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칼날 같은 침묵이 대강당의 공기를 사정없이 베어 갈랐다.

칠흑 같은 갑주를 입은 헤스벨트 대공가의 기사들은 거대한 강철 장벽처럼 엘리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갑옷의 이음새가 맞물리며 내는 차갑고 둔탁한 금속음이 사방을 메웠다. 그 철옹성 같은 기사들의 틈새를 가르며 다가온 칼리안 대공은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검은 마검의 자루를 탁, 탁, 일정하게 두들겼다. 규칙적인 소리가 마치 목숨을 카운트다운하는 초침처럼 들렸다.

“강의는 아주 인상 깊었소, 엘리샤 교수. 귀하의 그 대단한 정보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무척이나 호기심이 생기는군.”

귓가에 닿는 칼리안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북부의 만년설처럼 서늘했다.

‘아니, 퇴근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엘리샤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제 막 첫 강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을 나서서 따뜻한 홍차와 레몬 타르트를 즐기려던 참이었다. 평화롭고 안락한 정년퇴임과 남부 휴양지의 3층 저택 비자금 계획이 시작부터 거대한 대공이라는 험난한 바위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단 한 올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상아색 카슈미르 실크 블라우스의 깃을 우아하게 매만진 엘리샤는 눈물이 맺힌 듯한 물방울 모양의 자수정 귀걸이를 가볍게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동행이라니요, 대공 전하. 제국 감사관의 권한이 아무리 막강하다 한들,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교수를 아무런 합당한 혐의도 없이 연행할 수는 없을 텐데요.”

“혐의라면 그 방금 전의 훌륭한 강의가 증명하고 있지 않나?”

칼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가차 없이 좁혀졌다.

“벨몬트 자제의 은밀한 사생활을 그토록 훤히 꿰뚫고 있는 역사 교수라니. 아카데미 내부의 첩보망을 쥐고 흔드는 쥐새끼이거나, 혹은…… 황실을 뒤흔들고 사라진 아르덴 가문의 잔당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지.”

“역사학자는 사소한 사료와 인간의 행동 패턴 속에서 진실을 발굴하는 정원사와 같습니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음침한 쥐새끼가 아니랍니다.”

“그 말의 진위는 밀실에서 가려내도록 하지.”

칼리안이 손짓하자, 기사들이 강압적으로 그녀를 에워쌌다. 사방이 강철 투구와 가죽 냄새로 막혀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여기서 물리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게다가 아카데미의 자치령이라는 방패를 쓰기에는, 아직 학장단이 감사원의 초반 기세를 꺾지 못한 상태였다.

‘좋아, 찔러보고 싶으시다 이거지?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고.’

엘리샤는 턱을 치켜세웠다.

“좋습니다. 기꺼이 안내에 따르지요. 다만, 제 귀중한 연구 시간을 빼앗은 대가는 톡톡히 치르셔야 할 겁니다, 감사관님.”

***

아카데미 동관 지하에 임시로 마련된 대공가 직속 비밀 심문실은 숨이 막힐 정도로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사방의 벽은 마력을 흡수하고 차단하는 검은 석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창문 하나 없이 오직 천장에 매달린 마법 조명만이 음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흑청색 벨벳이 씌워진 무거운 참나무 탁자와 두 개의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칼리안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가죽 장갑을 벗어 던졌다. 드러난 그의 손등에는 검을 쥔 자의 굳은살과 흉터가 선명했다. 그는 품 안에서 주먹만 한 청색 마력석을 꺼내 탁자 중앙에 툭 던져 놓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지, 엘리샤 교수?”

마력석은 투명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엘리샤는 그 돌을 바라보며 속으로 침을 삼켰다.

‘마기 탐지석.’

북부대공 칼리안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이자, 자신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이 돌은 극도로 미세한 악의나 거짓말, 특히 아르덴 가문 특유의 짙은 마기인 ‘악녀 지치’를 감지하면 붉은빛으로 변하며 비명을 지르듯 공명한다.

“이 방은 모든 외부 마력이 차단된 방음 결계 속이오.”

