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비밀 심문실을 채운 차가운 정적이 날카로운 경보음에 산산이 부서졌다.

뎅—! 뎅—! 뎅—!

두꺼운 석조 벽을 타고 흐르는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심장부에서만 울리는, 마기 유출을 뜻하는 청동 종소리였다.

턱을 거칠게 움켜쥔 대공의 검은 가죽 장갑에서 가느다란 마력의 독점적 열기가 배어 나왔다. 칼리안 헤스벨트의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의 시선은 엘리샤의 붉은 입술에서 탁자 위로, 급격하게 보랏빛을 띠며 타오르는 청색 마기 탐지석으로 옮겨갔다.

“이 마기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벼려진 칼날처럼 내려앉았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엘리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차, 평판 장부를 너무 정밀하게 두드렸나? 인과율의 대가가 하필 지금 터지다니!’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 ‘악녀 지치’가 소리 없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아르덴의 잔당으로 낙인찍혀 단두대로 직행할 판이었다. 남부 휴양지의 안락한 은퇴 생활은커녕, 목과 몸통이 이별하는 끔찍한 엔딩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엘리샤는 억지로 심박수를 늦추며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었다.

“전하, 손길이 지나치게 거칠으십니다. 제 가냘픈 턱뼈가 으스러지기라도 하면, 내일 역사학 강의는 휴강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녀의 태연자약한 대꾸에 칼리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가죽 장갑 낀 손가락이 엘리샤의 턱선을 스치듯 떨어져 나갔다. 칼리안은 그녀를 거칠게 밀쳐내며 자리에서 번개처럼 일어섰다. 거대한 체구가 내뿜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좁은 심문실을 가득 채웠다.

“하인리히.”

칼리안이 문가에 대기하던 보좌관을 향해 낮게 명령했다.

“예, 대공 전하.”

“대강당 방향이다. 기사단을 즉시 전개해라. 그리고—”

칼리안이 몸을 돌려 엘리샤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의 광포한 집념이 이글거렸다.

“이 여자의 마력 파형을 실시간으로 추적해라. 털끝만 한 마기라도 흘러나오는 순간, 그 즉시 현장에서 구속한다. 자치권이고 뭐고 상관없다.”

“명령을 받듭니다.”

철갑을 두른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칼리안은 망토 자락을 크게 휘날리며 심문실을 박차고 나갔다. 검은 벨벳 망토 끝자락에 수놓인 헤스벨트 가문의 은빛 늑대 문양이 어둠 속에서 흉포하게 일렁였다.

남겨진 엘리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실크 칼라를 가다듬었다.

실시간 마력 파형 추적이라니.

이것은 족쇄나 다름없었다. 평판 장부를 단 한 번이라도 더 가동했다간, 대공의 레이더에 사냥 신호를 보내는 꼴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내가 아니지.’

엘리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의 주판알이 빠르게 굴러갔다. 대강당의 경보가 울린 원인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쏠린 마기 추적의 시선을 돌릴 ‘미끼’가 필요했다. 그녀는 서둘러 심문실을 나와 역사관 별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역사관 별채 2층, 조교실 복도는 평소와 달리 기묘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엘리샤는 자신의 수석 조교인 멜리사 로렌의 방 앞을 지나치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신경질적인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일개 평민 출신 주제에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해? 멜리사, 네가 아카데미에서 정식 연구관으로 임용될 수 있을 것 같나?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네 학술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엘리샤는 단번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귀족 파 학파의 세력을 등에 업고 거들먹거리던 상급 조교, 조슈아였다. 그는 평소에도 평민 출신 조교들을 부려 먹으며 논문을 가로채기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다.

“조슈아 선배님,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멜리사의 목소리는 울음 섞인 피로로 젖어 있었다.

“저는 그저 엘리샤 교수님의 서류 정리를 도울 뿐입니다. 교수님의 비밀 연구 일지 같은 건 제게 없습니다. 설령 있다 해도, 제국의 법과 아카데미의 규율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규율? 하! 그 알량한 규율이 네 밥줄을 지켜줄 것 같나? 당장 그 교수의 서랍 열쇠를 넘겨. 아니면 내일 당장 네가 역사 보관소의 장서를 훔쳤다고 상부에 보고할 테니까.”

