있었다.

“여기 이 부분입니다.”

엘리샤가 깃펜 끝으로 오래된 양가죽 문서의 한 구절을 짚었다.

“교황청은 100년 전 북부 대기근 당시 황실이 지급한 구휼 자금을 ‘성전 기부금’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북부 영지의 세금을 면제받는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것이지요. 아주 파렴치한 사기극입니다.”

“이 부분을 도려내면 교황청의 자금줄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겠군.”

칼리안의 눈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그는 엘리샤가 가리킨 부분을 꼼꼼히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왜곡을 증명하려면... 음, 자료가 하나 더 필요하군요.”

엘리샤는 시스템 장부를 살짝 켰다.

[제국 평판 장부(Ledger)가 활성화됩니다.] - 소모 마기: 50 (누적 악녀 지치 점차 상승) - 정보 검색: ‘100년 전 북부 구휼 세무 원본’의 위치 -> [카이로스 역사 보관소 지하 3층, 제4서고 비밀 벽면 뒤]

장부를 닫는 순간, 그녀의 몸에서 미세하고 짙은 검은색 마기가 방출되었다. 사악하고도 차가운 아르덴 가문 특유의 마기였다.

칼리안의 미간이 단번에 좁혀졌다. 그의 고도로 발달한 마력 감지력이 실시간으로 요동쳤다.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맹수처럼, 그의 시선이 엘리샤의 목덜미로 향했다.

“...이 냄새는?”

그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엘리샤는 등등한 살기에 등등한 소름이 돋았으나, 미리 준비해 둔 대처법을 곧바로 실행했다. 그녀는 책상 아래에 숨겨두었던 강한 허브 향의 아로마 오일을 재빨리 자신의 소매에 들이부었다.

“아, 머리가 너무 아파서 수입 허브 오일을 좀 발랐습니다. 향이 지나치게 강했나 보군요. 북부의 예민하신 후각에는 자극적이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지독할 정도로 강한 로즈마리와 민트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우며 마기의 흔적을 완벽히 지워버렸다.

칼리안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지만, 이미 공기 중에 흩어진 마기를 더는 추적할 수 없었다. 그는 손을 거두며 낮게 경고했다.

“적당히 해라. 네 정체가 무엇이든, 내 코끝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을 테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

엘리샤는 태연하게 웃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하마터면 은퇴하기도 전에 단두대로 직행할 뻔했네. 이 사냥개 같은 남자 앞에서는 시스템도 조심히 써야겠어.’

그녀는 밤샘 작업으로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완성된 검수 보고서를 칼리안의 품에 안겨주었다.

“여기 완성본입니다. 교황청의 위조 흔적을 완벽히 격파할 논리적 무기지요. 이제 퇴근... 아니, 이만 쉬고 싶군요.”

칼리안은 그녀가 건넨 서류를 받아들었다. 밤샘 작업을 핑계로 자신을 어시스턴트처럼 부려 먹은 이 대담한 여자는, 이제 완전히 방전된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묻고 있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가죽 장갑을 다시 꼈다.

“수고했다, 엘리샤 교수. 밤이 깊었으니 내 친히 네 처소까지 호위해 주지.”

“아니요, 전하. 사양하겠습니다. 대공 전하의 호위를 받으며 퇴근하는 교수의 평판은 아카데미에서 아주 이상하게 돌아가거든요.”

“내 호위를 거절한 자는 네가 처음이군.”

두 사람은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아카데미의 고풍스러운 석조 회랑을 걸었다. 짙은 에메랄드빛 캐시미어 숄을 두른 엘리샤와, 칠흑 같은 모피 코트를 걸친 칼리안의 그림자가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겹쳤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갈 때, 칼리안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교류전이 끝나면, 바스토프 추기경은 네 존재를 눈엣가시로 여길 것이다. 교황청의 촉수는 생각보다 깊고 날카롭지.”

“제가 그들의 밥그릇을 깨부수었으니 당연한 수순이겠지요.”

엘리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두렵지 않은가?”

“두려워한다고 해서 제 밥그릇이 지켜지지는 않으니까요. 저는 그저 제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고, 안전하게 남부 휴양지에서 은퇴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입니다.”

칼리안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그녀의 옆모습은, 영악한 지략가라기보다는 그저 평화를 갈구하는 고독한 학자처럼 보였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묘한 파문이 일었다. 이 여자를 단순히 사냥감으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기묘한 감정의 싹이었다.

“...너를 지켜보겠다, 엘리샤.”

그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부드러운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정문 앞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수십 대의 백은색 마차가 교정 앞 광장을 가득 메웠고, 그 마차마다 황금빛 태양 문장—교황청의 상징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중무장한 교황청 성기사단이 차가운 철갑 소리를 내며 아카데미의 정문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학술처 소속의 교수들이 헐레벌떡 뛰어 나와 항의했으나, 성기사들은 거칠게 그들을 밀쳐냈다.

가장 화려한 황금 장식 마차의 문이 열리고, 붉은색 비단 사제복을 입은 사내가 천천히 대지 위로 발을 디뎠다. 그의 손에는 피처럼 붉은 루비가 박힌 거대한 묵주가 들려 있었다.

바스토프 추기경이었다.

그의 자애로운 듯 뒤틀린 미소 뒤로, 서슬 퍼런 살기가 교정을 뒤흔들었다.

“아카데미의 자치권도 신의 성스러운 섭리 앞에서는 무력한 법.”

바스토프 추기경이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역사학과 엘리샤 폰 아르덴 교수가 음해와 위조로 교황청의 명예를 더럽혔다. 이에 교황청의 권한으로, 그녀에게 임대된 모든 역사 강의 권한을 즉시 강제 회수하고 역사 보관소의 출입을 영구히 금지한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엘리샤의 눈앞에 붉은색 경고 시스템 창이 요란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위기 경보: 적대 세력 '교황청'의 기습적인 강제 처분령이 발동되었습니다.] - 영향: 역사 강의권 박탈 위기, 역사 보관소 접근 차단 위기 - 평판 하락 위험도: 극대

교정 정문에서 마주친 엘리샤와 바스토프 추기경의 시선이 공중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추기경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과연 엘리샤는 이 거대한 종교 권력의 폭압 속에서 자신의 강의와 목숨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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