칼리안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수려하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조명 빛을 받아 비현실적인 음영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귀하가 숨 쉬는 모든 공기, 심장박동의 변화, 그리고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아주 미세한 마력의 파동까지 저 탐지석이 실시간으로 기록할 거요. 이제 묻지. 귀하의 진짜 성이 무엇이지?”

그의 음성에 실린 압도적인 살기가 밀실을 무겁게 짓눌렀다. 평범한 이라면 숨도 쉬지 못하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자백했을 강도였다. 엘리샤의 얇은 실크 블라우스 아래로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하지만 엘리샤는 흐트러짐 없이 허리를 곧게 폈다. 그녀는 가방에서 깃펜을 꺼내 길고 부드러운 깃털을 손가락 끝으로 일정하게 쓸어내렸다. 슥, 슥 하는 소리가 방 안의 긴장감을 기묘하게 완화시켰다.

‘침착하자. 내 심장박동이 빨라지면 저 탐지석이 반응한다. 모든 관계는 오직 손익계산서일 뿐이야. 저 대공님의 머릿속에 든 계산기를 부수면 내가 이긴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제국 평판 장부(Ledger), 기동.’

시야가 일순간 황금빛 격자무늬로 뒤덮였다. 눈앞에 앉은 칼리안의 머리 위로 반투명한 양가죽 장부 페이지가 스르륵 펼쳐졌다.

*** [대상: 칼리안 헤스벨트 (북부대공 / 제국 감사관)] - 신용도: 98/100 (극도로 엄격하고 냉혹함) - 숨겨진 약점/비밀: 황실의 감시를 피해 북부의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비공식 루트로 동방 무역선과 연계하여 ‘라돈 제국 선박 융통’을 통한 대규모 밀수를 진행 중. (현재 황실 감사원의 공식 장부에는 누락되어 있음) - 현 상태: 대상은 용의자 엘리샤의 정체에 대해 90%의 의심을 품고 있으나, 명확한 물증이 없어 심리적 압박으로 자백을 유도하는 중. ***

장부의 내용을 훑어내리는 엘리샤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라돈 제국 선박 융통이라.’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황실의 충직한 사냥개인 척하는 북부대공이, 뒤로는 황실 몰래 북부의 독자적인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밀수를 자행하고 있었다니. 이보다 더 신선하고 맛있는 미끼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장부를 열람하고 인과율의 실타래를 건드린 대가는 즉각적으로 찾아왔다. 등 뒤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입자, ‘악녀 지치’가 영혼의 틈새에서 방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심장박동이 기형적으로 요동치며 마기 탐지석이 미세하게 보랏빛으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칼리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의 사냥개 같은 직감이 작동한 것이다.

“마력의 흐름이 변하는군. 엘리샤 교수, 귀하의 영혼 밑바닥에서 아주 익숙한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데?”

그가 가죽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몸을 더 가까이 밀착시켜 왔다. 그의 숨결이 엘리샤의 입술 근처까지 닿을 듯 가까웠다.

엘리샤는 깃펜을 내려놓고, 우아하게 턱을 괴며 그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대공 전하. 역사학의 재미있는 비밀 하나를 알려드릴까요?”

“질문은 내가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요. 특히 권력자들이 돈을 숨기는 방식에 있어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렇답니다.”

엘리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밀실의 무거운 공기를 부드럽게 감쌌다. 칼리안은 그녀의 뜬금없는 학술적 접근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눈빛에 담긴 기묘한 확신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약 150년 전, 라돈 제국의 재무대신이었던 세바스티안 후작은 황실의 감시를 피해 가문의 사양 군대를 유지할 자금을 모으고자 했습니다. 그는 아주 영리했지요. 공식 장부에는 단 한 푼의 세금도 누락시키지 않았지만, ‘동방 무역선 차입’이라는 명목으로 선박들을 우회 등록하여 밀수를 진행했습니다. 공식 감사관들의 눈을 피해 북부 해안의 숨겨진 항구로 금괴를 실어 날랐지요.”

칼리안의 눈동자가 일순간 거칠게 흔들렸다. 그의 손가락 끝이 굳어지는 것을 엘리샤는 놓치지 않았다.

“그 세바스티안 후작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엘리샤가 속삭이듯 말을 이어갔다.