지독한 협박이었다. 멜리사는 책상 위에 놓인 낡은 깃펜을 손가락으로 팽팽 돌리며 불안감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엘리샤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내 귀한 노예…… 아니, 내 소중한 조교를 감히 건드려? 내 은퇴 자금과 서류 업무를 독박 써줄 대체 불가능한 인력을 감히?’

이것은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자산 가치로 치면 수만 골드에 달하는 멜리사의 노동력을 갉아먹으려는 기생충 같은 존재.

엘리샤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동시에 그녀의 안구 위에 황금빛 격자무늬가 스쳐 지나갔다. [제국 평판 장부]가 가동되는 순간이었다.

우웅—!

머릿속에서 가벼운 이명이 일며, 엘리샤의 영혼 깊은 곳에서 검은 안개 같은 ‘악녀 지치’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복도 저편에서 마력 추적기를 든 감사원 기사들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단번에 끝내야 해.’

엘리샤는 조슈아의 머리 위에 떠오른 반투명한 장부를 빠르게 훑었다.

[ 대상: 조슈아 벨몬트 (상급 조교) ] · 평판 등급: F (위선과 사기로 점철된 삼류 학자) · 숨겨진 비밀: 최근 교황청(바스토프 추기경 세력)의 사주를 받아 지하 역사 보관소의 ‘성전 세금 포탈 합의서’가 담긴 봉인 상자를 훼손함. · 현재 상태: 봉인 상자를 열려다 촉발된 마기를 억제하기 위해, 훔쳐낸 봉인 상자의 파편을 품안에 숨겨두고 있음. 이를 엘리샤 교수의 연구실에 은닉하여 누명을 씌울 계획임.

‘이런,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잖아?’

엘리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대강당의 경보를 울린 진짜 주범이 제 발로 눈앞에 서 있었다. 심지어 교황청의 끄나풀로서 멜리사뿐만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덫을 놓으려던 참이었다.

달칵.

엘리샤가 문을 열고 우아하게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머, 조교실이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했더니. 조슈아 조교가 제 방에 손님으로 와 계셨군요.”

갑작스러운 엘리샤의 등장에 조슈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그는 특유의 건방진 태도로 옷깃을 털며 비웃음을 흘렸다.

“아, 엘리샤 교수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이 무능한 평민 조교의 태도에 대해 한마디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태도라.”

엘리샤는 걸음을 옮겨 멜리사의 책상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녀의 보랏빛 실크 드레스 자락이 우아한 궤적을 그리며 바닥을 쓸었다.

“제 조교의 태도는 아주 훌륭합니다. 밤을 새워 제 강의 자료를 정리하는 성실함은 아카데미 최고 수준이지요. 오히려 태도에 문제가 있는 건, 남의 연구실에 무단으로 침입해 협박을 일삼는 조슈아 조교 본인인 것 같습니다만?”

“협박이라니요! 저는 그저 학술적 조언을—”

그때였다. 복도를 가득 채우던 묵직한 군화 소리가 멜리사의 방 앞에서 딱 멈추었다.

쾅—!

문이 거칠게 열리며, 칼리안 대공이 이끄는 감사원 기사단이 방 안을 포위했다. 칼리안의 손에 들린 청색 마기 탐지석이 맹렬하게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력 반응이 이 방에서 멈췄다.”

칼리안의 시선이 방 안을 훑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엘리샤에게 고정되었다. 탐지석의 바늘은 정확히 엘리샤와 조슈아가 서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엘리샤 교수. 역시 네년이—”

“전하, 타이밍이 아주 예술이십니다.”

엘리샤가 칼리안의 말을 가로채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 없이, 오히려 구세주를 만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엘리샤는 소매 속에 감춰둔 자신의 손끝을 가볍게 튕겼다. 평판 장부의 인과율 조작 기능을 미세하게 발동하여, 자신의 몸에서 방출되던 ‘악녀 지치’의 마력 파형을 조슈아가 품고 있는 ‘봉인 상자의 마기’와 강제로 동조시켰다.

어차피 같은 마기 계열이었다. 약간의 주파수만 틀어주면, 탐지기는 더 거대하고 노골적인 마력을 뿜어내는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반응하기 마련이었다.

삐이이이—!

마기 탐지석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조슈아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조슈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어……? 이, 이게 왜 나를……?”

“조슈아 조교.”

엘리샤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조슈아를 압박했다.