“그는 내부 사정을 아주 잘 아는 영리한 역사학자에게 비밀 장부를 들키고 말았답니다. 역사학자는 그 비밀을 폭로하는 대신, 후작에게 아주 타당한 ‘학술 후원’을 요구했지요. 그리고 후작은 기쁜 마음으로 종신 연구비를 대며 평화롭게 공존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지혜의 교환이지 않습니까?”

칼리안의 호흡이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서 여유롭던 미소가 완전히 지워졌다.

방 안의 마기 탐지석은 여전히 미세하게 반응하고 있었지만, 칼리안의 온 신경은 이미 탐지석이 아니라 엘리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치명적인 ‘경고’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여자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그것은 헤스벨트 대공가에서도 오직 세 명만이 아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북부의 혹독한 겨울을 버티고 가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황실의 숨통을 피하려 자행한 밀수 루트였다. 만약 이 사실이 황실 감사원에 공식적으로 흘러 들어간다면, 대공가는 반역죄에 준하는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칼리안의 푸른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아닌,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경악과 경계심이 소용돌이쳤다.

“……귀하, 대체 정체가 무엇이지?”

그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피의 심문관으로서 군림하던 대공이, 단 몇 줄의 역사적 비유에 턱밑을 완전히 내준 꼴이었다.

엘리샤는 그의 반응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짜릿한 승리감을 느꼈다.

‘그렇지, 바로 이거야. 네가 아무리 무서운 대공이라 한들, 내 밥줄과 은퇴 자금을 위협할 수는 없다.’

그녀는 우아하게 손을 뻗어 탁자 위의 마기 탐지석을 가볍게 손가락 끝으로 튕겼다.

“전 그저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성실한 역사 교수일 뿐입니다, 전하. 제 관심사는 오직 학생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 평화롭게 정년퇴임을 하는 것뿐이지요. 대공 전하의 그 훌륭한 ‘선박 융통’ 사업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답니다. 다만……”

엘리샤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전하께서 제 평화로운 교수 생활을 방해하시겠다면, 저 역시 역사 보관소의 먼지 쌓인 사료들을 조금 더 열심히 뒤져볼 수밖에요. 라돈 제국의 선박 기록은 생각보다 아주 보존 상태가 좋거든요.”

완벽한 역습이었다. 대공의 막강한 감사 권력을 아카데미 교수의 학술적 지식이라는 방패로 완벽하게 무력화시킨 순간이었다. 칼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가죽 장갑 밑으로 그의 손가락뼈가 하얗게 불거졌다.

하지만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장부의 비밀 인과율을 지나치게 강하게 비튼 탓일까. 엘리샤의 몸 깊은 곳에서 방출되던 ‘악녀 지치’가 임계점을 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입자가 되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징—!

탁자 위의 청색 마기 탐지석이 갑자기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급격하게 보랏빛을 거쳐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칼리안의 시선이 순식간에 탐지석으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다시금 날카롭게 빛났다.

“이 마기는……!”

그가 자리에서 번개처럼 일어났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엘리샤를 덮치듯 다가왔다. 엘리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차, 장부 대가가 지금 터진 건가?!’

칼리안은 도망칠 틈도 주지 않고 오른손을 뻗어 엘리샤의 가냘픈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차갑고 단단한 그의 손길에 엘리샤의 고개가 강제로 위를 향했다.

“이 짙은 아르덴의 마력 진동은 속일 수 없다. 네년, 역시—.”

칼리안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리는 그 찰나였다.

뎅—! 뎅—! 뎅—!

비밀 심문실의 두꺼운 방음 결계를 뚫고, 카이로스 아카데미 전역을 뒤흔드는 거대하고 날카로운 청동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단순한 시간 알림 종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카데미 내부에 위험한 봉인 해제나 미지의 강력한 마기가 감지되었을 때만 울리는 최고 단계의 비상 경보 종소리였다.

칼리안과 엘리샤의 시선이 동시에 허공에서 부딪혔다.

“무슨……?”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쥔 손의 힘을 늦추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종소리는 대강당 방향, 즉 방금 전 엘리샤가 강의를 마쳤던 바로 그 장소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마력 반응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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