“방금 대강당 지하에서 울린 비상 경보의 주범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교황청의 사주를 받아 카이로스 역사 보관소의 봉인을 훼손한 대역죄인.”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는 그런 적이—!”

“발뺌해도 소용없습니다. 전하, 조슈아 조교의 왼쪽 덧옷 안감을 확인해 보시지요. 사보아 실크로 덧댄 비밀 주머니가 있을 겁니다. 그 안에 교황청의 인장이 찍힌 밀서와, 방금 훼손한 역사 보관소 봉인 상자의 귀퉁이 파편이 들어있을 테니까요.”

엘리샤의 거침없는 폭로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칼리안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그가 턱짓을 하자, 두 명의 감사원 기사가 순식간에 조슈아의 양팔을 제압했다.

“놔! 놓으란 말이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나는 벨몬트 가문의—”

부욱—!

기사가 조슈아의 덧옷 안감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엘리샤의 말대로, 화려한 사보아 실크 안감 사이에서 붉은 밀서 한 장과, 검붉은 마기를 내뿜는 고대 금속 파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파편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마기가 탐지석의 빛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 이것은…….”

멜리사는 겁에 질려 책상 뒤로 숨었고, 조슈아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덜덜 떨기 시작했다.

완벽한 현장 검거였다.

엘리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에게 쏠렸던 마기 추적의 위기를 조슈아의 진짜 범죄를 폭로함으로써 완벽하게 덮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눈엣가시 같던 귀족 파 조교를 합법적으로 파멸시키고 제자의 안전까지 확보했다.

이것이야말로 일타쌍피, 창조경제의 극치였다.

* * *

칼리안은 바닥에 떨어진 붉은 밀서를 구두 굽으로 지그시 밟았다. 그의 시선이 밀서에 찍힌 교황청의 문양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교황청의 바스토프 추기경 세력이 아카데미의 봉인을 건드렸다라…….”

칼리안의 목소리에는 깊은 살기가 담겨 있었다. 황실과 아카데미의 팽팽한 대치 상황 속에서, 교황청이 뒤로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대공으로서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카데미 내부가 생각보다 훨씬 더 깊게 부패해 있으며,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순간이었다.

칼리안은 고개를 돌려 엘리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마치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우아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고도 투명했다. 타인을 절대 믿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불신과, 오직 자신만의 손익계산서로 세상을 재단하는 지략가의 눈빛.

칼리안은 이 묘한 위화감 속에서도 그녀의 완벽한 논리와 대처에 다시 한번 기묘한 흥미를 느꼈다.

“엘리샤 교수. 이번에도 아주 놀라운 ‘학술적 혜안’을 보여주셨군.”

“과찬이십니다, 대공 전하. 저는 그저 제 가냘픈 조교를 보호하고, 아카데미의 역사적 정의를 지키려 했을 뿐입니다.”

엘리샤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가증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 더러운 범죄자를 당장 감사원 지하 감옥으로 압송해라.”

칼리안의 명령에 기사들이 조슈아를 거칠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바닥에 발을 버둥거리며 광분했다. 이대로 끌려간다면 가문의 파멸은 물론이고, 평생 빛도 보지 못하는 지하 감옥에서 썩어야 했다.

“이건 음모야! 저 여자가 꾸민 짓이라고!”

조슈아가 악을 쓰며 복도로 끌려 나가던 그 찰나였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수라장이 된 조교실 책상 너머로 열려 있는 엘리샤의 개인 연구실 문틈이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보이는, 침대 밑에 반쯤 열려 있는 허름한 나무 상자.

조슈아는 세드릭에게 들었던 비밀을 떠올렸다.

그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칼리안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대공 전하! 속으시는 겁니다! 저 사악한 년의 연구실을 수색하십시오! 저 여자의 침대 밑 상자에 아르덴 가문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고대 은제 깃펜이 숨겨져 있습니다! 세드릭이 똑똑히 보았다고 했습니다! 저 여자가 바로 아르덴의 잔당입니다!”

순간, 복도를 가득 채우던 소란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칼리안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의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그리고 극도로 차갑게 엘리샤를 향해 돌아갔다.

엘리샤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던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세드릭…… 그 빌어먹을 인간이 결국 사고를 쳤구나.’

그녀의 머릿속 손익계산서가 요란무쌍한 경고음을 울리며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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